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스 포풀리 - 고전을 통해 알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모든 것
피터 존스 지음, 홍정인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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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롭고 만족스러워진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36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오디세이아가 그리스어로 구술되기 시작했던 기원전 8세기에서 서(西) 로마제국이 몰락했던 서기 5세기까지,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 대한 '역사-고고학, 문헌학, 정치학, 언어학, 철학'을 아우르는 다각적이고 다층적 시선을 지닌 저술이다. 위의 인용 문장처럼 고전학은 당대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으로부터 우리 시대의 관심사, 즉 삶을 결정짓는 현상들을 오늘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며 어떤 유익성을 발견케 한다.

 

책은 로마로부터 시작되지만 이보다 앞선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하는 것이 수순일 것 같다. 그리스 문명이란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등의 도시 국가만을 뜻하지 않는다. 터키와 시리아지역인 소아시아 사람인 호메로스로부터 레스보스 섬 출신의 시인 사포, 터키 서해연안 밀레토스 출신인 탈레스, 사모스 섬 사람인 피타고라스, 남부 이탈리아 엘레아 출신의 제논과 같이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5~4세기에 이르는 대 철학자들과 시인의 출신지가 말하듯 그리스는 지중해 연안을 지휘하는 광대한 지역의 패권 문명이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기원전 338년의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 권역 통일과 원정을 통한 영토 확장은 그리스어와 그들의 신이라는 문명이 근동과 아시아 깊숙한 지역, 아프라카 북부지역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권역을 그리스화 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공통 그리스어(코이네;Koine)라는 같은 말을 하는 인간과 지역의 거대한 확산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나 소아시아의 아탈로스 왕조 등 지중해 연안의 왕조는 모두 알렉산드로스가 정벌 후 남겨둔 후예 왕들이 정착해서 일궈낸 왕조들이다. 로마가 기원전 197년에서 기원전 149년에 이르는 장장 반세기에 걸친 그리스 복속의 기간은 지중해를 둘러싼 그리스 권역의 많은 패권국가들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야만이 문명을 정복하면 발생하는 것은 문명의 이식이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포획된 그리스가 사나운 정복자를 다시 포획해 교양 없는 라티움에 문화를 가져다주었노라라고 말했듯이 로마의 그리스 복속은 로마의 그리스화로 이어진다. 그리곤 약탈한 그리스의 무수한 미술, 조각품, 각종 문헌들은 전례로서 모방되고 표준화되어 로마의 것이 된다. 결국 로마의 문명인 라틴 문명이란 그리스 문명의 라틴화라 할 수 있다. 로마는 결코 그리스를 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일본()이 한국을 잊지 못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로마 제국에 흡수된 그리스어가 잊힌 언어가 되는 상황이 닥치는데, 로마 세계의 주요 정치권력이 되는 기독교 세력의 부상이다. 다신을 모시는 그리스 문명, 그네들의 철학과 사상을 기독교가 수용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서기 250년부터 기독교 교회는 라틴어만을 유일한 교회언어로 하면서 이후 1천 년 이상 그리스어 문헌은 서구 문명에서 사라지게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서구 유럽 전역을 장악한 기독교는 사실 인류의 문명을 거꾸로 돌려놓는 역할을 한 것이랄 수 있는데, 교회의 언어인 라틴어가 서구의 교육과 학문의 중심어가 되어 일종의 문화혁명인 계몽주의가 대두되는 17세기까지 중세 암흑시대의 독점적 권위를 구가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쯤에서 그리스-로마문명의 배경을 그치고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이 고전학 저술은 무진장한 독서의 즐거움을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는데, 그리스의 민주정에 대한 고전 탐색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의 터무니없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부분이나, 지식이 주는 쾌락이 치솟는 장이라 할 수 있는 제 5여자 위의 남자와 제 6황제와 제국에 이르면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게 되기까지 한다.

 

민주정을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데모스(Demos)가 당대에는 일반 시민이 아닌 부유층과 귀족층을 지칭하는 언어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법 앞에 평등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소노미아(isonomia)'를 사용했다고 한다. 데모크라시는 후대에 의미가 확장되어 사람 일반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들의 민회(에클레시아)나 상임 평의회(프리타네이스)라는 18세 이상 남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가 기반이었음은 많은 이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르콘(archon)이라는 추첨으로 선출되는 행정관 중에서 스트라고테스로 불리는 군사령관 10명만은 그 기능의 고유성 으로 인해 매년 투표로 선출하는 예외를 두었으며, 임기가 종료되면 수행 업무의 잘잘못을 따져 10명 중 2명을 사형시켰다는 것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무보수 행정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부정부패가 싹틀 여지가 없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여기에는 아주 특수한 이야기거리가 있다. 죽기까지 15년 연속해서 아르콘으로 활동한 페리클레스란 인물이다. 동시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명목상 민주정이지만 실제로는 일인자의 제국"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1인 독재정이었을까? 그릇된 국정 수행을 하면 민회에서 사형에 처해지는데 독단적 정책 수행이란 아예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민의 존중 정치가였으며, 타인 설득과 장악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사학, 즉 웅변술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기술이었는지 가늠케 된다.


 




웅변술이 시민 자신을 지키고 의지를 관철시키는 삶의 필수 자질이었음을 보여주는 그 유명한 '네아이라 재판' 과정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노예이던 네아이라를 해방시켜준 남편 프리니온이 오쟁이 지게되자 네이아라가 새롭게 살고 있던 스테파노스라는 남자를 고소하곤 배심원단을 향해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이다. 그 판결 내용이야 오늘의 시선으로는 우습기 그지없지만 그 연설 내용이나 배심원단 투표 방식은 법 질서에 내재된 민주주의의에 대한 당대의 믿음을 보여준다. 네아이라 재판보다 더욱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데, 기소인이 내세운 죄목을 보면 이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나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내용이다. 기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예 출신으로 시민이 되었고, 본래 거지였는데 부자가 되었으며, 서기보였던 사람이 입법자가 되었다.(191)”

 

사실 이것은 죄가 아니지만 핵심은 피고가 된 인물에게 유력자인 적들은 분노를 일으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사람이 법을 어겼는가?라든가, 위법을 증명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한테 자꾸 방해가 되는 이 자를 어떻게 혼내 줄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었다고 이해하면 이 기소행위의 저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시민 다수의 삶과 합치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를 통해 공동체에의 결속을 다졌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이들의 민주정은 권력이 시민의 손 안에 있는 평등과 법의 연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수평적 결속, 민주주의 이상적 실현 그것이었다.

 

이에 짧은 코멘트를 하고 가야 할 것 같다. 오늘날 우리들은 의회 민주주의, 대의 민주정치라며 민주주의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질문만으로도 이것이 궤변(詭辯)에 불과함이 분명히 드러난다. 선거에서 누가 후보로 나올지 누가 정할까?” 국민이 정하나? 아니다. 국민이 정하지 않는 후보들이 나와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투표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라 부른다. 이것이 엉터리인 것을 길게 말하는 것은 수고스럽기 만한 언어 낭비가 될 것이다.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의 명칭과 외형성만을 빌려 사용할 뿐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민주주의 제도 형식이다.

