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사고의 전환 - 상상, 감정, 직관을 활용하는 건설적 사고
바바라 J. 세이어베이컨 지음, 김아영 옮김 / 글로벌콘텐츠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우리는 단 한 번도 보편적 기준을 가져 본 적이 없다.” - 87

 

 

옳다고 믿고 있는 것들, 다시 말해 도덕적 진리라 부르는 것에서부터 일상 속에서 행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올바름이라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자기 신념에 대해 어떤 보편적이고 이성적 기준에 의해 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인식 주체로서 본질, 또는 보편성이라는 것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전제와, 이를 논리적 추론이라는 이성을 통해 타당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구 유럽 사회의 뿌리 깊은 철학적 사유, 이성-논리에 입각한 비판적 사고는 편견 없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신념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서유럽 사상의 이러한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이 로댕(Rodin)<생각하는 사람>이다. 사회 공동체와는 무관하게 홀로 고독하게 독립된 개인의 논리적 추론, 관념적 사유 행위를 통해 진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과연 이 사유가 도달한 최종적 선택이 보편적 진실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일까?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이러한 지배적인 지식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전통적인 비판적 사고란 어떤 논증을 비판하고 정당성을 제시하고 무엇이 좋은 추론인지 혹은 옳은 답변인지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이성-논리 중심의 사고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이 주류 세계의 비판적 사고 모델은 각 개인을 인식론적 주체로 설명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영혼에 귀를 기울이면 알고 있는 것이 기억에서 나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근거 없는 환상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결코 올바른 앎, 보편적 진실이란 것은 독자적 개인의 관조, 논리적 추론이라는 도구만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지식이 우리 일상과 분리되어 그 자체로 별스럽게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바라 세이어-베이컨은 지식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서구 유럽의 재력 있는 백인 남성들이 만들어 낸 신화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 책은 바로 이렇듯 역사적으로 보편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잘못된 가정에 기반한 진리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진리에 대한 인식 방법들을 이성-논리라는 도구 뿐 아니라 직관, 감정, 상상 등을 병렬적으로 인식하는 건설적 사고로 전환키 위해 전통적인 비판적 사고가 지니는 우려 지점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하여 현대 실용주의 및 비판 철학, 젠더, 차이, 해체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여성주의 철학을 통해 독단적 인식 주체로부터 탈피하여, 목소리의 통합, 자아의 재발견, 개인적 지식과 전문적 지식의 통합을 시도하는 사회적 관계 내의 인간으로서 앎을 구축하는 건설적 사고 이론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여, 당신은 당신이 전혀 모르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입니까?”

- ‘메논의 역설’, 59

 

이 문장은 미덕이 무엇인가 고민하자는 소크라테스의 제안에 메논이 한 질문이다. 미덕이 무엇인지 자신은 모른다고 주장한 소크라테스의 선언에 대한 모순의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모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이 독단적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대화>편을 쓴 플라톤이 인간에게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믿음에 기초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즉 영혼불멸의 지식이 실재하기에 그 정보를 퍼 올리기만 하는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있다. 인식 주체가 타인과 관계를 지닌 사회적 존재임을 무시한 독자적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지식이란 인간 영혼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발상이다. 이것이 오늘의 비판적 사고의 뿌리이다.

 

아마 <대화>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소크라테스가 타인이 논리에 맞설 기회를 박탈한 채 진행하는 자기 논리의 선택만이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배타적 양자택일의 논리주의라는 이분법적 관점, 이와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라는 언어학적 논리 형식 또한 권위에 의존한 보편적 본질의 개인 내부 탐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인간을 다양한 관계 속에 있는 존재라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더구나 인간의 오류 가능성이나 한계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지식은 일상과 분리되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모든 사람들은 특정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 내재한다. 특정 방식으로만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특정 몸 안에 체화된, 실수 할 수 있으며 한계가 있는 존재들이다.”

- 벤하비브(Benhabib), 89

 

 

이것은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가 세계를 보아 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정말 그 대상의 실재인가라는 의문이다. 칸트,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실재를 알 수 없다고 하며 표상과 실재의 간극을 말하였다. 즉 칸트의 물자체나,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진실은 현상의 세계와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책의 저자인 세이어-베이컨 인간의 의식 밖에 분리되어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견해를 옹호하지 않는(334)” 실용주의자임을 선언한다.

 

관념과 사물, 의식과 현실, 주체와 객체 사이에 신뢰할만한 연관성이 없는 관념의 베일에 갇힌 완전한 주관주의를 지양(止揚)하고, 개념은 생동적 삶과 관련되어 상상 가능한 것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는 일련의 과정(94)”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써 현실의 관점에 의지하고, 인간 행동의 기능으로써 진리의 관점에 의지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측면 탓에 실용주의는 상대주의로 진리에 무심함이라 비난되곤 하지만, 퍼스, 제임스, 듀이로 대표되는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이를 반박한다.

 

진리란 실제 상황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관계일 뿐(104)”이라는 주장처럼 반박 불가능한 불변의 절대적 진리란 것은 존재치 않는다는 것이. 진리란 무엇이 우리를 이끄는 방법으로 적절하지, 무엇이 경험적 요구의 집합과 결합하여 어느 것도 빠지지 않는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되는지 개연성을 점검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절대주의의 관점은 오류 가능성과 과학적 우월성, 인식론적 주관주의와 같은 독단적이고 배타적이며 차별적인 것이라 비판한다. 아마 퍼스(Peirce)’의 데카르트 보편적 회의론 비판은 주관주의적 절대주의, 즉 비판적 사고에 대한 유효한 반박이 될 것이다. 회의적으로 여긴다는 것은 의심할 무엇인가를 상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선 믿음을 전제한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이미 믿음이 전제된 것을 회의하는 이 같은 모순의 관념론은 결국 자아와 세계에 대한 논의를 신에 의지하는 것, 혹은 불가지로 끝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건설적 사고의 추구라는 사회적 관계를 지닌 다양한 인간의 지식을 토대로 하는 지식은 진리라는 개념어 대신에 보증된 주장 가능성이라는 잠재성을 염두에 둔 용어를 주장한다. 특정 탐구에 대한 모든 특정 결론들이 지속적으로 재 논의되도록 함으로써, 그것이 연구의 대상이 되는 분야의 일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자기수정적 절차를 통해서야만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주장은 잠정적이며 수정 가능해야 할 것이고, 진리에 대한 모든 주장 또한 보증된 주장 가능성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현재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 진리인지 확인할 수 없다. 우리는 신의 시선으로 진리를 탐독할 수 없다. 진리를 확신할 수 있는 독단적인 인식적 행위 주체가 존재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109

