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거리는 바람소리를 안은 계절 탓인가? 어느 샌가 이만큼이나 삶의 시간이 지났구나하는, 마치 관성처럼 살아온 것만 같은 공허감이 제법 묵직하게 내 마음에 들어앉았다. 아마 이러한 심리적 반응이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와 함께 생의 근본적 통찰을 담은『禪의 황금시대』로 이끌었던 듯싶다.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는 인간 개체 마다 지닌 태어난 해와 월, 일, 시의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이루어진 팔자(八字), 즉 개별 삶의 좌표를 읽고 해독하여 ‘나’란 누구인지라는 토대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주도적 운영자로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의 자기모색의 길을 안내한다. 사주팔자하면 결정론 아닌가라는 의구심 탓에 외면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너그러움이 내 것이 되었던 모양이다. 내 앎의 편협성을 떨쳤다는 증거인 듯이 명리학이 지닌 우주론적 고매함이 발설하는 비전과 그 실용성이 비로소 시선에 들어 온 것이다.
『禪의 황금시대』는 이 같은 이해가 불러온 인간에 대한 이해의 자연스러운 욕구였을 것이다. 중국의 외교관이자 철학교수인 ‘존 C.H.우’의 저술을 소설가 ‘김연수’가 번역한 수려한 문체가 더욱 돋보이는 저작이다. 인간 정신의 경지와 선의 역사를 입문하는 데 맞춤이다.
이들 저작은 동일성의 반복을 멈추는 것, 그리고 자기의 관찰과 이를 통한 비움과 순환, 나아가 새로움으로의 지속적인 변화를 생의 에너지라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이러한 정신세계의 속물적이고 비즈니스 세계의 언어로 삶의 성취를 말하는 판본이 ‘조용인’의 『언리시;Unleash』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파악하여 새롭게 재정의’ 하는 방법론을 기술하고 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지워 버리고 다시 앎의 세계를 열어나가는 혹독한 노력 과정의 길잡이다.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읽고 감동의 리뷰를 남긴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고립된 삶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을 집요하게 모색하던 한 여성의 자기 탐색이자 그 구원자로 여겼던 분류학자의 생을 통찰하며, 자기만의 생의 길을 찾아내는 여정으로 여겨진다. 이제 중간쯤에 도달했다. “과학은 믿음을 싫어한다.”는 좌우명, 시련과 고난을 뚫고 고집스레 자기 길을 걸었던 낙천적 과학자의 자기기만과 단호함이 빚어내는 그 모순성에서 자라나는 악의 근원을 목격하고 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매혹을 뿌리칠 수 없다. 읽던 책을 뒤로 미루고 이 책에 꽂힌 시선을 거둬들이지 못했으니까.
캐나다 출신의 고전문학자이자 시인 ‘앤 카슨’은 내심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를 기대했던 작가다. 시(詩)이면서 평론 에세이고 소설인 이 독특한 작품 『빨강의 자서전』, 언어적 앎 이외에는 알지 못했던 그 분별과 오만한 무지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리는 인식 전환의 내밀하지만 힘찬 외침인 것 같다. 조바심이 일게 만드는, 지금 내 눈길을 기다리고 있다.
떠남과 회귀, 중견 작가 이승우의 소설 『이국에서』는 2018년 5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문예지 《AXT》에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 ‘친구가 되세요’라는 문구가 써진 작가의 사인본을 받고서는 새로운 관계를, 낯설더라도 그것이 삶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시장의 요구로 ‘보보민주공화국’이라는 낯선 이방의 나라로 떠나는 인물의 묘사로 시작된다. 내외부와 떠남이 키워드인 것 같다. 어떤 이야기, 아니 어떤 의식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지 책장을 더 넘겨야 할 듯하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은 대부분 지니고 있음에도 여전히 누락된 작품들이 남아있다. 「여름」이나 「전락」은 중복됨에도 불구하고 「단두대에 대한 성찰」 때문에 전집 한 권을 사야했다, ‘사형’이라는 국가 살인 행위에 대한 불합리한 논리, 비도덕성, 비실증성을 동원한 비판적 평론이다. 국가 자신이 내세우고 있는 ‘본보기’에 대한 믿음의 부재를 비롯한 인간 본성에 대한 냉엄한 성찰이다. 가장 견고해 보이는 자기신체권이라는 소유권 박탈의 권리를 국가가 지니는 것, 아마 꽤나 많은 논쟁지점이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회의와 비결정론적 믿음을 가진 내가 어떤 반응을 하게 될지 궁금한 저술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는 상당한 시간적 대가를 요구한다. 경험론은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무지에 관한 것이다. 즉 버리는 것에 대한 탐구라는 얘기이다.이 세계의 가치를 모두 밀어내고 그곳에 ‘논리’로 채우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그야말로 논리 자체다. 이 논리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운명을 말하고 결정짓는 것인지, 이번 만큼은 독하게 비집고 들어가 보려 한다. 과연 이 난해함의 비밀번호를 찾아낼지가 관건이다.