 

이제 이 책 최고의 즐거움을 주는 2개 장, 여자 위의 남자 황제와 제국을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스 로마 당대의 비문, 지금은 유실된 저작물, 연설문, 서간문을 비롯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언장, 간통에 대한 소송 연설, 폼페이 벽의 낙서에 이르기까지 결혼생활과 자녀에 대한 관심 등 일반 시민인 남성과 여성에 대한 훔쳐보기는 즐거움에 들뜨게 한다.

 

기원전 452월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가 출산 중에 사망한 자신의 딸 툴리아를 향한 슬픔으로 모든 대화를 단절하고 숲으로 들어가 고독과 책을 벗하며 삶을 버티지만 매번 별안간 터지는 울음에 지고 마는 자신의 상황을 전하는 벗에게 전하는 편지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언장에 적시된 딸 피티아스, 아들 니코마코스, 아내 헤르필리스, 조카 니카르노에 대한 유산 배분과 이들에 대한 보호의무와 권리에 대한 것인데, 당대의 남자와 여자에 실체 상을 읽는 중요한 자료가 되어준다. 한편 자신의 코앞에서 다른 남자와 아내가 벌이는 은밀한 관계를 발견한 에우필레토스라는 인물이 간통한 사내를 살해하고 자기변호를 위해 하는 연설은 당대 여성들의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이러한 진귀한 사례들이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역사적 그리고 주제의 일관된 지향과 어울려 이 책의 진가를 높여주는 부분이라 하고 싶다.

 

로마인은 불모지를 만들고 그것을 평화라 부른다.", 자기비판적인 인간들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도덕 추구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이익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속주를 직접 통치하지 않았던 것은 도덕적 자질이 고매해서가 아니라 효율적인 이익의 향유만을 원했던 이유이다. 정기적 인구조사와 징세 체계를 정비하여 효율성 높게 세금을 흘러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족했다는 것이다. 이들 문명화되지 않았던 속주민들에게 이미 그리스문명이 찬란하게 꽃핀 로마 제국의 화려한 아케이드와 욕장, 사치스러운 연회 등은 자연스레 그네들의 삶으로 침투하게 되었으며, 이를 문명화라는 미명하에 예속화가 별다른 장해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동시대의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그의 저술 아그리콜라에서 식민지 브리타니아(오늘의 영국) 사람들은 서서히 부도덕한 쾌락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무지한 그들은 이것을 문명화라고 불렀으나 사실 그것은 예속화의 과정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의 태도와 요령은 지중해 지역의 로마화와 함께 넘쳐나는 부와 자만으로 스스로 붕괴하는 양극단의 현실을 가져온다. 국가의 세입의 원천을 틀어쥔 황제는 더 이상 정치 경영의 중심지인 로마에 있지 않았으며, 외딴 곳에 궁전을 짓고 해방 노예들의 조언과 결정에 의존하는 폐쇄된 의사결정으로 모든 것이 은폐된 시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죽음과 전남편과의 자식인 티베리우스를 제위에 올리는 리비아의 추정된 음모는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서의 지적처럼 궁정의 은폐성, 그 정보의 철저한 차단성이 지닌 결정적 폐해를 시사한다. 정확한 실상을 외부의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소문이 억측을 쓰고 뉴스로서의 힘을 얻는 것이다. 가짜 뉴스 생산의 한 단면이다. 이처럼 밀실 정치의 해악은 인간 역사 내내 국가 경영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준다. 한편 이들 황제들이 시민을 자신의 편으로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스펙타클을 연 것을 자신들의 치적이라 말하는 것에서 저자와는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싶어진다. 피터 존스는 황제들이 시민의 눈치를 보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쇼와 거대 행사를 개최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시민의 비판적 저항 정신을 무디게 하는 일종의 최면술이라 하여야 하지 않을까?

 

우민화된 시대 대중은 거대한 검투사 경기와 전차 경주, 해상 전투 쇼에 넋이 빠져 그 흥분의 열정에 도취된다. 우리는 궁전 발코니에서 로마 전경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쇼 맨 네로의 영상을 그릴 수 있다. 시민은 네로를 위해 환호했고 그의 편이었다. 그가 뱉은 말처럼 죽음이로다. 그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였나는 번영하던 로마가 왜 무너지기 시작했는지 이해하게 되는 구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서기 238년 한 해에만 황제가 6명이었으며, 100년 동안 황제의 수가 60명이 넘었다니 위대했던 제국의 체제는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 아마 오늘의 말로 표현하자면 포퓰리즘이란 것의 폐해는 국가마저도 몰락시키는 역사의 증언이랄 수 있겠다.

 

이후 7~9장까지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융합 흡수, 프랑스어의 사용과 고대 영어로부터 중세와 현대 영어로 정착하는 언어의 역사 과정을 쫓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교육과 문법, 언어의 사회적 영향을 고전의 문헌들과 사료들로부터 그 의의를 탐색하며 현대적 의미로 새기고 있다. 여기에는 언어의 본성으로서 유비와 변칙에 대한 고대 사상가들의 학설은 물론 교육과 직접민주주의 필수 요소로서 언어와 수사학적 중요성을 추적하기도 한다.

 

10장의 스토아와 에피쿠로스로 대립되는 두 고대 철학사상을 대비하면서 인간 삶과 우주적 본질에 대한 의문에 대한 도전의 역사는 일신교 기독교의 대두와 함께 어떻게 이들 사상이 소외되거나 사멸되며, 흉측스런 누명을 쓰게 되었는지를 살핀다. 원자론과 영혼 불멸성에 대한 부정을 주장한 에피쿠로스가 감각적 욕망을 쫓는 쾌락주의의 누명을 쓴 것 역시 기독교의 박해라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이 살아남은 것은 스토아의 물질과 영혼의 이원론이나 선한 신과 세상의 악에 대한 그들의 신정론이 기독교의 입맛에 맞는 적절한 교리의 토대를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인류에게 과학과 철학, 문학, 미술과 조각 등 예술, 그리고 인간 삶의 문명적 기반을 제공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이 다 방향의 고전 탐색의 저술은 무엇보다 흔치 않은 흥미로운 사적(史的) 편린들을 총합하여 일관된 의미를 일구어내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성찰을 하도록 은근히 부추긴다. 아마도 이 책을 읽게 되는 이들은 책 속의 무수히 소개되는 고대의 사료들이 제공하는 사례에 빠져 그 지적 즐거움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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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은둔의 역사 -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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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혼자 있는 것의 아픔을 나타내기 위해 생긴 표현이다.

또 그것은 혼자 있는 것의 영광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독이라는 어휘를 만들었다.

-신학자, 폴 틸리히 (281)

 

 

흔히 목격하게 되는 사람들, 즉 이 시대의 상징적 인물을 손에 쥔 기기 위로 조용히 어깨를 수그린 모습이라고 저자 데이비드 빈센트는 인파 속에서 정신적으로 분리된 오늘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무리나 군중 속에서도 철저히 개인화되어 혼자 있기를 주장하는 세계에 대한 적절한 설명처럼 보인다.

