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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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에는 소설의 내용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참고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좋습니다정 그러시다면.... 들어보겠습니다삼십 분 드리겠습니다.” -드라마,13

 

이 작은 체호프의 소설선집 표제작을 단편 드라마로 배치한 것은 아마 체호프의 작품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니기에 맞춤인 까닭일 것이다. 누군가가 상대의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에게만 열중하여 그칠 줄 모르는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 급작스럽게 몰려오는 참을 수 없는 지루함과 의미 없음이 격렬함으로 딱하고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경우가 있다. 대개는 그저 마음속으로 짜증을 삭이지만 말이다.

 

주인공 파벨 바실리비치는 유명한 작가인 듯하다. 그에게 한 여인이 자신이 쓴 희곡을 들고 와 읽고 작품을 검증해 주기를 부탁한다. 내키지 않지만 간절한 부탁에 두툼한 노트를 받아들고 한 번 읽어보겠다고 하지만 여인은 바로 지금 자신이 낭독할 테니 듣고 판단해 줄 것을 다시금 요청한다. 영감도 없고 이해할 수 도 없으며 하품만 연신 나오는 하찮은 이야기들이 그칠 줄 모르고 낭독되고 있다.  오 맙소사! 십분만 더 이 고통이 계속된다면 비명을 지르게 될거야....., 참을 수 없구나!(16)”  파벨은 가슴속으로부터 치솟는 비명을 지르며 묵직한 문진을 집어들고....,  배심원들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냉소적이고 지극히 간결한 이 마지막 문장으로 이야기는 종료된다. 입이 절로 씰룩거리게 하는 공감의 웃음이 터져 나오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수록된 여섯 편 중 예외적으로 긴 단편작인 베짱이는 자기 욕망의 이상을 늘 새롭고, 지적 허영의 무리에서 찾으려 하는 올가 이브노브나라는 여인이 삶에서 진정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부한 소재로 이끌어감에도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속도감, 상황의 짧은 순간의 스치듯 변화하는 표정과 언어로 강렬하게 담아내고 있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올가의 남편 오시프 드이모프는 의사이자 9등 문관으로 보잘것 없는 수입을 버는, 그러나 성실한 인물로서 주변에 재능있고 점잖은 지인들이 있는 사람이다.

 

반면 올가는 문학, 미술, 음악 등의 나름 저명한 인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며, 이 모든 예술 방면에 자신이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하지만 정작 어느 것에도 재능을 지니지 못한 낭만적 허영으로 그득한 여인이다. 드이모프는 이러한 아내의 분주한 활동과 소비를 지원하기 위해 생계 벌이와 학문적 열정을 묵묵히 수행한다. 올가는 여러 사교 활동 중 금발의 미남 청년 화가인 랴보프스키와 불륜을 맺으며 남편을 자신의 자유로운 연애 활동의 수단이자, 평온한 배경으로 활용할 뿐이다. 여자는 허영의 모임에서 으스대듯 말하곤 한다 그 남자(남편)는 자신의 관용으로 나를 억압하고 있어!”라고.  랴보브스키와의 지속되는 불륜에 대한 자기 양심의 목소리를 남편의 억압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사실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민음북클럽 에디션; 안톤 체호프 단편선


어느 날 드이모프는 아내 올가에게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었음을, 병리학 강의를 맡게 될 수도 있음을 자랑스레 말하지만 올가는 랴보브스키와 만날 상상에 빠져 건성으로,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아내의 불륜, 올가의 기만을 인식하기 시작하지만 그는 디프테리아에 전염되어 눕고 만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드이모프의 친구 코로스텔료프는 올가를 향해 혼자 말이듯 중얼거린다. 이렇게 무모한 인간들은 정말이지 재판을 받아야 해.(76)”  그가 왜 전염되었는지 올가에게 알고 싶은지 묻는다. 아내의 허영을 위해 쉴 새 없이 벌이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선량하기만 하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고통 받고 누워있는 친구로 인한 분노이다.