 

나는 지식의 이러한 유동적이고 유연하며 적응이 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에 동의한다. 오늘의 비판적 사고란 학문적 공동체, 전문가로 구성된 교육받은 엘리트 공동체의 이성적 탐구만이 진실추구 담론 세계를 지배하는 배타성이 무수한 목소리들의 통합을 간과하여 상호 의존적 민주적 공동체의 의지를 반영치 못하는 인식형태를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오늘 한국 사회의 정치, 문화적 극한 갈등과 혐오는 다양한 관점들을 면밀히 검토하도록 장려하거나 자신의 논점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는 한국식 교육의 조잡함 때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무오류의 절대적 독단론이 판치는 아집의 인간들만이 양육되는 이 땅의 현실은 반성적 사고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랄 수 있다.

 

교육 철학자 이 지적하듯이 지적 겸손, 판단의 보류, 지적 용기와 선의, 성실성, 지적 인내. 자신감 신장(135)”은 반성적 사고를 위해 갖추어야 할 기질이자 덕목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며 보수적이고 비이성적이다. 따라서 반성적 사고라는 어려움을 느끼거나 당혹스럽거나 의심을 품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행동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지적한 시스템 2의 뇌를 작동시키는, 즉 노력이 요구되는 사유 작업을 많은 인간이 알지 못한다. 진리는 저절로 논리 구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사람들의 무수한 관점과 필요와 추구하는 맥락을 바탕으로 상황을 이해하려는 능동적인 노력으로부터 발견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비판 사고를 건설적 사고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는 이 책의 논지가 실용주의적, 제한적 상대주의적이며, 관계적 인식론, 감정과 배려, 직관이라는 다양한 사고의 도구를 말하는 것은 이성적 추론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결론을 도출하고자 하는 독립된 개인들에 초점을 맞춘 비판적 사고의 한계와 오류가능성을 직시하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사회 공동체에 의해 내재되고 체화된 사회적 존재임을 벗어날 수 없다.

 

건설적 사고 이론은 앎의 주체를 다양한 도구를 활용하여 지식을 구축하는 내재되고 체화된 사회적 존재로 상정한다. 우리의 지식은 사회적 교류와 이성은 물론 직관, 감정, 상상 등 다양한 앎의 도구를 통해 구축되는 것이다. 독립 주체의 주관적 지식, 이 배타적인 비판 사고는 너무도 많은 견해들을 배제시키고 소외시킨다. 정신의 우월성을 신봉하는 논리적 이성에 대한 독단적 믿음은 권위를 토대로 한다. 이것은 타자에게 강요하는 힘으로 발현되곤 한다. 여기에는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한 배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재되고 체화된 존재인 인간의 추론 능력에 의해서 보증된 것들이 전지전능한 진리라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권위에 의해 무언가를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잘못될 가능성이 치솟는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젠더와 차이, 해체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여성주의적 관점 또한 건설적 사고의 도구들인 직관, 감정, 상상, 배려 등의 지식 참여를 당위성을 입증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일례로 정신분석학자인 여성주의 언어철학자인 이리가레이(Iragaray. L.)’ 여성이 됨으로써 스스로 담론의 객체로 종속시키는 것, 남성은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이들 대상에 반동함으로써 남성 자신을 공고히 해왔다는주장이나, 리치(Rich. A.), 버틀러(Butler. J.), 해러웨이 등 젠더 해체주의자들의 남녀의 젠더 성향을 이성애로 규정하는 것을 의심하거나 비판하지 않음을 비판(238)”하는 것은 이 세계의 주류 담론이 주장하는 주체 개념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배제되고 타자화 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에 대한 방법적 주체의 요구라 할 수 있다.

 

사실 해러웨이의 젠더 해체를 위한 사이보그를 활용한 성별화 착시에 대한 비판은 실용주의적 현실에 입각할 때 저자의 옹호에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교육철학자 보르도(Bordo)’의 지적처럼 실제 우리의 현실적 사회에서 젠더는 특수성과 위상을 지닌 필요한 범주라 할 수 있다. 해러웨이의 포스트모던적 몸의 형상에 대한 책임 거부는 우리의 신체를 더 이상 몸으로 여기기 어렵게 한다. 경계의 완화를 강조하는 형상변형체관점은 분명 젠더의 위상을 불분명하게 하고 제한적이고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며, 인간의 역사를 통해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인격을 항상 모호하게 만든다.(245)”고 비판 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어딘가에 위치하고 제약을 받는 존재이지 않은가?

왜 성별의 축()만을 해체하려 드는가?(Bordo)’ 비판에 있어서 항상 선택적 입장을 취하는 여성주의 관점의 비판은 인종과 계급과 관련한 논의를 담론세계에서 지워버려 세계의 무수한 제약들을 배제시키려는 독단이자 폭력이라 의심받기도 한다. 만약 인간 경험의 극단적 변이들을 충분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관점만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거의 모든 사회 비판이 방법론적으로 부정하고, 관념을 왜곡한다는 점에서 혐의가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이것은 젠더를 해체하여 여성 혐오의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비판적 사고의 비판을 위해 다시금 차별의 폭력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인될 이유가 될 수 있다.

 