 

이러한 모습에서 집단 속에 있지 않으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고독과 외로움의 경계에 선 현대인의 모호한 심상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을 고립적이고 기쁨 없는 쾌락주의에 내맡겨진 인간이라 주장할 수도 있으며, 이와 달리 몰입과 자기 행복의 긍정적인 창의적 고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있기의 부정적 발현인가? 긍정적 실현인가? 집단과 혼자 있기의 절묘한 균형인가?

 

책은 이 같은 혼자 있기의 역사를 집어가며 고독의 다양한 형태들 - 산책, 등산, 낚시, 바다항해, 뜨개질, 책 읽기, 수도원과 수녀원의 삶, 교도소 독방 등 -에 투영된 삶의 조화로운 가치로서 은둔, 은거, 고독의 변화를 탐사한다. 도시와 노동의 답답함에서 풀려나와 시냇물 거품을 바라보며 들판 목초지를 한가로이 거니는 산책 속의 고독을 노래하는 1820년 자작시 <고독>의 시인 존 클레어 군중의 회오리에서 달아나는 달콤함이라는 고독의 이상성으로 글을 연다. 이를 시작으로 당대 걷기의 유행과 도보 여행, 등반 여행에 이르는 혼자 있기의 갈망의 형태에 스며든 삶의 철학들을 소개한다.

 

이른 아침의 산보에서 다가오는 평화로운 고독의 울림을 노래하는 워즈워스의 시 <서곡>에서부터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자유의 충족과 열린 마음을 가져오는 도보 철학에 이르기까지 고독한 산책자는 공동체와 하는 삶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은밀함이 주는 고독의 절대 요구성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당대에 이러한 혼자 있기에 대한 찬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뚜렷한 목적 없이 배회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부랑자 단속법이란 것이 만들어지면서 산책이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당대의 귀족과 고위 관료들에게 평민들의 혼자 걷기는 유약하고 이기적이며 불온한 행동으로 보였기에, 단독 도보는 단체 보다 윤리적으로 훨씬 아래다.”라며 단체 행동, 공동의 추구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고 하니 고독을 즐기기 위한 산책마저 금지 당하던 인간 역사의 추레함을 다시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다시 산책, 홀로 걷기의 찬양으로 되돌아가보자. 바이런의 잘 알려진 연작 시집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2부에서 그는 집단의 부재와 미지 자연에 깃든 정기를 찬양한다.

 

길 없는 산을 오르는 것,

홀로 비탈길을 거품 이는 폭포 위로 숙이는 것,

이것은 고독이 아니리.

이것은 자연의 매혹과 대화를 지속하고 펼쳐지지 않은

자연의 보고를 보는 일일지니.” -69

 

혼자 있기의 수단이 여행, 등반, 산책, 그 무엇이 되었든 고독은 압박을 벗어난 해방감과 자연과 일체화되는 만족감을 준다. 직업, 공동체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만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는 자유야말로 고독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독이 마냥 축복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오염과 부패가 만연한 지하 감옥, 그리곤 참혹한 공개 사형 현장이 제도와 규율을 제대로 갖춘 교도소가 된 것은 19세기 들어서 비로소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당대 유럽 사회는 수감자들을 영적으로 교화시키겠다고 독방에 감금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모든 종류의 접촉을 차단한 채 독방에 가두어 놓았더니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고 죽이더라는 것이었다.

 

카톨릭은 고독의 공포 속에서 생명의 유한성을 생각하면 마음이 열릴 것이다.(164)”고 주장했다니 이 인간에 대한 몰지각과 몰인정의 종교가 인간의 생명, 그 존엄성을 인정하기까지 다시 1세기가 흘러야 했으니 아무튼 인간 역사는 수치스러움의 연속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강제된 고독은 고립이라는 타율적 차단의 형태이지 고독의 개념과는 그 범주가 다르다고 해야 할 것 같다.

 

18세기부터 21세기 오늘에 이르는 흥미로운 고독의 역사라 할 이 책을 모두 열거하려면 지면이 한 없이 길어질 듯 하지만 고독의 위험을 경고한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 노스트로모의 중심인물인 저널리스트 마르틴 데코는 섬에 남아 홀로 구조를 기다리다 고독사(孤獨死) 한다. 작자는 이 비극 원인을 작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고독해서 죽은 것이며, 고독은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적이고, 가장 둔한 자들만 고독을 견딘다.(229)”고 썼다. 절대 고독, 종일 새 한 마리 못 봤네, 온종일 이 중얼거림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완전히 적막한 하루였다. 평생 이런 날은 처음이었다.” 고독이라는 광활하고 무심한 세계에서 내적 목적의식을 찾을 수 없을 때 인간은 쉽게 허물어질 위험 앞에 그저 삼켜지기 쉽다.

 

이러한 고독의 위험에 맞서 내적 고독의 승화를 말하는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존 쿠퍼 포이스의 신비주의적 고독의 철학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하겠다. 비록 오늘날 개인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주장들이 힘을 지닐지언정 번잡한 생활 속에서 사회를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은 내적 고독을 가꾸는 일뿐이라고 반박하는 그의 무형의 명상에 대한 강조는 내 고독의 추구에 강력한 지지가 되 주었기 때문일 것 같다.

 

대화를 중단하고 영혼이 장구한 세월의 중얼거림을 듣고,

우주의 신비를 느끼는데 필요한 고요를 만들어야 한다.” -234

 

그의 지적처럼 도시를 가득 채운 고층 빌딩의 막대한 괴물성과 장중한 공포가 발산하는 피로를 훌훌 떠나 자연의 유려하고 순수한, 오랜 차분함은 내 속을 흩뜨리는 욕망과 시기와 분노를 잠재워준다. 저자는 이것을 현대의 삶에서 인공적이지 않은 틈이 있다고 믿는 무모한 순진함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고독의 소명이 무한한 위험을 안는 고뇌임을 모르지 않는다.

 

이제 외로움이 부상하는 오늘의 시대를 말하는 외로움의 치명성이라는 과장된 담론을 살펴보는 것으로 책의 소감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영국의 건강 및 사회연구소의 2003년 보고서는 노년의 외로움이 현저히 증가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우리 시대가 외로움을 상징적 실패로 규정지으려는 태도, 그리고 외로움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인 슬픔을 소외로 이해하려는 오류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정신의학의 만연성은 외로움을 정신 질환화 함으로써 삶을 위협하는 요소로서 증폭시키는데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외로움은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단지 어떤 외로움은 달리 이해될 뿐이다. 사실 여기에는 현대성의 실패를 의식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부정적 경향이 한 몫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게도 한다. 물론 오늘의 사회가 경쟁적 이기심과 극단적 개인주의로 견뎌낼 만한 친밀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를 고작 환상적 공간이 주는 쾌락의 세계에 맡겨 인간성의 본질인 연결성을 파괴하는 현실의 은폐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1인 가구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혼밥을 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는 것이 소외나 고립의 외로움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오늘의 혼자 살기는 현대성의 병폐가 아니라 삶의 전략이라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혼자 있기는 사회 거부가 아니라 사회 참여를 배우는 필요 요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외로움이 문제되는 것은 더 이상 도피할 여지가 없을 때이지, 고독과 집단으로의 참여를 언제라도 왕래하며 이를 조절 할 수 있는 상태는 삶의 건강성이며 균형이라 할 것이다. 점점 혼자인 것이 정상이 되는 세상이 되고 있다. 고독을 무한정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짧고 우연한 혼자인 순간들의 유형이 다양해지고 있을 뿐이다.