 

남편이야말로 올가가 선망하는 고귀한 지성인인  선하고 순수한 사랑을 담은 영혼, 불을 밝히고 뒤져봐도 못 찾아낼 대단한 학자(81,82)”였음을 올가는 코스텔료프를 통해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뒤늦게 남편의 비범함과 위대함을 깨닫고 누워있는 병실로 달려가지만 그는 이미 시신이 되어있다. 기회는 사라지고 없다. 사실 시사하는 주제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갖지 못한 저 먼 곳에 손을 뻗지만, 소중한 것은 늘 자기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들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곤 항상 뒤늦은 후회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선집 제일 끝에 배치된 내기는 이 같은 인간적 한계에 도사린 어리석음이라는 눈 먼 욕망과 그에 대한 혐오, 이것, 즉 삶의 의미의 무상성, 공허함에 대한 극단의 얘기일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범죄자의 사형과 종신형에 대한 윤리적 논쟁에서 비롯된다. 모임의 주최자인 부자 은행가는 말한다. 사형은 단 숨에 죽이지만 종신형은 서서히 죽이기에 사형이 더 인간적인 처벌이라 주장한다.  반면에 한 변호사는 둘 다 비윤리적이라고 반박한다. 생명의 박탈이라는 권리는 국가가 되었던 그 무엇이 되었건 인간생명을 죽일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흥분한 은행가는 변호사에게 즉석에서 내기를 건다. 만일 15년간 갇혀 지낸다면 당신에게 200만 루블의 거금을 주겠다고.

 

내기에 합의한 변호사는 은행가의 집 정원에 지어진 작은 장소에 엄중한 감시와 함께 감금된다. 변호사는 첫 해에 가벼운 소설책들을 요구한다. 둘 째 해는 고전 서적들을, 오년 째에는 술을, 육년 반이 되었을 때에는 외국어와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십 년 째는 복음서만을, 그리곤 종교사와 신학 서적들을, 마지막 이년 동안은 자연과학, 의학, 화학 등 엄청난 책들을 읽는다. 은행가는 세월이 감에 따라 여러 투자에 실패하고 재정 상태가 악화되어, 변호사가 15년을 모두 채워 200만 루블 지급 의무를 지게 될 것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이윽고 약속된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오자 그를 몰래 죽여 부담을 영원히 소멸시키기로 다짐한다.

 

이윽고 살해하기 위해 감금된 자가 있는 곳에 잠입하기 위해 상황을 살핀다. 수인(囚人;변호사)은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다. 그러나 그 몰골은 더부룩한 수염을 달아놓은 해골, 살가죽을 입혀 놓은 노인처럼 쇠락한 인간이다. 가볍게 죽일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들어갔을 때 책상 위에 뭔가 빼곡하게 써진 종이를 발견한다. 15년에 걸친 왕성한 독서가 수인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사고 능력으로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해 낸 모든 것들이 그의 두개골 속에서 작은 언덕으로 쌓였을(127)” , 그것은 그 모두가 시시하고 무상하며 신기루처럼 공허하고 기만적인 것일 뿐이라는 깨달음이다.  이 세상의 모든 행복과 지혜를 경멸한다!”,  책 속에서 지상의 축복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경멸하게 된 것이고,  꿈꾸듯 갈망하던 약속된 200만 루블이 하찮아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권리를 박탈하기 위해 약속 기한이 도래하기 전에 스스로 나갈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살해하려 잠입한 은행가가 읽은 것은 그의 물욕과 삶의 방식에 대한 혐오와 자괴감에 대한 거울이었음이다.  그는 잠든 수인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그냥 돌아선다. 1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재화에 대한 욕망을 갈구했던 인간이나, 자기 재화를 위해 타인을 죽일 결심을 하는 인간에 대한 이 강렬한 우화는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허무함과 함께 어떤 우주적 부조리함의 심연을 거닌 느낌을 선사한다 체호프의 소설은 간명하고 기지가 빛나는 촌철살인의 삶에 대한 해명이 번뜩인다. 이야기는 재미있고, 주제는 깔끔하고 선명하다.  어쩌면 그의 모든 작품들은 작가이자 개업 의사로 생계를 위한 분주함을 떨쳐내지 못했던 자기 연민이 승화되어 빚어진 위대한 생의 철학적 산물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단편거울의 주인공 넬리가 바라보는 꿈 속 거울에 반영되는 비(非)실존적 풍경들, 잿빛 풍경 속에 전개되는 인간사란 단지 죽음에 대한 어리석고 불필요한 서문(序文),96쪽"에 불과한 것, 그것인지도.