물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인종과 계급의 배제라는 차별을 지적한 로데(Lorde)기득권의 도구는 결코 기득권의 집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 그들은 결코 진정한 변화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는 주장도 있지만, 다르게 인식되는 우리 인간들의 표상에 대한 포용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우리가 기준 또는 지식이라 여기는 것들은 오류 가능성을 항시 내재하며 제한적이고 맥락의 영향을 믿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남성 중심의 이성-논리에 의한 전통적인 비판적 사고의 오류 가능성과 한계를 넘어 이것의 편향 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교육 심리학적, 여성주의적 비판 이론들을 넘나들며 자기성찰과 자기비판, 그리고 타인의 관념과 견해를 수용할 수 있는 건설적 사고의 구축을 위한 빼어난 관계적 인식론에 대한 제언인 이 저술은 이성뿐 아니라 상상, 감정, 직관, 배려 등 또한 지식 형성의 당위적 도구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갈수록 나만이 진리라고 하는 편협함에 기초한 혐오와 갈등의 세계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고루하며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관계 및 의사소통 기술, 직관과 감정에 전념하는 능력, 상상력의 발달과 추론 능력을 포괄하는 건설적 사고로 전환해야 할 터이다. 세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양식들과 공통점을 인식할 수 있는 주의력과 능력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교육체제도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획일적인 정답 맞추기식 교육에서 타자와 공감을 가능케 하는 상상력과 감성을 자극하는 인지 능력의 확장을 위한 교육처럼 사고방식의 형성, 즉 마음 습관을 형성하는 사고의 장()으로서 변화하는 것이다. 건설적 사고는 담론의 세계에서 소외된 인간들을 비롯해 진리의 도구에서 배제된 감정과 직관, 상상까지 확장한 반성적, 비판적 사고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단지 현학적인 사유 도구의 확장을 위한 이론의 장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지식의 인식 주체로서 요구되는 자질, 즉 내적 모순과 모호함에 대한 관대함과 타자에 대한 애정과 공감의 관심이라는 능력을 요구하는 실천적 사유의 제언이다. 타인을 수용하고 자신을 비판한다는 것은 아주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임에 분명하지만, 각자의 다름에 대한 이해와 그에 요구되는 시간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안정적인 자아의식을 형성하기 위해서 우린 끊임없이 타자와 교류,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퀼팅비(quilting bee)의 은유를 통해 공동체라는 관계적 인식론을 토대로 한 건설적 사고에 대한 이 위대한 저술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결단코 필요한 앎에 대한 방법론적 모델이 되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티 오이디푸스와 가족, 나는 아이가 아니다 가족특강 시리즈 3
신근영 지음 / 북튜브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은 오늘 한국사회의 가족주의가 지닌 문제를 성찰하는 <가족특강> 시리즈의 세 째 권이다. 영화 기생충을 토대로 핵가족의 오직 소비와 화폐의 욕망만 내재화한 가족 이기주의의 자기파멸적 구조와 실체를 보여준 고미숙의 기생충과 가족에 이은 두 번째 읽기이다. 사회 구성원인 개개인의 삶의 태도와 양식이 만들어지는 그 근원 장소가 바로 '가족'이기에, 특히 '엄마-아버지-아이'라는 구조로 이뤄진,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구성된 가족의 작동방식, 배치구조 등 그 성격을 탐사하는 것은 인간 개인과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근간이 된다.

 

미시적으로는 왜 오늘 한국 사람들은 사랑을 할 줄 모르는가, 왜 혼밥을 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곤혹스러워하는가, 더구나 "가족은 건드리지 마라, 다른 거 가지고 딴지 걸고 그러는 건 다 참지만, 가족은 안 된다."며 가족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선언하는가? 좀 거대 담론으로 나아가면 배타적 경쟁주의, 폐쇄적 이기주의에 의한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무 공감의 고착화, 나아가 자본주의의 무한 욕망이라는 불가능한 추구의 작동원에 가족주의가 놓여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라 할 것이다.

 

1. 오이디푸스 가족 너머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분열증 1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오늘의 가족이 왜, "욕망의 배치가 구성되고 펼쳐지는 장소"인지, 그리고 이 욕망이 바로 자본주의가 굴러가게 되는 힘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비극적 신화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인간의 억압된 무의식 세계를 설명하는 상징적 도구라 할 만큼 대중적인 소재이다. 이는 근친상간의 욕망을 포기해야만, 즉 자연 상태를 억압해서 극복해야만 비로소 문명인,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고, 결국 억압되고 포기된 근원적 욕망을 지닌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 프로이트가 본 무의식의 모습이다.

 

이것, 이 달성되지 못한 욕망을 우리는 결핍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신 안에 어떤 결핍을 필연적으로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이 결핍이란 것이 죽을 때까지 충족될 수 없는 것임은 포기된 욕망이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까닭이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모든 욕망의 출발지는 가족이고, 아이의 출발은 가족이다."라는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오이디푸스적 무의식은 가족적 경험으로 작동되는 것이라는 프로이트를 넘어 '안티(Anti;)-오이디푸스'의 삶을 상상한다. "욕망이란 가족 경험으로 환원, 축소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비가족적으로 작동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삶의 기본 층위가 무의식이자 욕망이라는 프로이트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엄마, 아빠를 엄마와 아빠로 본 적이 없다."라며 무의식이 문명인인 인간의 전유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욕망-기계'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관점이다. 무의식이 가족적 경험 이전의 것이 됨으로써 욕망이 억압과 결핍의 언어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된다. 가족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근원지라는 오명을 벗어나 그 폐쇄적 이기심의 자기 파멸성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욕망을 '자아의 욕망'이나 '나의 욕망'과 같은 전체로서의 욕망을 거부하고 '부분대상', 즉 입의 욕망, 코의 욕망, 눈의 욕망과 같이 다종다양한 흐름인 '애벌레 자아'인 욕망-기계들의 작동으로 본다.

 




이 욕망-기계들, , , , , 항문, ...은 저마다의 끊임없는 활동, 곧 나름의 '생산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눈은 빛과 짝짓고, 코는 공기와 짝지어 숨을 쉬며, 몸 안에 모든 것들은 다 뭔가와 짝짓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짝짓기를 못하는 순간 그것을 죽음이라 한다. 이 말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 아닌 다른 것과 짝짓기 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욕망-기계라는 것이다. 욕망이란 이처럼 '결핍의 갈망이 아니라 생산의 욕구'라는 것이다.

 

이 짝짓기, 생산의 과정이 곧 생명의 원리, 혹은 존재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부분대상들이 다 탈각되고 오직 성기로 집중된 오이디푸스적 발달 단계는 욕망을 거세 콤플렉스로 축소시켜 탐욕, 무한 소비의 욕망을 정당화시키지만, 이 결핍 충족을 향한 욕망이 아니라 부분대상인 욕망-기계들의 생산과정으로 파악하게 되면, 바깥, 타자를 통해서만 자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자아, 가족의 열림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내 가족, 내 핏줄, 빗장을 걸어 잠근 문 안의 가족은 이러한 생명원리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한 전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적 욕망을 가족적 경험으로 축소시켜 결핍에 시달리는 욕망으로 추락시킨 오이디푸스 가족, 바로 오늘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는 새로운 지향을 모색해야 할 당위성, 무한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타개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2. '소파 위의 편집증자'에서 '분열자의 산책'으로

 

단순화해서 표현하자면 신경증이나 편집증은 에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자아의 욕망이 비대해져 그 충족되지 않는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을 양산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분열증은 애초 자아, 에고가 없는 사람들이기에 발산되고 해체되기에 갇혀 거대해진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파 위의 편집증자란 저마다 짝짓기로 분주한 부분대상을 모두 탈각시키고 하나로 집중된 욕망의 탐닉자.