 

디지털 시대가 야기하는 소통 파괴와 인간관계의 진정함을 훼손하는 것도 사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제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여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에서 자아의 안정감과 공감능력을 강화하는 시선을 읽어야 하며, 함께 일 때 생산적 고독에 빠져드는 법을 익혀야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산책과 노동의 균형을 잡던 18세기의 사람들처럼 혼자 있기와 함께 있기의 슬기로운 지혜를 갖춰야 할 때다. 고독의 지혜가 풍부하게 묻힌 역사의 길을 거닐며 고독에 대한 빼어난 지식들을 무한하게 또한 매력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고독과 관계를 맺을지 생각하는 이들에게 아마 이 책은 매혹적 즐거움을 선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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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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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이탈리어를 알지 못하는 나는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시적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시적 은유와 마법적 시행(詩行)은 커녕 시적 질서가 신적 질서에 걸맞게 쓰였다는 운율과 각운, 리듬이 주는 다양성에 결코 감응하지 못하고, 그 뉘앙스를 포함한 언어의 내적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우주의 위대한 드라마(141)"라 칭송하는 인류의 걸작을 마치 산문을 읽듯이 아무 맛도 없는 그 번역된 문장의 문자 뜻을 헤아리는, 단지 하나의 지식 쌓기 경험에 머무르는 터무니없는 독서에 머무는 데 그치기 일쑤였다.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문학 비평사()에서 한 획을 그은 미메시스에 앞서 집필된 이 독창적 연구서를 읽게 된 까닭이다.

 

시인 '단테'의 연구서인 단테; 세속을 노래한 시인은 총 6장으로 책의 앞 2개장은 미메시스(모방)의 철학적, 문학사적 관점의 변화에서 부터 논리적 구조, 윤리적, 정치적 상황에 이르는 시인만의 독특한 개성을 지니게 되었는지 단테 초기 시작(詩作)신생(La Vita Nuova)을 중심으로 신곡에 앞선 선행적 이해를 돕는다. 그리고 나머지 4 개장은 신곡의 주제, 구조, 등장인물들의 재현 방식과 리얼리티를 통한 시적 비전의 설명을 통해 작품의 문학적 숭고함을 논의한다.

 

신곡을 흥미를 잃지 않으며, 작가가 형상화하려한 의도의 작은 부분이라도 가능한 알아차리는 읽기가 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인 만큼 현상과 이데아를 오가는 미메시스(모방) 이론의 격렬한 본질 규명의 장황함은 건너뛰고, 단테 시에 드러나게 된 리얼리티가 중세 교회의 진리와 현상의 통합이라는 전례 속에서 재현 예술의 당위성을 회복했다는 것 정도로 그쳐야 할 것 같다.(이하 하단 참조) 100곡의 칸토로 구성된 신곡이 어떤 문학적 연원 속에서 자라났는지, 당대 시의 논리적 구조나 주제들, 그 문학적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단테의 초기 시작(詩作)에 대한 세심한 논의가 훨씬 주목을 끈다.

 

단테는 '스틸 누오보(stil nuovo;새로운 스타일)' 그룹으로 불리는 일군의 시인들과 함께 코르젠틸레(corgentile; 온유한 마음)라는 종교적 색채 짙은 일종의 귀족적 비밀결사 같은 분위기에서 그의 초기 시작 활동을 한 모양이다. 이렇다 할 문화적 기반이 없던 당대 이탈리아의 문학은 사회적 정신적 엘리트라는 선민의식을 지닌 시인들에 의해 고상한 삶의 신비로서 사랑을 얘기하던 '프로방살' 시의 전통을 받아들인 신비주의적, 종교적 특징의 독립적 예술 운동이랄 수 있다.

 

스틸 누오보의 본질적 주제는 사랑(amore)이다. 이 사랑은 소위 하느님의 지혜를 알게 해주는 매개 작용이며, 신앙, 지성, 내적 부활을 부여하는 힘이고, 제한적인 존재에게만 부여되는 영적 선물의 의미를 지닌다. 단테는 창시자인 '귀니첼리'나 주요 시인인 '구이도 카발칸티' 보다 시의 암시적 힘과 가락, 시에 내재된 풍성한 목소리에서 단연 발군의 존재였음을 시의 비교를 통하여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이를테면 동일한 돈호법의 사용에 있어서도 귀니첼리는 어조나 모방했지 시인의 영감이 발하는 주문(呪文)적 효과를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알았던 시인은 단테가 유일했다는 것이다.

 

 


심리 상태를 표현하려는 추상적 수사법이 아닌 독자에게 마법을 걸려는 강력한 시적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지옥1곡에 "그럼 당신이 바로 그 베르길리우스...", 라든가, 천국33124행의 ", 영원한 빛이여"처럼 긴급한 명령과 부드러운 애원, 고뇌에 찬 기도와 자신감에 찬 호소 등 시의 구체적 힘을 강력하게 만들어내는 당대 문학의 새로운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신곡은 자신이 환기하고자 하는 리얼한 상황의 극단적 구체성 속으로 독자들이 뛰어들게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신곡을 읽으며 시에 드러나는 이미지들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감응해야하는 가를 시사한다. 이들 이미지는 아주 확정적이고 독특한 상황의 중심에 서서 발언할 때이며, 밝게 빛나고 생생하며 힘을 소망하면서 힘을 얻는다고 한다. 이는 단테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비전을 정확히 표현하겠다는 욕망(105)"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현장감과 열정적 느낌을 독자는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곡은 '토마스 아퀴나스'신학대전의 철학(스콜라 철학)을 단테 자신의 시에 일치시키려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토미스트(토마스 아퀴나스 주의)는 직관주의 배척과 합리성 중시의 냉엄한 철학이다. 여기에 스틸 누오보의 감각적 신비주의의 시를 결합시켜 예리한 합리성이 지닌 이성적 한계를 구체적 움직임을 가진 인간의 비합리적 영감과 결합시켜 통합과 질서의 세계를 성취해냈다는 것이다.

 

신곡의 독창성은 단테 자신이 알고 체험했던 세속적 역사적 세상을 이승이 아닌 저승에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저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들의 현세적 캐릭터를 잃지 않도록 하여 강렬함의 유지와 궁극적 운명의 일치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신곡을 읽다보면 '신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어떻게 고통이라는 감각을 지닐 수 있는가'라는 기독교 교리 위배의 의심을 갖게 된다. 아마 성 토마스의 철학도 이 점을 골칫거리로 여겼던 모양이다. 육체에서 벗어난 망자의 영혼이 최후의 심판 때까지 어떤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가?

 

단테는 형식의 존재는 물질의 존재와 동일하다는 토미스트 철학을 차용하여 영혼의 합성물은 변하지 않는다는 논리 하에 핵심적이고 민감한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는 '그림자 신체'를 부여했다. 현세의 행위와 고통과 일치하는 저승의 영혼들이 지닌 감각의 구체성이 실현됨으로써 현세적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한편 신곡의 저승관은' 베르길리우스'아이네이아스6권이 핵심적 아이디어와 시적 진실을 낳게 하였음을 지적한다.

