에덴의 용 - 인간 지성의 기원을 찾아서 사이언스 클래식 6
칼 세이건 지음, 임지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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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쏟아지는 과학을 소개하는 대중 서(書)들은 마치 자신의 진술만이 올바른 이론인 것처럼 하나의 극단을 표방한다. 이를테면 과학은 감정과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대자연 우주의 유일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근본주의적 견지이거나, 이와는 달리 여전히 미지의 전경이 남아있는, 합리주의에 기초하는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끌어들이는 식이다. 과학적 근본주의와 유사과학만이 과학을 대변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과학이라는 진리를 앞세워 생명을 조작하고, 다른 쪽에서는 낭만적이고 감각적인 구태로서의 신화에 열광한다.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의 대립은 이러한 양상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진실을 알고 싶은가? 그러나 진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라고 자문하면 답변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외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 과정 자체의 산물로서 획득되는 지식과 이해가 인간 삶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 『에덴의 용』은 과학 본래의 사명을 다하면서 인간과 세상의 본성,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발견하고, 과학의 형평적 자기이해와 과제를 탐색하는 균형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칼 세이건’은 합리주의적 지성에 기초한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자이고, 진화론적이고 데카르트적 기계주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과학의 세계에서 인문학적 비유를 동반한 정서의 세계를 발견한 몇 안 되는 지성이라 할 것이다.

 

1. 파충류의 동산에서 탈출한 포유류

 

행성 지구의 생성에서 시작하여 호모(homo)속(屬) 현생인류의 출현에 이르는 우주의 시간을 보게 되면 포유류 인간의 존재란 얼마나 순간적이고 희박한 가능성의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24시간이라 한다면 인류의 출현은 23시 59분 57초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시간에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불과 2,3초에 지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행성 지구의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찬양하자거나 대자연의 통제자로서의 독보적인 권위자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오늘의 ‘인간’이란 종(種)이 될 수 있었는지, 이 종(人間)의 본질적 특성을 가름하게 된 것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함이다.

 

‘세이건’은 뇌의 출현과 뇌의 구조적 진화를 쫒는다. 표제인 ‘에덴의 용’은 바로 이것의 메타포이다. 파충류(용; 뱀)의 동산에서 탈출한 포유류, 파충류에 적대적인, 혐오와 극도의 경계심을 무의식적으로 발현하는 포유류의 행동 속에 내면화된 그 본성을 해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크게 R복합체와 변연계, 그리고 신피질로 구성되어 있다. 뇌의 이러한 구조는 진화의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데, R복합체만 있는 어류에서, R복합체와 변연계를 가진 파충류, 여기에 신피질을 더한 포유류처럼 층위가 더해진 것이다. 결국 인간에겐 여전히 예전(어류, 파충류)의 본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다만 새롭게 쌓인 신피질이라는 뇌의 층위가 불안하게 이것들을 통제하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을 두 마리의 말(馬) - R복합체와 변연계 - 이 끄는 마차이며, 말을 통제하는 마부(신피질)의 힘은 약하다.”라는 유명한 비유는 꽤 탁월한 통찰로 보인다.

 

파충류의 뇌란 어떤 것인가? 관습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하며, 생리적 본능에 충실한 이기적 탐욕, 즉 폭력성이며 마치 정적인 사회에서 사는 듯한 행동을 하는 뇌이다. 간혹 ‘파충류 수준’이라고 상대를 조롱하는 표현은 과학적으로 정당한 언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예를 든다면, 우경화된 보수주의자의 대표격인 아베와 같은 부류들은 아마 인간의 차별적 상징인 신피질이 미성숙된, 즉 파충류적 인간에 머문 집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논의를 조금 더 발전시켜 보자. 신피질의 성숙과 활동이 곧 생물학적 인간으로서의 형성이라 할 것이며, 신피질이 없다면, 혹은 신피질의 활동이 극도로 미약하거나 정지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타당한 주장이 된다. 우린 이것을 윤리적으로 언제부터 인간이 되고,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에 기준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 즉 태아에게 인권을 부여할 수 있는 시기와 사망의 기점에 대한 준거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태아는 임신 3~4개월이 지나면 신피질의 활동을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한편 가사상태에서 신피질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면 사망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의 본질적 특성은 다름 아닌 신피질의 발달과 기능에 있다는 것이며, 바로 ‘지적 능력’을 지닌 인간의 뇌가 인간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우반구와 좌반구