 

반면에 분열자란 부분 대상들, 욕망-기계들이 짝짓고 하나의 흐름에서 다른 흐름으로 마구 섞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 마치 자연을 산책하는, 나도 너도 없는 그저 온 몸으로 햇빛을 받고 바람을 받으며 자연과 인간의 구분을 잊은 채 우주의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그런 존재적 층위의 기분이다. 오로지 욕망-기계들의 생산, 짝짓기 과정만 있는, 여기에 그 어떤 결핍이 존재하겠는가? 그런데 이런 상태를 반복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이 바로 가족이란 것이다. 다른 욕망-기계들의 작동을 제지하고 오직 결핍만을 장착시키는 욕망은 그래서 끝없는 채움, 획득과 소유의 메커니즘에 속박되게 한다.

 

자본주의는 바로 여기에 기초한다. 존재적 결핍감을 느끼게 하는 체제, 결핍을 채우려고 쇼핑하고 노동하고 상품을 만들고 끊임없이 화폐를 축적하게 만드는 이 신경증적이고 편집증적인 에고의 장소, 결핍을 내부화시키는 장소가 바로 가족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처럼 "욕망을 가족 안에 가둬놓는 작업을 통해서만 활성화 된다." 사람들 모두 자신들은 탐욕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결핍된 존재라고 항변한다. "난 부족해, 난 없어, 그러니 가져야 해, 더 가져야 해", 더 깊은 결핍감으로 몰아넣는 자본의 기본적 속성은 소유를 갈망하게 한다. 관계의 독점, 배타적 관계는 그래서 오늘 한국 가족주의의 핵심이 된다.

 

관계에 대한 독점적 욕망, 인정 욕망, 이 소유의 욕망, 일종의 '저장 증후군적 욕망'에는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한국사회의 갈등을 야기하는 그 근원에는 이 무한한 욕망, 이기적 탐욕이 있다는 것이다. 폐쇄된 관계, 독점적이고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타자와 함께하는, 타자로부터 비롯되는 관계, 그 유대와 연대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자아, 가족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고작 작은 아이에서 큰 아이가 될 뿐인 이러한 미숙함과 결핍의 성장에서, 생산하는, 만물과 교접하는 분열자의 산책, 바로 그 길을 향해서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5-03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필리아 2022-05-03 14:10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부터 들뢰즈와 가타리는 표현적 무의식에 종속된 오늘의 사람들을 힐난하듯 ‘욕망적 생산‘으로 시작하죠. 아마 구별하려는 권력에 기초한 결핍의 욕망 너머의 진실을 봐! 라는 듯 회심에 찬 전복을 시작하는 것이죠. 아마 <안티 오이디푸스>는 항상 곁에 두고 우리들의 사고가 사회적 소음에 질식하려 할 때마다 꺼내 읽어야 하는 책일 거예요. 유쾌한 시간 되십시요~
 
무도회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1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날것의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불유쾌함, 마치 속내를 들킨 것 같은 혐오와 불안한 수용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삶의 그러함의 이야기들이란 느낌이다. 사람의 숨길 수 없는 본성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사실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타인들의 욕망, 혹은 내 것일 수도 있는 이것들을 보려는 유혹을 물리치는 것도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다. 아마 이 소설집은 이러한 측면에서 그 소임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네 꼭지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 이 선집은 유대계 우크라이나 출신의 프랑스 작가인 이렌 네미롭스키(1903.2.11~1942.8.17)’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스윗 프랑세즈: Suite Francaise에 앞서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전초전이 될 듯싶다. 표제작인 무도회는 그야말로 야생적 본능, 새로운 물질세계로 접어든 인간의 체 정비되지 않은 벌거숭이 욕망들의 충돌이 빚어내는 삶의 우발적이고 유희적인 모습의 적나라함일 것이다.

 

아마 수록된 네 작품에서 무도회는 단연 충동들의 격렬함이 도드라진다. 열네 살 사춘기에 들어 선 소녀 앙투아네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 소설은 당대의 내면화된 사회적 욕망이 인간들을 얼마나 거칠게 휩쓸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난한 은행 직원 캉프와 결혼한 로진에게 좁아터진 싸구려 주택에서의 삶은 희망 없는 자기 연민의 고통만을 불러온다. 이런 찌든 삶에 어느 날 갑자기 큰돈이 들어오며 억눌렸던 욕망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목욕할 때 빼고는 빼는 법이 없는 다이아몬드 팔찌를 번쩍거리며...” - 17

 

여자는 빈곤했던 과거를 지우고 상류 계층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부와 명예를 과시하고픈 욕망으로 가득 차있다. 타인의 욕망에 대한 이해가 들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여전히 전통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소시민의 의식에는 아이의 개성화를 위한 교육적 이해가 들어서지 못한다. 부모의 전통적 권위에 순응하지 못하는 앙투아네트는 로진의 욕망에 위협이 되는 존재에 불과하다. 두 욕망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성인들 세계에 대한 동경, 어린 여자아이의 성적 과시의 욕구는 엄마의 과시 욕구에 의해 거듭 좌절된다. 캉프와 로진 부부는 명망 있는 부자들과 귀족들을 초대하여 자신들이 상류 계층의 일원임을 승인받는 파티를 준비한다. 일면식도 없는 초대 손님들의 명단과 그 주소를 쓰는 장면은 이들의 속물근성과 천박한 욕망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다. 소설은 앙투아네트의 전혀 우발적 행동에 의해 야기된 파티 당일의 정경에 맞추어진다. 독자는 썩은 미소를 지을 준비가 되었기에 로진의 발작적인 증오심, 자기 연민의 훌쩍거림과 앙투아네트가 짓는 회심의 미소를 보며 인간 삶의 비속함을 다시금 확인케 된다.


 



초기작인 무도회와 달리 작가의 시선이 조금은 넓어진 1940년 작인 로즈 씨 이야기는 내게 인상적으로 남은 작품이다. 자신의 이해(利害)에 의해서만 세상을 보는 데 익숙했던 한 남자의 믿음과 그 전환적 사건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전통적인 여성적 삶의 행복에서 인생 전반으로 확장되어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시선이 확장된 듯하다. 더는 자기 연민, 욕망의 좌절을 보듬고 핥아대는 나르시시즘에 머물지 않는다.