 

지옥과 연옥의 분류법, 징벌과 미덕의 분류가 얼마나 면밀하고 교리에 부합하도록 설정, 묘사되고 있는지와 더불어 단테가 고안한 징벌의 시적 판타지는 윤리의 원천과 그 개념을 파악토록 한다. 특히 관심을 끄는 지옥의 분류법에서 폭력보다 더 낮은 등급의 지옥인 제 8원과 9원의 죄목이다. 즉 속이는 자들을 최악의 죄악으로 분류하는 것인데, 8원에는 사기꾼, 위선자, 아첨꾼, 문서 위조자들의 장소이다. 오늘 우리네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는 주요 악질적 범죄와 연결됨을 깨닫게 된다. 더우기 가장 낮은 지옥의 등급인 제 9원이 배신, 신뢰의 유대관계를 꺠뜨린 자들에게 배치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게 다가온다. 바로 지금 한국의 정치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현실이기에 이 기독교적 윤리의 틀은 정치적 인간에서 배신행위가 얼마나 심중한 해악인지를 생각케 한다.

 

신곡은 환상적 고딕세계의 연출을 통해 내세를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니다. 인간 이성의 작품이다. 상상의 정밀성과 명료성, 지적 복잡성을 강력한 정서의 시공간 묘사해 내 현세의 사건들을 감동적으로 표현한 인간 삶에 대한 장대한 비전의 웅변이다. 인간 생애의 우발적이고 특수한 세부 사항들로부터 운명의 총합을 알려주는 휴먼드라마라 할 것이다. 이 중세의 세계관이 21세기 인간에게 유의미한 증언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이러한 연유이지 않겠는가? 아우어바흐가 추적한 단테 문학에 대한 이 치열하고 꼼꼼한 연구서는 다시금 신곡의 세계로 독자의 시선을 유혹한다.

 

 


 

참조: 미메시스 인간관 (에리히 아우어바흐) 에 대한 요약

 

'에리히 아우어바흐'는 그의 주저 미메시스와 같이 호메로스의 모방으로부터 미메시스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미메시스란 현실의 관찰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사전(a priori;선험적)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외형이 아닌 인물의 본성과 본질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인물에 대한 관념이 확정되면 굳이 일부러 애쓸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인물의 묘사는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플라톤은 경험의 세계란 진실과 존재 자체인 이데아를 기만적으로 복사한 것에 불과하며, 예술 작품이란 그 복사된 현실 세계의 대상을 다시금 열등하게 복사한 등급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것이라며 미메시스 비판 이론을 국가10권에서 펼치기도 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은 현상 속에 스스로 실현되며", 이를 "형상이 질료 속으로 들어간다"고 파악하기도 했다.

 

예술가의 영혼 속에 들어있는 형상이 예술 작품에 들어가 있는 것이라며 초월적 세계에서 지상의 세계로 미메시스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본질에 대한 참여를 현실세계로 끌고 옴에 따라 무질서와 혼란, 우연의 사건으로 점철된 인간 세계의 리얼리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에서 부정되는 형국이 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세계로 회복시킨 것이 중세 기독교 철학이 지닌 인간의 형상을 한 신에 대한 이해이다. 신곡은 이러한 신인 철학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를 토대로 한 인간의 실재적 외양, 즉 사전(事前)관념에 내재된 전인(全人)적 미메시스의 반영이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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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2-03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찜이요

필리아 2022-02-04 17:31   좋아요 1 | URL
신곡을 읽고 이해하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듯합니다. 좋은 시간되세요,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셔기 베인
더글러스 스튜어트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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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열망이 지향하는 것과 현실적 삶이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과의 간극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곤 한다. 오늘의 세계는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이 욕구를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실패자로 취급하며, 그 책임은 오직 개인의 능력이라는 것에 돌린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는 그야말로 효율성과 합리성을 토대로 한 신자유주의의 약육강식 생존 논리가 인간 정신을 지배하던 시대이다.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산업 구조 조정이 무참하게 감행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실직자가 되어 길거리로 내쫓기고 가족들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대던 시기이기도 하다.

 

탄광을 비롯한 오래된 제조업 기반의 도시 글래스고는 마거릿 대처의 이러한 경제정책에 직격탄을 맞은 대표적 도시이다. 이 소설을 마냥 등장인물들의 사적 삶이라는 인간 내적 욕망의 갈등이 빚는 비극이라는 시선만으로 읽을 수 없게 한다. 소년 '셔기()'가 알코올에 중독된 엄마 '애그니스'의 열망을 "새로운 물건에 둘러싸여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502)"하는 것이라고 감지하듯, 마치 물질만이 사람을 갱신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희망이 되고 만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강요한 사회가 그 책임을 외면할 때 빚어지는, 닿지 않는 욕망으로 자멸해가는 인간들의 초상이 바로 이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소설은 직접적으로 자의식 강한 세 아이의 어머니인 애그니스가 겪는 도달되지 못하는 욕망을 오직 강자가 구축한 환경 탓이라고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계층구분의 확고화와 일자리를 잃고 무력감으로 뒹구는 남자들, 실직과 장애 수당에 기대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억척스러워진 여인들처럼 사람들에 스며든 삶의 배경임을 부인할 수도 없다.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계층화와 인간 구별 짓기는 도처에서 명료하게 드러나 배제된 인간들에게 '수치의 낙인'을 찍는 장면이 반복되어 등장한다. "실눈을 뜨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들의 시선(341)" , 억양과 사투리처럼 언어습관에 배어있는 말투로도 인간을 차별하는 "억양의 굴레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521)."라는 절망에 지배되고, "서로를 보기에 꺼리는 두 세계의 잔인한 대조(410)"로서 외딴 공영주택단지와 기막히게 고급스러운 회원제 골프클럽은 그야말로 그 어느 누구도 새사람이 되는 것을 차단하는 세계, 극단적인 양극화 사회가 되었음을 드러낸다.

 

이 작품의 중심인물은 '셔기 베인'이라는 소년이다. 그의 관점에서 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비가(悲歌)이다. 세 아이, , 캐서린, 셔기()의 엄마인 애그니스는 소비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전형적 여인으로, 세련된 표준어를 사용하는 자의식 강한 여성이다. 종일 앞치마를 두르고 가부장적 남편을 위해 집에 노예처럼 묶여있는 삶을 원했던 첫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운 남자와 결합하지만 결코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바람둥이에 가족을 돌보려는 의지조차 없는 쓰레기다. 물질적 욕망이 곧 자존감인 여자는 이 현실적 상태가 빚어내는 괴리를 회피하지 못하고 술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셔기의 아빠인 둘째 남편 빅 셕은 아내와 세 아이를 정부의 폐광조치로 죽어가는 동네, 핏헤드의 공용주택에 버리듯 밀어 넣고는 다른 여자와 결합하기 위해 떠나버린다. 여자의 물질적 욕망이란 고작 카탈로그에서 아이들에게 입힐 옷과 집안을 꾸밀 소박한 가구이며, 물질문명이 이룩한 도시의 화려함에 참여하는 작은 이벤트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곰팡이가 피어난 주방 벽, 이탄 가루를 뒤집어 쓴 동네 여자들과 아이들의 꾀죄죄한 추레함처럼 가난과 절망의 분위기에 잔뜩 눌려있는, 도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탄광동네는 애그니스를 치욕과 좌절의 수치심과 슬픔의 세계로 몰아넣는다.

