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사윌 때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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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건 곡식이건 줄기까지 휩쓸고 갔구나.” -103

 

 

위 문장은 패망한 나라의 적나라한 실상의 은유다. 나당연합에 의해 멸망한 백제에는 당의 도독부가 설치되어 당()군이 지배하고 그에 아첨하는 배신의 무리까지 백성들을 수탈하여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참상의 묘사이다. 소설은 서기 671, 당이 백제를 지배한지 10년이 지났을 무렵, 고구려, 백제, 신라 삼한의 연합세력이 한반도로부터 당을 몰아내는 전쟁을 시작할 즈음의 어느 사흘의 이야기 속에서 멸망한 백제의 무사 오서물참을 통해 나라는 과연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체험케 한다.

 

무사 물참의 사흘에 걸친 나라 찾기의 물음에는 생존을 위해 떠돌아야 하는 민초들에 대한 가슴 아픈 연민과 유대, 자신들의 잇속을 위해 적에 기생하여 동족을 착취하고 배신하는 무리들에 대한 분노, 이런 현실 속에서 백제의 부흥, 혹은 백제를 살리는 길이 진정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헤쳐 나가는 패자들의 역사가 놓여있다. 660년 왕의 황음과 귀족들의 분탕질로 자멸하다시피 패망한 후 백성들은 백제 부흥을 도모한다. 백성은 뒤로 한 채 제일 먼저 왜로 도주한 왕족과 귀족들, 남아 있던 장군들과 승려, 민초들은 왕이 항복한 상태에서 부흥전쟁을 3년 남짓 끌어가지만 이 또한 왜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중심으로 한 간신배들의 이간질과 망상적 욕심으로 자멸의 길을 걷고 만다.

 

백제의 땅은 당의 군대와 당이 설치한 도독부에 봉사하는 백제인들에 의해 백성들은 처참한 수탈의 지경에 내몰린다. 백성은 당으로, 신라로, 고구려로, 왜로 그 이해에 따라 분열되어 같은 족속들끼리 싸움을 이어간다. 나라 잃은 백성, 어지럽고 어리석은 주인 노릇 못하는 족속의 꼴이 지면을 가득 채운다. 자신과 이해관계가 다른 이들에 대해 무참한 적대와 폭력을 자행하는 썩은 냄새 가득한 권력의 모습은 바로 오늘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혼돈과 폭력이 난무하는 혼란의 시대, 권력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금당을 짓기 위해 백성을 쥐어짜 재물을 모으고 노동력을 착취한다. 국민의 혈세를 왜 금당 짓는데 쓰노? 가난한 중생 지옥 보내고,.... 극락 가려구?(104)”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어째 지금 하는 작태와 이리도 같을꼬. 한 나라의 붕괴는 항시 이러한 부패와 어리석음의 틈새를 파고든다. 이미 작금의 한국 사회에 대한 해외의 시선도 급속히 냉담하게 바뀌고 있다. 썩은 개들의 나라가 되고 있으니 저 나라는 아마 조만간 수십 년 전의 반()민주화된 후진적 사회로 퇴행할 것이라고.

 

외적과 싸우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에도 제 욕심에 눈 먼 황충(蝗蟲)이들은 싸움과 분열을 일삼는다. 당으로 피신했던 왕족과 귀족의 일행들은 당의 신하가 되어 자신들의 백성이 신음하는 백제 땅에 도독부 관리로 부임한다. 왜구와 도둑들의 만연, 도독부의 수탈, 강간과 폭력, 살인이 넘실대는 지옥의 땅이 펼쳐진다. 당의 관리가 되어 나타난 물참의 이복 형, 친구 천득은 당 황제의 신하됨을 역설한다. 나라 없는 백성, 이제 어제의 연합군이었던 신라와 당이 싸우고, 어제의 적이었던 고구려 유민과 신라가 연합한다. 백제의 땅에서 벌어지는 싸움인데 백제는 오간데 없다.

 

이렇듯 소설 속 무사 물참의 고초와 고뇌를 따라가다 보면 무능력한 권력이 빚어내는 수치는 오로지 백성의 몫이라는 것이다. 유독 잊고 싶지 않은 소설 속 문장이 있다. 물참의 스승이 건네는 말이다. 약하고 작더라도 숨탄것들을 알뜰히 보살피는 마음, 그 마음을 잃지 말아라. 잊었느냐?...지금 세상에 메뚜기가 얼마나 많으냐? (77)” 힘없는 민초들의 삶을 우선으로 돌보라는 말, 그런데 세상에는 그 약자들의 알곡과 줄기까지 훑어가려는 인간들이 득시글대니 경계를 잃지 말라는 주문이다.

 

세상은 끝지는 게 아니라 변한다. 변치 않는 건 없다.” -77

 

외세를 끌어들여 삼한의 동족을 패망시켰던 어제의 신라는, 그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다시금 삼한(고구려,백제,신라)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영구하리라 여겼던 당의 지배를 떨쳐내는 데 2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신음하는 백성의 삶은 무참함 이외의 말은 소용에 닿지 않는다. 물참은 빈번히 당하는 수치를 씻고 평화를 얻기 위한 싸움, 삼한의 얼이 통하고 넋이 위로받는 세상을 위해 어제의 적인 신라와 함께 침입군인 외세, 당을 향해 돌진한다.

 

지금의 세계 역시 어제와 오늘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주변 나라들의 자국 중심의 경제와 안보 정책은 그 어느 때보다 서로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외교적 무능력을 보이고, 국민을 분열, 이간질시키는 권력의 작금의 행태는 우리가 얼마나 역사에 대해 배우는 것이 없는 족속인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반복, 그러나 차이있는 반복으로서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깨달아야 할 때이다. 어쩌면 1,500년 전 이 땅에서 살다간 우리 선조들의 시린 삶을 지펴낸 이 역사소설은 백성이 주인 노릇을 잃을 때 발생하는 하나의 고통, 그 지독한 고초를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수치와 모멸, 죽지 못해 살아가는 억압과 폭력의 삶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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