 

주인공은 오늘의 전형적인 인간 상()과 닮아 있다.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부를 축적하고 보존하는 데 일념(一念)하는, 나이가 쉰이 넘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뺨에는 기름기가 흘렀고, 목소리는 날카롭고 권위적(89)”인 그런 남자이다. 젊은 시절 분위기에 이끌려 결혼을 약속했지만 자기 삶에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의 번잡함이 끼어드는 것이 두려워 도주하기까지 한 독신자, 전쟁을 예견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르웨이에 투자하고, 가장 안전할 것 같은 노르망디 지역으로 가치 있는 재산을 옮겨놓기까지 한다.

 

삶이란 우연의 연속이다. 전쟁은 노르웨이를 강타하고, 노르망디는 전쟁터가 된다. 평온함을 예견했던 노르망디의 삶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고 동쪽을 향한 피난길에 오르지만, 피난 행렬에 막힌 차량은 더디게 움직인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음식과 물을 구하기 위해 기사에게 차량을 맡기고 인가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다. 차량은 그 사이 기사와 함께 사라지고 도보 행렬에 섞인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경계로 살아 온 그에게 한 청년이 무람없이 다가와 말을 건다. 모르는 이와 결코 대화하는 법이 없던 남자는 키 크고 건장한 청년이 고된 피난길의 쓸모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상대를 맞이한다. 이기심에서 시작된 이 동행은 군에 입대하겠다는 열여덟 살 청년과의 대화에서 그의 인생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 청년은 피난길에서 약자들을 돕고, 먹을거리를 구해 나누어주기도 하며, 걷기 힘들어하는 그를 부축해 걷기도 한다. 그 와중에 청년은 손목시계를 잃어버린다.

 

저런, (...) 잘 난체하는 늙은 여자를 돕는답시고..., 자전거도 그렇게 도둑맞았겠군. 자네는 살아가면서 늘 도둑맞을거야.” “! 저만 그러지 않을 거예요.” -112

 

폭탄이 떨어질 때 청년은 남자를 감싸 안아 그를 보호한다. 청년은 커다란 부상을 입고 행군은 이어지지만 두 사람은 더는 걷지 못할 만큼의 상처로 주저앉는다. 늙은 남자와 청년은 루아르 강()에 비추는 햇빛을 바라보며 재산이나 목숨까지 초월하는 평온함과 무심함(114)”을 느낀다. 루아르 강을 건너던 한 차량 안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과 청년의 탑승을 제안하지만 자리는 남자를 태울 공간에 불과하다. 청년과 동승할 수 없는 탑승을 거절한다.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기다리는 건 죽음, 생의 끝이었다.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생이란 무엇일까? 생이란 정말 우연한 유희에 불과한 것인가?

 

삶을 꿰뚫는 인문학자 고미숙의 문장이 떠오른다. (1)‘생명 차원에서의 연대, 세상을 향해 나가도록 힘차게 응원해주는 관계, 길을 나서는 베이스캠프, 생명의 플랫폼으로 변환하는 길을 모색하라는 제안이었다. 손가락이 타인, 세상을 향할 때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늙은 남자 로즈가 변했을 때 세계는 그를 응원하는 구원이 되어 줄지도.


이 작품과 같은 시기에 발표된 다른 젊은 여자는 제목처럼 두 여자가 등장한다. 주제는 다르지만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라는 구조는 마치 로즈 씨 이야기의 쌍둥이 작품 같다. 촌구석의 물건도 별반 없는 가게를 찾은 열여섯 살 질베르트는 자신이 찾는 물건이 없음을 이내 알아차리지만 밖에는 눈이 내리고 그녀는 주인 마들렌의 제안으로 가게에 머무르며 대화를 이어간다. 무언가 회상하기에 딱 그만인 배경 속에서 마들렌은 1차 대전 중 겪었던 강렬한 기억을 술회한다.

 

폭격으로 부상당한 한 프랑스군을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숨겨주고 간호하며, 그의 생명 연장을 위해 매 순간 기도하던, 어떤 한 마디의 문장으로 표현 할 수 없는 애틋함의 기억이다.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보호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행위이다. 아마도 마들렌에게 그 나흘이란 짧은 순간은 그녀에게 천국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홀로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찰나의 시간이 한 인간에겐 영원한 삶을 의미했을 것이다. 질베르트가 이 얘기 속에서 느끼는 부드럽고 복잡한 자존감의 확인은 역시 어렴풋한 사랑의 불멸성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Irene Nemirovsky (1903.2~1942.8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가 아우슈비츠에서 비참하게 살해되던 해인 1942년에 쓰인 작품인 그날 밤 또한 삶의 선택에 직면한 그 순간, 영겁(永劫)같은 찰나에 마주하는 환희, 다른 젊은 여자의 마들렌의 술회와 그 궤를 같이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다만 작가가 다가 올 운명을 예견했던 것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에서 주인공 카미유에게 동생 알베르트가  외치는 마지막 문장이 예사롭지만은 않다.

 

언니가 가엾다고? ! 천만에! 가여운 건 언니가 아니야.” -141

 

물론 이 문장은 사랑하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어린 딸 니콜과 함께 외롭게 혼자 살며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여동생 알베르트의 집을 찾아 자신의 슬픈 처지의 한탄에 대한 반응이다. 카미유는 왜 난 너처럼 남자 없이, 홀로, 조용히 지내지 못했을까?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하지 알기나 하니?(125)” 라며 사랑은 끔찍한 거짓놀음에 불과함을 토로한다.