 

애그니스는 알코올의 지배력에 점점 빠져들고 취기는 남자들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표출된다. 그녀의 주장처럼 "슬픔에서 벗어나려고"마셨거나 "힘든 날에 맞서 싸울 투지를 불어 넣(416)"기 위해 마셨거나 아이들과 주변사람들을 더불어 절망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아이들은 이 끔찍한 터전으로부터 자신들의 삶을 위한 탈출만을 모색하고, 딸 캐서린은 오직 이 목적만을 위해 결혼하여 애그니스로부터 달아난다. 그림에 천재적 재능을 지닌 큰 아들 릭조차 "스스로가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느끼게"하는 이 지옥같은 가정이라는 공간을 떠나기 위한 자립을 준비한다.

 

소설의 시점(視点)인 어린 아이 '셔기 베인'은 형제들의 떠남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성적 정체성을 지닌 연약한 아이는 어머니 애그니스에 삿갓조개처럼 찰싹 붙어산다. 망가져 가는 여인, 그녀를 성적으로 이용하려 만드는 추악한 남자들과 애그니스의 미모를 이용하여 술턱을 보려는 잡년들로부터, 알코올에 젖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으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기위해 어린 아이는 자신의 욕구와 분노를 참아내며 어머니와 함께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꾼다. 애그니스의 "넌 커서 어떤 남자가 될 거"냐는 물음에 셔기는 대답한다.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 걱정 좀 안 하고. (...) 모르겠어요. 난 그냥 엄마랑 있고 싶어요.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곳으로 엄마를 데려가고 싶어." -366

 


그럼에도 애그니스란 인물을 묘사하는 다음의 문장은 그녀가 얼마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온 몸으로 나타내고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린 다음날에도 그녀는 가장 좋은 모피 코트를 입고 세상을 마주했다. 자신과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도 머리에 힘을 주고 사람들이 달리 생각하게 했다." -372

 


어쩌면 세상의 관점을 지극히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타인 앞에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연출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야만 자의식이 버텨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희망이 결핍된 병색이 도는 동네의 여인네들에게는 그녀의 우아한 말과 차려입은 옷차림, 하이힐의 또깍 거리는 소리는 외설과 천박한 몸부림으로 비칠 뿐이다. 동네의 모든 인간들 역시 세상의 계층화, 서열화를 체화하고 이들 모자에게 혐오와 멸시의 폭력을 무시로 행사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닮은 애그니스, 그녀의 미모는 또 다른 남자의 시선을 끌고 여자는 알코올이 아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란 기대를 갖게 하지만, 택시 운전이라는 그나마 일자리를 붙들고 있는 운 좋은 사내는 "당신은 정상으로 보이거든.(409)"이라며, 인간을 범주화된 사고의 틀로 들이민다. 그의 세계는 이 차별이라는 분리 의식에서 한 치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사실 이 한 마디의 언어에서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는 것임을 예견케 했을 것이다.

 

음울한 실패자들의 외딴 동네인 핏헤드를 떠나 삶의 다양성이 반짝이는 도시로 이사한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물질이 있는 곳이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이 자기기만적 실행은 철저한 거짓 환영으로 드러난다. 셔기에게도 이 같은 희망은 물거품처럼, 엉겅퀴의 솜털처럼 날아가 버린다. 이사 가면 절대 마시지 않겠다던 약속을 애그니스는 당일부터 어기기 시작한다. 분노한 셔기의 실망의 소리에 애그니스는 셔기를 쫓아내기까지 한다. 형 릭의 작은 거처를 찾아들었을 때 그는 셔기에게 말한다. 너도 떠날 수 있다고. 네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 자신뿐이라고. 셔기는 반박한다. 엄마를 누가 보살피냐고, 엄마는 그럼 어떻게 낫겠냐고.


 

"이제껏 자신들이 '수건돌리기'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규칙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확신이 가슴에 와 박혔다." -555


 

엄마의 생명을 빼앗아갈 만큼 술은 강력한 것이었다는 셔기의 회한은 그와 같은 환경의 소녀 리앤의 깨달음의 언어가 되어 들려진다.

 


"내 생각엔 알코올중독자들이 원하는 게 결국 그것 같아. (....) 죽는 거 말야. 단지 어떤 사람들은 한참 멀리 돌아가는 것뿐이야." -536

 


사랑한다는 말을 유령에게 속삭이고 손가락으로 튕겨서 어머니에게 날려 보내는 소년의 몸짓, 셔기와 애그니스 모자를 끈끈이에 붙은 파리처럼 달라붙게 하고 무()로 둘러막았던 고달펐던 탄광촌의 삶조차도 어머니를 잃어버릴 일 없던 곳이었다고 회한에 애타게 하는 연민과 그리움은 읽는 이의 눈시울을 붉게 하지만 이러한 감상적 느낌에 마냥 빠져있기에는 이 세상이 뿜어내는 인간에 대한 적대적이고 탐욕스런 시선들이 더욱더 위협스럽게 여겨진다.

 

빈곤이 초래하는 비참은 이 빈곤과 떨어지지 못하게 연관된 도덕적 곤경과 폭력을 항시 수반한다. 이를 버텨내기 위한 여인의 분투는 스스로 붕괴되는 수순을 밟지만 그 애달픈 와해에 저항하기 위해, 어머니를 향한 한 소년의 애끓는 사랑의 노래가 전면에 흐르며 우리네 마음을 마냥 젖어들게 한다.

 

근심 없는 평화로운 마음을 지니는 것조차 그렇게도 힘겨운 우리들의 이웃이 있다. 약자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더 취약한 약자에게 보내는 비틀린 부도덕의 관점 또한 우리들을 슬프게 한다. 다름을 수용하지 못하는 세계, 꿈의 가능성을 기대치 못하게 좌절시키는 세계는 자신이 강요하여 만들어낸 희생자를 외면하는 무책임이요 책임 회피 아닌가? 애그니스와 그녀의 자식들, 셔기, , 캐서린과 같은 이 세계의 모든 자식들이 정말 희망에 부푼 삶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감히 꿈꾸어 본다. "빛나는 구두 축으로 빙그르" 도는 셔기 베인의 춤을 미소와 함께 그리며, 축복의 입맞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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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의 역사
마틴 반 크레벨드 지음, 김하현 옮김 / 현암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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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인간에게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완전하게 예측,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나 방법이 있다면 살아가는 것에 어떤 의미, 어떤 세상이 펼쳐 질 수 있을까? 우리들은 삶을 선택 과정의 연속이라 말하곤 한다. 그런데 미래를 남김없이 안다면 그저 예정된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미래를 미리 알고자 안달하지만 정작 알게 되었을 경우 목표도 희망도 성취도 어떠한 의욕도 쓸모 없어지게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세상을 예견 할 수 없다면 인간은 또한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기에 이 예측의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그것이 무수한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역사학자 '마틴 반 크레벨드'는 이처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예측하고 그에따라 행동하려는 것은 "생명 현상의 본질"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역사 내내 예측을 위해 사용된 방법들과 추론의 과정은 당대 인간들의 신념을 드러내 주리라는 것이며, 이 것은 곧 인간성의 본질을 들여다 보는 작업이라 주장한다. 인간의 예측 방식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간 동안 과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고대 샤먼에서 현대의 빅데이터를 기반으로하는 수학적 알고리즘에 의한 예측에 이르기까지 그 방식들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인간 능력의 본질을 추적한다. 이 역사적 탐사에서 어쩌면 우리들은 기존의 관점을 수정해야 하는 망설임의 지점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1. 변성 의식 상태를 요구하는 예측