“모든 세계는 나의 세계이며, 나의 세계는 언어에 의해 묘사되는 세계이고, 언어의 묘사가 곧 사실의 반영이라고“ 시작하는 이 철학 사유는 명리학이 말하는 나는 곧 우주자연이라는 말과 흡사하다.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라는 말은 팔자가 뜻하는 그 개별적 실체의 총합이지 않을까? 아무튼 상식이라는 보편성의 그 엉터리를 던져버리고 새로운 인식 체계를 수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될 것 같다. 이 세계의 그 무수한 사유의 세계들로 들어가면 결국은 인간, 나의 의미란 무엇인가로 좁혀지고, 그런 의미 혹은 무의미에서 어떻게 삶의 목적을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만 같다. 이것이 아니라면 사실 왜 관심을 가지겠는가?
그런데 이 세계에 인간이 복병을 만들어냈다. AI(인공지능)가 그것이다. 이제 블로거, 유튜브 크리에이터는 메타버스의 세계로 이전하기 시작했으며, 가상세계는 실체의 공간과 그 현실적 체험을 옮겨놓고 있다. 『파르마코-AI』라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쓴 이 괴이한 책은 기억과 젠더, 언어와 윤리학을 교대로 대화를 이어가며 써내려가고 있다. 인공지능 언어모델 GPT-3가 쓴 글을 한 번 보자.
“우리 문화가 보이는 발전 중독증세는 연표를 제작하는 방식이자, 사회의 경제적 성장에 기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노예화와 발전하지 못한 민족들의 학살까지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포스트사이버펑크」를 말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의 급진적 변혁을 예상한 뉴에이지 사상에 이은 생각이다. 이 컴퓨터 생성 텍스트를 통해 인간 앎의 지평은 조금 깊고 넓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는 분명 변화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사실 두려움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미지 존재론의 철학자 ‘베르그손’을 읽는다. 『물질과 기억』, 인간은 외적 물리적 자극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되는 존재일 뿐인가? 인간은 심리생리학적으로 통합된 존재인가? 지금 4차 혁명을 주도하는 정보산업의 주체들은 동물기계론을 주장했던 데카르트식 물리환원주의를 외치고 있다. 정말 알아야 할 것도 많고, 후손들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우리들에게는 그 어느 시대보다 넘치는 듯하다. 아무튼 이 가을, 내 삶의 재설계를 위한 독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어떤 생각에 이르게 될지 두고 볼 일이지만, 과연 내가 비워내고 새로운 것을 담아낼 만큼 용기가 있을까?
P.S. - 아, 몇 권의 책을 빠뜨렸다. 문학사(文學史)상 가장 긴 자살 유서로 불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소설인『막간』은 불순하지만 호기심에서 집어 들었다. 또한 '움베르토 에코'의 『위대한 강연』도 꼭 무엇을 얻으려는 지적 욕심이라기 보다는 그의 초지일관하는 이분법적 사유, 강고한 서구 엘리트의 전형적 사유를 보려했을 뿐이다.
미와 추, 절대와 상대. 완전과 불완전, 진실과 거짓, 거인과 난쟁이..., 사실 애초부터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책을 읽으려 했으니 불순한 동기는 막간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마 이 삐딱한 동기 때문에 빠뜨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의식의 짓궂은 방해였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