 

이때 동석한 알베르트의 친구인 블랑슈는 말한다. 모든 결혼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단지 삶이 끔찍한 것이라고. 그런데 또 다른 친구 마르셀이 말한다. 삶이란 우연이 아니라 본능의 문제라고. 우리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욕망하는 걸 얻게 되는 것일 뿐,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는 가장 큰 벌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은 돌고 돌아 처음의 소설 무도회의 주제로 다시 회귀한다. 비록 역겹고 혐오스러운 욕망일지언정 우린 그 욕망의 사랑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감히 우리가 삶의 진면목을 어찌 알 수 있으리




(1)인용출처: 고미숙 , 기생충과 가족, 북튜브 202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선택의 재검토 - 최상을 꿈꾸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 되었는가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전쟁은 부조리하다. 인간은 수 천 년 동안 서로를 없앰으로써 불화를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해왔다. (...) 그들은 부조리하되 익숙한 방식으로 부조리했다.”  - 147

 

 

무고한 사람들을 대량 살상하고 그들의 오랜 역량들인 축조물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전쟁을 도덕적으로 옳다고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사실 지극히 뻔하고 상투적인 의미 없는 말이기도 하다. 이 지구촌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그친 적이 있긴 하던가? 그럼에도 이 부조리한 전쟁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 세계의 현실이다. 아마 이 책은 이러한 관점, 즉 전쟁 억지의 방법적 논의가 아니라 당면한 전쟁 상황에서 어떻게 윤리적 책임을 달성할 수 있는가의 검토라 할 수 있다.

 

2부로 구성된 각 부의 제목이 유혹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낭만적 표현이긴 하지만 어쩌면 인간 행위의 부조리함을 더욱 명료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1의 경우 전쟁 기계, 핵심 목표물만 제거한다는 데 목적을 둔 폭격조준기의 나름 도덕적 이상을 지닌 살상과 파괴라는 기술적 추구가 현실과 얼마나 괴리된 공허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면, 2유혹에서는 인간의 창의성과 과학의 이단적 사용이라는 비극적 파괴에 내재된 윤리적 책임의 문제로부터 다분히 공리적 판단을 요구하는 선을 위한 악의 실현이라는 전쟁의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아마 결론은 모두(冒頭)에 인용한 문장처럼 익숙한 방식으로 부조리했다.’는 것이라고 간결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데 교활한 가를 새삼스레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겠는가?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바로 이 부조리함, 그 도덕적 정당화라는 인간의 고질적인 심리적 질병을 확인하고 윤리적 책임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식을 재검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폭격조준기

 

1 칼 노든이라는 천재 과학자와 미국 공군의 모태였던 항공단 전술학교일명 폭격기 마피아사람들의 도덕적 이상으로서 무고한 민간인 살상이라는 광범위한 무차별적 폭격을 지양하고 적의 핵심 군사 역량만을 파괴하는 폭격조준기라는 정밀 타격 장치로 시작된다.

이것은 목표물이 보여야 조준할 수 있는 기계이다. 당시 영국 공군(RAF)은 이러한 기계에 관심이 없었다. 적국인 독일의 공습에 있어서 런던 주재 미국 폭격기 사령관인 아이라 에이커와 영국 공군 사령관인 아서 해리스는 상반된 폭격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은 폭격조준기를 이용한 적국의 주요 군수산업 시설만의 정밀 타격을 위한 주간 비행을, 영국군은 적국의 사기를 꺾을 수 있다는 일종의 지역폭격인 야간 무차별 공습을 감행한다. 전쟁 수행에 대한 도덕적 논거를 발전시키던 미군은 독일의 항공 전략을 약화시킬 대상으로 슈바인푸르트에 위치한 볼베어링 공장을 주간 공습한다. 그러나 적의 대공포화를 피하기 위한 회피기동과 고도, 엄청난 속도로 인해 폭격조준기에 의존한 폭격은 실패를 거듭할 뿐 아니라 폭격기와 승무원의 피해만 폭증한다.

 

이 공중폭격에 맥스웰필드, 즉 폭격기 마피아 출신의 헤이우드 핸셀장군과 이와 이상을 교류한 바 없는 커티스 르메이장군의 전투 실행 방법은 군사적 책임과 도덕적 의무와의 미묘한 물음을 제기한다. 거듭된 실패에도 폭격조준기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던 핸셀과 달리 르메이는 적의 대공포를 피하기 위한 회피기동을 하지 않는, 즉 폭격수에게 폭격조준기의 조정 시간을 충분히 주기위한 7분간의 직선 고정비행을 감행한다. 폭격기 승무원의 생명을 담보로 한 무모한 실행이다.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2,000개의 폭탄 투하에 80개만 표적에 근접했다니, 이들의 도덕적 이상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콤 글래드웰은 인간의 케케묵은 자기 정당화 심리를 확인한다. 믿었던 게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지만 자신의 믿음에 부합되는(정당화하는) 인식만을 받아들이는 심리적 한계이다. 다시 말해 신념을 위해 희생한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실수라고 말하는 증거에 강하게 저항한다. 포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몰두(128)”한다는 것이다. 폭격조준기에 대한 그릇된 신화적 믿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끈질긴 자기 합리화의 무책임성과 영국군의 무차별 공습에 내재된 인명 경시의 도덕적 무감각 증상은 전쟁에 도사린 인간 심리와 윤리 의식의 민낯을 보여준다.

 

도쿄 야간 공습

 

2유혹5개 장()은 유럽의 전장에서 태평양 전쟁으로 옮겨와 일본 열도의 공습에 얽힌 인간 도덕성에 대한 오래된 딜레마를 검토한다. 이 어렵고 난해한 도덕적 질문은 유럽의 하늘에서 이미 대조적인 지휘관의 모습을 보였던 헤이우드 핸셀과 커티스 르메이를 다시금 소환한다. 당시 주력기인 B-17 폭격기의 항속 거리는 2,000킬로미터도 되지 못했다. 미국 본토와 일본 열도는 무려 6,400킬로미터이니 날아갈 수 있는 폭격기가 없었던 셈이다.

 

미국이 선택한 것은 일본군이 차지하고 있던 도쿄로부터 2,400킬로미터에 위치한 서태평양의 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티니언 3개 섬으로 이루어짐)를 점령하여 항공 활주로를 건설하고, 항속거리를 늘린 새로운 기종을 조속히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핸셀과 르메이는 각기 마리아나제도의 제20폭격기 사령관과 인도 콜카타의 제21폭격기 사령관을 맡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공히 일본 공격을 시도한다.