'변성 의식'이라 함은 "중독, 희열, 가수 상태, 꿈"과 같이 정신 기능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 의식이 명확히 깨어있을 때의 일반적 기준을 현저히 벗어난 상태(28쪽)"를 일컫는다. 고대 사회의 예측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샤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했다. 평상시와 다른 의식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들 샤먼의 예측 능력, 마술적 힘을 지니게 된다고 믿었다. 이 샤먼이 21세기라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발생 초기부터 '어처구니없는 사기꾼, 위험한 악령을 불러들이는 악마, 어린아이의 정신적 산물'과 같이 샤먼에 대한 의구심은 항시 따라다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기이하고 불길한 꿍꿍이를 지닌 존재에 대해 불신을 보내며 이성적 판단을 요구한다.


『구약』에 무수히 등장하는 "신에게 영감을 받아 미리 이야기 하는 자" 로서  예언자(prophet)라 하여 샤먼과는 구분하지만 그 본래의 특성은 결코 샤먼이 하는 영(靈)의 교류와 다르지 않다. 에레미야, 이사야, 엘리야 등등 이들이 예언을 하려 할 때면 "아이고 배야! 아이고 가슴이야...(「에레미야」4:19)",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포도주에 잔뜩 취한 사람처럼 되었으니(23:9)"와 같이 변성 의식 상태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의 신탁을 내리는 피티아 또는 시빌라로 불리던 예언자 역시 섬망의 발생을 자극하는 가스를 흡입하고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불분명한 내용을 주절거렸으며, 이것을 신관들이 해석한 것이 소위 신탁이라는 것이었다. 꿈 또한 해몽가가 달라붙어 자신들의 꿈을 해석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욕망을 들어줬다. 아침에 깨어 꿈으로 뒤숭숭해하는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며 정치적, 군사적, 왕의 신변에 대한 미래를 예측하는 해몽가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죽은 자와 상담한다는 심령술사는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 더욱 번창했던 예언 행위의 일면을 보여준다.  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나 단테의『신곡』에 등장하는 죽은 자들은 한결같이 미래를 알고 있는 자들로 등장하여 예언적 말들을 들려준다. 오늘 현대 합리주의 이성을 지닌 우리들은 심령술에 의지하는 것을 나약함과 혼란의 징표라고 여기기도 한다. 더구나 1326년 교황 요한 22세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한 심령술사 처단이라는 강력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심령술사는 어디에나 있었다는 당대 역사의 증언처럼 중력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믿음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190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존 윌리엄 스트럿 레일리'는 심령연구협회장을 맡기도 했다니 입증 불가능한 영매에 대한 사람의 오묘한 마음에 대한 주소를 가늠케 한다. 이러한 영적 믿음에 대한 심리학적 규명을 떠나서 인간의 문화적 신념 그 자체로 이해 될 필요가 있다.



2.  합리적 예측의 형식을 지닌 것들



샤먼,구약의 예언자, 신탁 예언가 시빌라, 꿈 해몽가. 심령술사 등 이들은 한결같이 변성 의식 상태에 기초한 예측 행위들이다. 근대 사회 이전의 모든 예측이 이처럼 이성과 논리를 사용하지 않는 예측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세히 관찰하고 규칙을 만들어 적정한 추론에 의한 미래 예측을 하기도 했다. 점성술(astrology)은 그 대표적인 예측 방식이다.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그 주기적 질서를 인간의 삶과의 연관성을 통해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이 방식이 합리성을 취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황도대의 12궁과 인간의 네 가지 기질(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사이의 관련성(133쪽)"으로 인간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그 유사적 유추는 조잡해 보이기까지 한다. 한편 징조나 전조와 같이 일상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 새롭고 드문 현상의 목격은 인간에게 정신적 경각심을 야기하고, 이는 곧 명백한 미래의 현상을 암시하는 예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혜성의 다가옴이나 태양 흑점의 증가나 감소는 다가올 재앙으로 해석되거나 인 간 영혼에 대한 유리와 불리함으로 유추하곤 했다. 이에대해 '성 아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징조는 해로운 호기심과 마음을 괴롭히는 불안, 지독한 예속으로 가득 차있다. 

징조에 어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고 기록을 하기 때문에 

징조에 의미가 생긴 것이다."   -147쪽





이러한 믿음들의 역할이 사라지게 된 것은 과학 혁명이다.  혜성은 재앙이 아니라 단지 주기적인 운동일 뿐임을 증명한 '에드먼드 헬리'의 정확한 관측에 의한 과학적 예측의 정확성에 자리를 내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번개 또한 신의 징벌이 아니라 구름의 전기 방전 현상이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발견처럼 '세계의 탈주술화'에 밀려난 것이다.  기원전 고대 철학자인 플라톤 역시 점술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의 증거라고 힐난했음에도 주술 세계에서 벗어난 오늘에도 이들 전근대적 예측 방식은 여전히 그 믿음을 따르는 인간을 없애지 못했다. 왜 사람들은 이러한 비이성적 예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 이들 예측의 모호함에 의존한 자의적 해석이 주는 자기 위안적 예언의 가능성과 유치하기까지 한 유아적 유추가 주는 수월함이라는 무사유의 편리함이며, 과학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직접적인 강렬함의 인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바이블 코드(Bible code)'라는 성경의 문장을 낱개의 알파벳으로 열거한 후 그것을 종과 횡, 대각선으로, 혹은 한 자 건너 한 자를 읽으며 마치 예언적 문구가 있었다며 예수의 예지력을 말하는 것처럼 공허한 것에 대한 믿음도 여전히 횡행한다. 이 방법들은 "『성경』이외의 이 세상의 모든 책에도 적용 가능(193쪽)"하다. 개개의 인간마다 그들이 성장하고 활동하는 문화적 공간에 다소의 차이들이 존재한다. 이들 미래 예측 방식은 이러한 문화적 태도와 믿음이 결합되어 특정 개인들에게 주입된 문화의 영역에 좌우되곤 하는 듯하다. 이렇듯 터무니없는 헛소리이지만 바로 그것에 은닉된 인간 본성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기도 하다.