 

신피질은 이렇게 인간의 특성을 구분 짓는 생물학적 특질이지만, 이것의 힘은 지극히 불안한 것이고 강력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먼저 발달한 비언어적 지각과 인지작용을 하는 우반구와 분석적이며 비판적인 능력과 놀라울 정도의 언어능력을 지닌 좌반구로 구성되어 있어, 균형적이지 못하다. 또한 신피질의 전형적인 작동이 시작된 것은 우주시간으로 0.1초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숙한 시간이다. 그러나 현생인류의 진화에 이르는 그 엄청난 시간에 비하면 이토록 짧은 시간임에도 자기 행성을 벗어나 우주항해의 여정을 준비하는 독보적인 지적능력처럼 진화의 속도를 앞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신피질’의 발달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신의 진화를, 자신의 미래를 해독하고 예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제는 있다. 어둡고 의심이 가득한 정서로 채워진 우반구의 세계, 예술과 감성의 세계에 갇혀있던 인간의 지성이 분석과 해석, 수식과 이해라는 이성의 세계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물질로 환산되었으며, 무한한 비언어적 영역이 언어적 영역에 장악당하여 오직 가시적이고 가청적인 제한성에 매몰되어 버렸다. 물론 좌우반구를 연결하는 뇌량, 전교련(anterior commissure)이 있어 좌우 기능의 협조적 교량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과학’이라는 합리주의 이성은 우반구의 활동을 극도로 제약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기계론적 물신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 터 잡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왼손(left hand)은 우반구의 지배를 받으며, 오른손(right hand)은 좌반구의 지배를 받는다. 때문에 언론을 장악한 좌반구가 오른손을 긍정어로 사용한 것은 비(非)신사적이고 편협한 동기가 의심스러운 관습이라는 것이다. 또한 생물학적으로 보다 긴 진화의 역사적 산물로서 ‘직관’을 발전시켜 온 우반구는 좌반구의 언어적 비판에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내 생각에 어떻게 그와 같은 지식을 얻었는지 알 수 없음”이라는 직관의 능력은 진화라는 선택과 변이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생물학적 지혜를 의미한다. ‘right hand'는 옳고, ‘left hand'는 그르다는 좌반구의 언어적 비판은 그만큼 의뭉스럽다. 우반구 우위의 시대에서 좌반구와의 조화를 이룩한 데카르트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 좌반구 우위의 교만이 불러온 또 다른 의심의 시대에 우반구와의 조화는 필수적 요청이라 활 것이다. 물질만능, 과학만능이 아니라 물질과 정신, 과학과 경외라는 감성의 균형이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3. 과학사(科學史)적 만찬으로서

 

인간 지성의 본질과 진화에 대한 탐구, 그리고 궁극에는 진화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인간 뇌’에 대한 생물학적 증거로서의 전(全)학문적 통찰의 서(書)라 할 수 있다, 천체물리학작가 쓴 ‘뇌’의 과학은 그래서 신화라는 거대한 인문학적 서사가 흐르고, 단순한 경험의 추상화(抽象化)로서의 대수(代數)의 발견에서 해석기하학이란 추상(抽象), 그 자체의 인지에 이르는 철학적 사변(思辨)이 있으며, 뇌의 구조적 층위의 발현에서 계급화, 관습화와 같은 보수성의 내재적 원천을 발굴해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다분히 기계적 사고의 전진으로서 뇌의 미래기술, 인간의 본질적 한계에 대한 인류의 청사진을 고심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 책은 과학서에 머물지 않고 인류사에 대한 서사시이며, 철학적 고찰이고, 미래학인 총합적 인문서라 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초판이 발간된 지 반세기에 근접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책이 읽히는 까닭은 인간인 ‘나’를, 그리고 후손인 우리의 미래와 조화로운 삶의 본질을 사유 할 수 있는 깊고 넓은 지적 토대를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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