 

촉박하게 개발된 B-29, 일명 슈퍼포트리스는 당시 빈번한 고장과 과열로 인한 화재를 안은 불안한 기체였다는 것이다. 괌에서 출발한 5차례의 일본 출격을 한 핸셀의 공격은 실제 목표물을 거의 건드리지도 못했으며, 인도에서 일본으로 향한 르메이의 항로는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고봉을 넘어 중국의 청두를 경유하여 일본 규슈에 도달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콜카타에서 출격한 92대 중 규슈에 도착한 것은 47대였으며, 목표물을 본 것은 15, 표적 타격 폭탄은 단 한발이었다는 것이다. 정말 미친 짓이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말이다. 핸셀의 실패는 그들이 도쿄 상공에서 마주한 낯선 바람이었다. 그 때에는 제트기류(6킬로미터 상공에서 시작되어 상층부 대기 내에서 지구 전체를 도는 빠른 공기 흐름)’에 대해 어느 누구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 가질 수 있다신념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 169

 

폭격 조준기에 대한 믿음을 버리면 된다. 인간의 도덕 기준이란 것이 얼마나 탄력적이고 융통성 넘치는 것인가! 폭격조준기의 개발은 그야말로 살상과 파괴의 범위를 극소화하며 전쟁의 승기를 잡으려는 도덕성에 기초한 도덕적 진보의 표상이었다. 이것이 실패하자 무차별 폭격으로 이행한다. 화학회사가 개발한 필름의 자체 과열로 인한 화재에 착안한 일련의 똑똑이들(하버드, 예일대 교수들)이 네이팜(Napam)이라는 소이탄을 만들어낸다. 가연 범위가 약 65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오사카 중심부의 80퍼센트를 전소시켜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이다. 가히 이단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야만적 폭탄에 대한 합리화 과정이 이 미국인들에게 자리 잡는다.

 

도덕적이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바뀌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과 스스로의 원칙을 조화시키기 위해 옳다고 스스로 설득할 수 있는 언어와 개념을 찾아(187)”낸다는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과 과학이 지독하고 무차별한 살상과 파괴를 야기하는 소이탄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철학적이며 사상가에 가까운 도덕적 이상주의자인 헤이우드 핸셀은 이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폭격 명령을 회피하고 실행을 미룬다. 상부는 사령관을 커티스 르메이로 교체한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실행부터 하는 르메이는 결과론적으로 적임자였다. 날씨와 구름과 같은 기상 조건으로 폭격기의 발이 묶이는 것, 대공 포화를 회피하기 위한 높은 고도에서 하는 폭격의 불확실성을 피하며 적의 도시를 무참하게 파괴할 수 있는 공격 방법으로 그는 1.5킬로미터의 야간 저고도비행을 결정한다. 이 저고도 비행 명령을 들은 폭격기 승무원들 대부분은 자살 작전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무모한 작전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목적을 위해 인간 생명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고가 터 잡고 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없다. 인간이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 되면 도덕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르메이의 정당화 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을 가능한 빨리 끝내는 것이 지휘관의 책임이며, 고통을 야기하는 것은 전쟁의 기법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 기간이다. (...) 가차 없고 단호하고 파괴적인 것이 2년 동안 지속될 전쟁을 1년에 끝낸다면, 그게 가장 바람직한 결과가 아닌가?(204)”

이 말에 담긴 도덕 해석은 끔찍한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휘관의 책임이며, 이 최소화를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은 전쟁을 가능한 빨리 끝내는 것이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194539일 밤 네이팜을 실은 B-29폭격기 300대가 넘는 대규모 첫 공습이 시작된다. 수천 개의 밝은 녹색 단검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순간, 그리고 쾅!(209)”, 이 비현실적인 모습은 마치 신을 맞이하는 광란의 지옥도 같지 않은가?


 

138쪽 사진 부분 발췌



1945814일까지 67곳 도시의 무차별 파괴와 함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로 전쟁은 종료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이 광란의 막후에 어떠한 공식적인 계획도, 상관으로부터의 지시도 없었다는 것(222)”이다. 이렇게 중대한 윤리적, 정치적 결과를 초래하는 결정을 젊은 야전 사령관의 손에 맡겼다는 것은 사실 터무니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말콤의 탄식처럼 인간의 이었다는 폭격조준기가 상징하는 전쟁의 도덕성, 인간의 정체성은 어디로 사라졌다는 것인가?” 라는 물음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맺 음 말

 

도덕을 대가로 승리를 취하는 것,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파우스트의 거래를 할 만큼 인간은 타락했다는 것일까? 사실 이처럼 순진한 도덕적 이상주의의 낙심에 머물 수도 있다. 하필 이 도덕적 딜레마의 대상이 우리의 독립을 가져온 역사적 반성 없는 일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몰염치한 야만적 대상에 도덕적 연민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가라는 회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 책임을 겨냥했던 폭격기 마피아의 이상을 향했던, 인간 독창성의 산물이었던 폭격조준기가 가졌던 윤리적 믿음마저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며, 말콤의 지적처럼 양심과 의지를 적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련의 도덕적 문제(233)”를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전쟁기간의 단축을 위한 행위는 공리주의적 잣대로 선()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의도적으로 행하는 무고한 인간의 대량 살상과 참혹한 파괴를 수반하는 악()에 기초했을 경우에도 선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바로 인간의 도덕적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 세계는 전쟁을 그친 적이 없다. 오늘날의 군사기술은 1940년대의 그것과 비할 바 없이 고도로 정밀해졌다. 고고도 정밀 유도탄은 물론 놀랄 정도의 시계(視界)와 상관없이 목표물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정확성을 가진 항법장치를 탑재한 폭격기, 전투기가 즐비하다. 핵심 표적물만 타격할 수 있는 것이 현대 기술이다.

 

정밀해질수록 사용하고 싶은 유혹이 커진다고 한다. 이 땅에도 감히 선제 타격을 부르짖는 망나니가 설쳐대는 형국이다. 무고한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이 같은 도덕적 책임을 상실한 망언에 나는 모욕을 느끼고 수치스러움에 몸을 떤다. 전쟁 그 자체도 인간에 대한 모멸이지만 전쟁 수행 방식 또한 부조리 덩어리다. 전쟁은 불법성을 정당화하라는 유혹,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라는 유혹으로 인간을 도덕적 실험에 들게 한다. 과연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 회의적 물음만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네지릭
기 드보르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적 생산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타클의 거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 직접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진다. "

-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La Societe du Spectacle1 테제에서

강신주구경꾼 VS 주체오월의 봄 , 102쪽 재인용

 

마르크스의 자본론첫 문장을 강력하고 예리하게 벼려낸 이 패기만만한 '기 드보르(1931~1994)'의 현대 세계에 대한 표상 비판은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표적으로 한 세기의 명문장으로 회자되고 있다. 1952'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만들고 1972년 자진 해체할 때까지 주도했던, 세계를 대상으로 투쟁했던 20세기 유일의 저항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의 회고록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기 드보르의 일생은 세상과의 지속적인 불화, 아니 적대감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타당한 이유를 지니고서 말이다. 스펙타클이라는 온실 속에 갇혀 지내며 자신이 갇힌 줄 모르는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상처를 내 돌아보게 하려는 시도로 점철된 삶이었다하면 왜곡된 이해가 될까?


