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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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Alexei Maximovich Peshkov)'는 필명 막심 고리끼(Maxim Gorky)'로 자신을 천명했다. 극한의 고통이란 뜻을 지닌 이름으로 생애 내내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했던 것은 열한 살부터 생계를 위한 벌이에 나서야 했던 자기 삶의 실체, 그 고단함을 투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편집 마부에 수록된 열편의 작품들은 1895~1896, 그의 나이 27~28세에 발표된 초기작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조금은 놀랍다.

 

겪어야 했던 세상살이의 고됨, 그 삶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한 걸음 떨어져 오히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성찰했다는 점이다. 소설들은 작가의 이러한 시선들의 다채로운 변주이다. 아니 어린 노동자로서의 시련으로부터 그를 각성케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고통과 고난을 자신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며, 자기 성찰을 토대로 한 내적 변화와 성장은 물론 노동자를 바로 그곳에 존재하게 하는 외부의 힘, 그 본질을 반성적으로 사유하였다는 점이다.

 

이 초기 작품들은 1901년 부패한 차르정권에 저항하여 일어난 노동자 파업과 학생 데모를 적극적으로 지지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체포 감금된 이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로의 전환을 이루는 초석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낭만주의, 즉 폐쇄되고 고집스런 단일 진리라는 절대주의의 독단에 반기를 들어 올린 감상주의적 관점이라는 비판이 가해지고 있지만, 돈과 권력을 위해 인간을 착취의 소용물로 여기는 정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어찌 낭만적 감성이라고 폄훼 할 수 있겠는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탐욕의 가치가 정당화되고 지배하는 세계의 본질을 꿰뚫고 삶의 내적 규범을 사유하는 것은 핍박받고 외면당하는 당대 인민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토대이며, 새롭게 쇄신되는 세계로 나가기 위한 앎의 작업이라 해야 할 것이다.

 

열편의 단편은 바로 당대 인간들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던 돈, 오만, 무지, 기만, 탐욕에 매몰된 인간의 삶을 쫓으며, 대체 인간에게 삶이란 무엇이며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되돌아보고 곱씹게 한다. 소설들은 비교적 단순한 서사로 매우 강렬한 주제를 던진다. 마부의 주인공 파벨 니콜라예비치는 빠듯한 월급쟁이 삶에 찌들어 욕망을 넘어서지 못하는 자기 능력에 고통스러워한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탔던 마부가 들려준 돈 많은 혈혈단신의 여 상인 카피톨리나 자메토바의 이야기는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는 죽어도 싸죠.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에요. ....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혼자서 말이죠. 급소만 한 번 때리면, 돈은 그 사람 것이 될 텐데요.(13쪽)”

 

그는 생각한다. 인간의 자기기만이란 얼마나 합리적인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이 우스꽝스런 문장은 곧바로 법은 자신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이는 곧 자신의 살해 결정은 옳은 일이 되어버린다파벨 자신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어떤 이상주의자가 아님을 알기에 실행 결단이 용이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 상인 자메토바의 집을 찾아가 무심히 살해하고는 그녀가 숨겨둔 엄청난 돈을 쓸어 담아 온다. 그는 동정도 두려움도 혐오감도 느끼지 않으며 태연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지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시간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났을 때 그는 자선가이자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유력한 시장 후보가 된다.

 

그는 자신의 내면, 양심을 둘러보지만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 이 물음이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내 안에 내적 규범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인간의 특성인 양심의 가책, 참회, 범죄자의 죄책감이 없는 자신에게 놀라는 것이다. 인간적 감정을 지니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고통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선()의 영혼인 듯한 마부가 그에게 들려준다. 자신의 주변에서 단지 비열함과 저속함, 어둠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진정어린 마음이 아니라 항상 어떤 의도를 갖고 일하는것은 아니냐고.

 

사실 파벨의 내적 규범 없는 삶이란 우리네의 삶과 그리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상 공허와 무관심의 편안함과 유익성 때문에 이렇게 산다. 그런데 이 작품은 돌연 파벨의 전복적인 선언으로 당황하게 한다. 시장 당선 파티석상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8년 전 노파의 살인범임을 밝히며,   내 안에 규범은 없고 나의 심장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곤 단호하게 사람들을 향해 당신 내면에 규범들을 정착시킬 것을, 무관심해지지 말 것을, 그것은 곧 인간 영혼의 죽음임을 당부하는 것이다. 정신적 도덕적 공허! ~, 이 텅빈 공간을 채운 =권력이 소외키고 있는 것들로 우리들의 시선을 자성하게 한다.

 

단편 환영마부의 속편 같은 소설이다. 이는 죄의 냄새 물씬 풍기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포마 미로노비치의 권력, 모든 이들이 그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의 이면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돈에 대한 탐욕과 타인에 대한 인식의 저열함을 대비하여 그 위선과 무지에 내재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삶을 비춘다.

 

인간-영혼: 당신에게 인사를 하지만 그건 두려움 때문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아무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포마: 이봐, 나도 다 알고 있어. 나도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사람들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들이 나를 심판 할 수는 없어... (53~55)

 

마부환영에 이은 3부작이라 할 ()은 그야말로 돈은 바로 힘이라는 믿음을 가진 안티프 니키티치라는 인물을 통해 삶이란 것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반복해서 성찰토록 한다. 도시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면 마지막 피 한방울 까지 능숙하게 짜내고,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할 탐욕의 화신이다.  과연 이러한 인물이 자기 성찰 능력이 있을까?