3. 현대적 예측 방식



현대적 예측 방식은 분명 다음과 같은 클리셰를 기초로 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미래는 과거의 앎을 양분으로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거나 주기적으로 순환한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과거의 관찰,  역사적 교훈을 발견하면 미래를 보다 근접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변하지 않는 속성들이 있다. 권력의 속성이나 이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은 누천년간 변하지 않은 것들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불변하지 않는 세계의 패턴을 주장하는 목소리지만 오늘 이러한 논리로는 아무런 예측도 내 놓을 수 없다.


이 역사적 패턴의 순환이나 반복이라는 생각은 오늘에도 건재한데, 특히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기의 주기 이론이다. 쿠즈네츠 사이클이나 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은 불황과 호황 설명의 주류로서 활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기라는 것은 본디 고저를 오르내리는 것이고 이들의 주기 년한이란 것이 항상 들어 맞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이들이 중요 변수로 사용하는 물질의 중요성은 이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여 실제 경제를 반영하지도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더 이상 무수한 자료들 중에서 어떤 자료(변수)가 유의미한 지를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지만 의미의 유효성과 무효성을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특정 변수를 이용하는 것은 예측의 정확성을 심하게 왜곡시키곤 한다. 저자 크레벨드는 인간 예측의 역사 이래 "지속적이고 확실한 하나의 '마스터 키'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213쪽)."고 단정하기까지 한다. 1965년 인텔의 창시자 중 한 명인 '고든 무어'는 집적 회로의 트랜지스터 수가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할 것이라 선언했으나 이 예측은 오늘에는 아무런 의미도 전해주지 못하는 무용한 예측이 되었다.  속도가 너무 빨라 관계들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세상이 되었다. 


드디어 오늘을 휩쓰는 예측의 기술인 변증법적 역사 방식에 기초한 '트렌드', 즉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적 변화의 개념을 반영한 예측 방식이다. 사실 오늘날 기업의 경영계획을 비롯한 국가의 예산 계획은 모두 이 트렌드에 외삽법을 가미한 예측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추세를 전제로 하여 이 연장선 위에 미래의 일정 시점에서의 상황을 예측하는 것이다. 세계의 위대한 석학들인 스티븐 핑거, 유발 하라리, 레이 커즈와일 등의 저술 상의 예언들은 이 방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방식 또한 우리의 인지 편향을 배제하지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트렌드(추이)란 여기에서 나올지 모르는 이익을 얻고자 하는 트렌드가 가세하여 스스로 가속화, 증가한다. 또한 외삽법 역시 주로 발전 중인 분야에 촛점을 맞추기에 이것은 예측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방향을 심화시키는 일종의 방향 제시가 될 우려를 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결코 자연 과학의 법칙을 따른 적이 없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항상 물이 되듯이 인간 세계는 불변의 동일한 상황을 낳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늘 자기 고유의 길을 걸어왔다. 즉 변증법적인  "더 높고 새로운 수준으로의 고양"을 향해 걸어왔다는 것이다. 급기야 현대인들은 강력한 예측 도구로서 통계학을 토대로 하는 모델, 그 알고리즘을 통한 예측에 나섰다. 이것은 점성술이나 역사 주기론과 같은 자의성이 개입된 단순 합리론도 아니며, 변성 의식 상태에 의존하는 영적 예측도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중대한 특이점이 있다. 이 모델 예측 방식은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예측은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집단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251쪽)"는 것이다. 보험업자는 특정 인간이 교통사고를 낸다고 예측하지 못하지만 나이, 성별, 년간 주행거리와 같은 범주에 따른 사고율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곤 막대한 수익을 얻는다. 이 통계적 확률 모델은 리스크 관리와 추정 이익 등을 예측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 모델 역시 수시로 중요 변수를 변화시켜 주어야 하며, 변수들의 배제와 포함 여부라는 선택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이들 또한 인간과 환경의 복잡다단한 요소들의 빈틈없는 반영의 산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한창인 선거 결과 예측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여론 조사 역시 통계적 모델 방식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표본집단 선택과 편향 배제를 위한 임의적인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며, 여론 조사 발표는 미래의 결과에 영향을 끼쳐 예측이라기 보다는 미래 결과의 강화를 조장하기도 한다. 더구나 언제나 말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동요는 반영할 수 도 없으며 반영되지도 않는다. 다분히 정치적 이익 집단에 의한 조작과 왜곡이 개입하는 근대 이전의 샤먼이나 점성가의 예측보다 나을 것이 없는 방식이라 할 수도 있다. 외형은 과학적 도구인 통계를 이용하지만 여타의 섬망이나 직관적 유추와 그리 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현대 과학의 엄청난 진보의 역량에 기대 막강한 컴퓨터 및 예측 장비 동원한 오늘의 기후 예측은 예전보다 조금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보는 별로 진전된 것이 없기도 하다. 다리가 쑤셔오니 비가 올 것 같다는 징후에 의한 예측이나 60% 비 올 확률의 예보가 무엇이 그리 다른가? 비는 오거나 오지 않는 것이다. 60% 비가 내린다는 이 애매모호한 예보는 항상 옳거나 틀린 예측이다. 사실 이 표현은 외형적으로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예측 가능한 미래' 라는 표현처럼 역량 부족을 눈가림 하는 언어처럼 꼴 사나운 말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책 288쪽 부분 발췌】 


4. 결 어


인간의 예측을 향한 관심은 모두에서 말했듯이 생명 현상의 본질이다. 이 책의 여정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아내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역사를 탐사하며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미친 인간의 헛소리이거나 터무니 없는 소리이고 음험하고 교활한 술책을 숨긴 조작된 말이지만 그것들은 당대의 나름대로 인간의 문화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과학화, 관료주의적 통제 방식이 휩쓰는 오늘날의 일관성, 규칙성, 신뢰성을 축으로 하는 과학적 예측이라 하여 그리 나을 것도 없다. 


아마 파우스트가 예측 불가능성을 토로하는 구절이 진실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내 가슴 속에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구나,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 무엇이 현실이 될 지 예측하는 것은 순전히 운 또는 기껏해야 직감이라 알려진 모호한 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294쪽;파우스트1-1112,)"  



정말 중요한 예측의 누락이 있다. 결코 예측에 반영하지도 할 수도 없는 것,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고려할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무엇인가 관찰하려는 시도가 그것의 변화를 일으키고, 아원자 수준에서 두 개를 동시에 측정 할 수 없다(295쪽)"는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불확정성의 원리나 복잡계의 카오스 이론처럼 인간에게는 완벽한 예측을 가능케 할 충분한 지적 능력 없음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어쩌면 인간의 '찬란한 예측 불가능성'이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기표가 기의에 정확히 일치하여 아무런 간극도 없이 정확히 일치하는 세계, 남김없이 명확한 미래의 예측이 가능하다면 과연 인간의 삶이 더 풍요로워질까? 냉혹하고 모든 것이 그저 의미없이 거닐어야 하는 무의미, 아마 무(無)의 공간이 되지 않을까? 인간의 예측 역사라는 지대를 탐사하며 예측이란 인간에게 삶의 고유한 향취를 더해주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 같다. 개인의 예측이 배제된 현대의 세련된 과학적 예측 방식은 호기심 가득한 인간 본성으로부터 결코  점 술과 샤먼(무당)의 예언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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