 



회고록의 제목 '파네지릭(Panegyrique)' "비판과 비난을 배제하지 않는 찬사"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듯하다. 설혹 비난이 가해질지언정 기 드보르는 관심조차 없겠지만, 그는 그야말로 솔직해 지는 것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동시대 사람들이 받아들인 가치를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17)" 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회고록은 여느 회고록과는 판이한 내용과 구성을 하고 있다. '페터 바이스'저항의 미학을 연상시킨다는 측면에서 기 드보르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글과 낙서, 지도와 포스터들, 그리고 사진들을 통해 최선을 다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모든 전략 비평의 본질은 정확히 행위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빌어, 섣부른 공상이나 몽상과 같은 비평으로는 본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음을 시사하며 자신이 경험한 인생이란 정확히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서술해나간다. 빈털터리 집안, 물려받을 유산은 없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아르투르 크라방과 로트레아몽을 존경하는 인물로 새기며, "부르주아들이 일하는 천박함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25)" 산 덕 분에 인생의 중요한 것을, 즉 부재와 결핍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길거리에서 자랐단 말이다!" -아리스토파네스 기사들

 

그리고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극단적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아주 매력적인 집단에 접근하게 됨으로써 "평범한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27)"이 사라지고 말았음을, 그러나 어떠한 후회도 없는 삶이었다고 술회한다. 이렇게 이끈 것은 현대사이지 세상이 부정적으로 규정한 사람들이 아님을 확인한다. 결국 "파괴는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노라."라는 외침처럼 기존의 사회, 사회가 앞으로 되겠다고 선언했던 모든 것에 대한 적대적 입장이 1989년 이 회고록이 집필되던 시기에도 여전함을 밝힌다.

 

그의 주저(主著)스펙타클의 사회1테제를 모두(冒頭)에 인용한 까닭은 그가 지향했던, 또한 그가 세계와 불화했던 이유를 상징하기위해 인용했다. 따라서 그가 세상을 그토록 잘 꿰뚫어 보던 "내 가난한 동지들을 생생히 기억하며 파리의 밤, 모두 함께 모여 있던 그 때를" 되뇔 때면 알지 못하는 한 존재에 대한 종()의 우애를 느끼게 된다.

 

 

그림 속 낙서의 내용은 무엇일까? 기 드보르의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154쪽 부분 발췌

 


한편 자신의 삶 전체에 의심할 여지없이 영향을 끼친 것이 일찍이 터득한 술 마시는 버릇이었음을, 글쓰기란 흔치않은 행위로 남아야 했기에 "최고의 글을 발견해내기까지 오랫동안 술을 마셔야 했기 때문(48)"이라고 능청스런 변명을 담백하게 쏟아내기도 한다. 또한 그가 사회적 약자들, - 직업, 기술, 학문적 결핍을 지닌 자들, 인종적 소외자들, 성적 약자들 등 - 경계 밖에 선 자들과 함께 위선 가득한 세계의 안녕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자로서 행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발견하게도 된다. 일례로 시인 '뮈세'를 경멸하며 그의 경솔하기 짝이 없는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는가/ 가슴이 까무잡잡한 안달루시아 여인을."이라 쓴 시에 "내가 어떻게 오는지 보세요.( Mira camo venggo yo)"라며 답한다. 아마도 바로 너희들 같은 추악한 위선자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않는가? 라는 혐오와 적대의 변이었을 것이다.

 

"전쟁을 지휘하면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과 좌절은 계산으로 따질 수 없는 정도다." - 80

 

유독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귀감으로 한 소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68혁명을 비롯한 크고 작은 봉기에서의 실패와 좌절에 대한 복기가 마음을 어지럽혔던 것 같다. 체포와 감금을 피해 상황 인터내셔널의 주역인 '라울 바네겜'의 오베르뉴 숲 깊숙한 집에서 머물던 풍경의 묘사에는 혁명 전선의 향수가 물씬 배어난다.

 

폭풍우 몰아치는 가운데 어디로 내려쳤는지 볼 수도 없는 번개 빛의 경이로운 순간을 '영원한 섬광'의 인상으로 기억한다. 자신들의 혁명에 대한 자부심의 찬사 아니었을까? 바람의 충격을 맨 앞에서 막아내는 나무들, 서로 의지하며 바람에 맞서는 나무들의 전경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동지들의 끈끈한 연대와 함께 기분 좋고 인상적인 고독의 나날을 형상화한다.

 

1972522일자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기 드보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도 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저자는 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반박할 수 없는 우두머리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서왔다....체제의 전복을 준비하는...(70)", 상황주의란 소비자본주의적 일상공간을 진정한 혁명적 실천의 장으로 만들어내려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표상과 관조의 세계에 매몰된 자본주의 물신세계가 빚어내는 항구적인 경제적 속박에서 휘청거리는 세계에 맞섰던 인간의 꾸밈없는 기록을 읽고 세월과 함께 변해가는 그의 사진들, 자료들을 읽다보면 왜 나는 행동하지 못하는가라는 느닷없는 자문을 하게 된다. 천천히 그의 관련 저서인 스펙타클의 사회를 떠올리며, 혹은 철학자 '강신주의 정치철학에서 발견하고 해석한 기 드보르를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면 훨씬 밀도 높은 감응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회고록은 1권과 2권으로 구성되어있다. 1권은 문자 그대로 서술로 된 회고록이며, 2권은 도상으로 된 증거 기록이라 할 수 있다. 3권도 있었으나 그가 불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4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참 고 1 '스펙타클'이란 문자 그대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볼거리, 쇼를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의 강력해진 자본주의는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사람들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마력, 혹은 마력을 가진 것이다. 이를테면 사막이 아니더라도 사막이라 믿을 수 있게만 한다면 물 없이 살아 갈 수 없다는 갈증을 만들어내 생수를 사도록 만드는 것이 곧 스펙타클이다. 출처: 강신주 구경꾼 VS 주체'정치철학 1' 102~151쪽 내용 중 변조작성

 

참 고 2 사진 속 낙서 내용 : "최후의 관료가 최후의 자본가의 창자로 목을 매 죽는 날에야 비로소 인류는 행복해 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