 

이 인물을 상징하는 산 위에 높게 솟아있는 성삼위일체 교회에 매달린 청동 종이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는 균열, 즉 비뚤어진 믿음의 파열이 닥쳐온다고 믿음이 철회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사회는 불굴의 투지, 꺾이지 않는 투쟁이라며 헛소리들을 진리처럼 떠들어대지만 인간의 자기 과신, 그 기만성은 죽음의 문턱에 도달하기까지 변화하는 것은 아마도 실현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간의 도덕성과 가치에 대한 일견 계몽적이기까지 한 이 작품들은 그 지향성만큼이나 쓸쓸하게 다가오기만 한다.

 




어쩌면 이렇듯 인간 군상을 지배하고 있는 공허와 물욕, 그리고 자기기만성이라는 현실의 우울함을 희석시키려고 하려는 듯, 작가는 사랑과 희생을 주제로 로맨스아름다움, 그리고 푸른 눈의 여인아쿨리나 할머니, 네 편의 소설을 쓰고 있다. 로맨스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 고리끼를 떠 올리게 한다. 집보다 길거리가 마음이 편했던 소년 야쉬카는 인쇄기에 발이 끼어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간다.

 

병실에는 죽음이 임박한 남자 환자가 옆에 누워 있고 그를 간병하는 여동생이 면회를 온다. 외톨이고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소년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다정하게 그의 상태를 물어봐주는 아가씨는 낯선 세계, 새로운 감정을 선사해준다. 옆 침대의 남자가 시체로 치워지기까지 아홉 날 동안 느꼈던 그의 영혼을 흥분시키는 달콤한 행복, 그러나 이후 소년은 아가씨를 보지 못한다. 그에게 다시 찾아온 삶이란 쓰디쓴 치욕과 절망의 연속 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좋은 거였던회상할 사랑의 기억이다. 미소, 다정한 언어, 달콤한 영혼의 행복...

 

아름다움은 고리끼를 낭만주의 작가로 부르게 하는 이유가 될 것 같다.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처럼  아름다움, 즉 미()는 매혹적이고 숭고하며 경이롭고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보아서 기분 좋은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또한 좋은 것이다. 고된 중노동에 시달리는 철도 노동자인 화자는 지인과 산책을 통해 이층집 테라스에 나타난 한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벽돌 담 아래 숨어 바라보게 된다. 아름다움에 매혹된 이들의 행위는 그들 머리 위에 재가 뿌려질 때 까지 반복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소유욕도 없다. 오직 로맨스의 소년 야쉬카가 느꼈던 영혼의 감미로움과 경외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삶을 지탱케 해주는 하나의 요소, 아름다움 그것을 작가는 독자에게 선물한다.

 

댓가 없는 희생, 아니 이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푸른 눈의 여인아쿨리나 할머니는 유빙(流氷)에 빠져 죽은 수로 안내인의 아내인 푸른 눈의 여자, 삶의 극한에 내몰린 두 아이의 엄마인 여자, 고통과 치욕을 떨치고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길거리 매춘에 나서야 하는 여인의 참혹한 희생을 지켜보는 한 경찰관의 시선이 있으며, 이 세계에서 가장 극단에 내몰린 부랑자들을 거두지만 그들로부터 조롱을 받음에도 어머니같은 사랑을 베푸는 존재를 그리고 있다. 사실 지나치게 단선적인 교훈적 이야기지만 고리끼는 그의 취약했던 어린 시절 그 어떤 세상의 돌봄도 받아보지 못했던 결핍을 매우기 위한 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대 러시아 사회를 휩쓸던 빈곤과 방치의 그 무관심과 결여에 대해서.

 

자신의 작품들 모두를 횡단하는 도덕적 언어와 인간의 숙명적인 시간을 말하는 철학적 에세이 같은 두 편의 단편 지난 해시간은 각기 다른 삶의 형태를 옛 전설에 담은 이르제길 노파가 들려주는 전설 속 인물들의 삶의 형태를 통해 집요하게 삶의 의미를 샅샅이 살피도록 이끈다. 지난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쇄신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게으름과 무지를 비난한다. 낡아빠진 사람들에게 왜 새로운 해가 필요하지?”, 의인화된 지난해가 내키지 않은 머묾의 명령을 받고 변하지 않는 인간들, 권태에게 하는 말이다.

 

똑딱 똑딱! 시간 속에 부동의 지점은 없다. 인간들이 임종의 고통 속에서 허덕일 때도 시간은 냉정히 차분하게 자신의 시간을 잴 것이다.” 생명을 줬다가 빼앗는 시간의 기계적인 창조활동 앞에 인간의 생이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면, 다시 말해 살 가치가 있는 삶의 인식을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의 물음이다. 시간은 삶의 공허와 권태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위업으로 가득 채워진 시간, 설렘과 열정을 촉구하는 삶의 예찬이자 사랑의 찬가일 것이다.

 

이 소설집의 각 작품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해결의 과제.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위대한 문호의 답변들일 것이다. 어쩌면 1세기 전의 러시아보다 오늘 우리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부두의 식당과 짐꾼, 온갖 잡역부의 생활로부터 자신만의 공부를 일궈낸 고리끼의 장편소설 나의 대학에는 대학교가 없다. 그의 대학은 삶의 실천에서 길어 낸 진정한 길거리에서의 배움이었다. 볼가강 부두 노동자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  그를 둘러싼 모든 존재자가 스승이었음이다. 공부가 추상에 갇히지 않고 구체적 삶의 현장에 있었다. 그의 작품과 인생 읽기는 내게 이제 비로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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