 

문학이라는 벌 통 속엔 제가 짜낸 꿀 한 방울도 들어있지요....” - 드라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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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5-27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에디션 선택했어요. 민음사에서 나온 체호프가 있어서요.^^
마지막 문장 위트있네요^^

필리아 2022-05-27 18:47   좋아요 1 | URL
저는 + ‘조지 엘리엇‘하고, ‘그림 형제‘를 선택했어요. 작가를 대표할 만한 엑기스를 잘 모은것 같아요. 항상 따뜻한 댓글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즐겁고 유쾌한 주말 보내세요 :)
 
제멜바이스 / Y 교수와의 인터뷰 제안들 13
루이페르디낭 셀린 지음, 김예령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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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독특한 이력 못지않게 소설 제멜바이스는 본명 루이페르디낭 데투슈(Louis-Ferdinand Destouches, 1894~1961)’, 필명 셀린1924년 의학 박사학위 논문이다. 그런데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필리프 솔레르스(Philippe Sollers; 1936~ )’셀린의 탄생이라는 글에서 서사시풍의 문체로 작성된 이 희한한 논문이라 표현하였듯이 엄중한 학위 심사를 위한 의학논문이라 보기에는 여간 수상쩍은 것이 아니다.

 

또한 셀린은 1936년 재판본 서문을 시작하며 이것은 제멜바이스의 삶에 관한 참혹한 전기이다.(29)”라고 선언한다. 어쨌든 이 글은 희한한 학위 논문이며, 참혹한 전기이자 서사시이기도 하다. 사실 장르를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이 논문을 그저 실화소설로 읽으련다. 그래서 작품이라는 예술에 붙이는 명사로 호칭하기로 한다.

 

이 작품은 인습과 위선, 태만한 이성이 인간의 상식으로 굳어진 상상의 고집이 되어 얼마나 집요하게 진실을 외면하며, 맹목적 어리석음과 폭력성을 동반하는지 감염 예방의학의 선구를 연 헝가리 출신의 의사 필리프 이그나즈 제멜바이스의 일대기를 통해 그 멍청하고 심술궂기까지 한 인간들과 그 사회를 냉소적이고 강렬한 문장들로 쏟아 놓는다.

 

비단 이 책은 외롭게 고군분투하다 가장 낮은 죽음으로 허물어진 한 의사와 의학계만의 실상을 더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참화가 계속됨에도 한 치의 진전도 없는, 그러나 끈덕지게 계속되고 있는 인간 정신의 절대적 게으름에 대한 신랄한 비평이다. 상식이라는 전통에 얽매여 정신의 감미로운 무력함과 행복한 지각의 감옥(133)”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대체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광인이 시작되는 곳에서 인간은 끝난다.” -139

 

제멜바이스의 박사학위 논문 또한 작가 셀린의 그것처럼 음악적 영감과 가치를 띤 식물들의 삶이라는 시적 열정 넘치는 독특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심사 주재교수이던 스코다는 애제자를 위해 “‘의약과 감정이라는 미묘한 주제에 대해 치밀한 논증을 하라고 요청(65)”했을 뿐 1844년 봄, 심사 당일 의학박사 학위를 승인했다. 이후 그는 병리해부학 교수인 카를 폰 로키탄스키(1804~1878)’와 진단학에 공로를 세운 체코출신의 의학교수 조셉 스코다(1805~1881)’의 옹호 하에 의사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외과의들의 지적 태만과 허영심에 대해 제멜스키의 회의(懷疑)가 보여주는 다음의 문장은 그네들이 얼마나 의료적 진정성에 무심했는지의 일례라 할 수 있다. 아니 인간 사회 전반의 실상이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감염을 둘러싸고 외과의들은 “‘아주 걸쭉한 농포’, ‘양질의 농포’.... 따위의 표현을 사용하는 재주 자랑 놀이에 빠져, 단지 거창한 말을 입은 숙명주의요, 무력감의 반향일 따름이었다. (...) 하나같이 진정성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69)”고 말하는 것이다.

 

환자가 왜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인지 원인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수술만 계속하며 의학 용어만을 주절거리는 그 허위의 정신들에 혐오감만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반응은 곧 진실이라는 빛의 길로 들어섰음을 작가는 읽어낸다. 18461월 마침내 제멜바이스는 스코다의 추천에 의해 산부인과 교수가 되어 조정(朝廷)에 강력한 끈을 가지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탐욕과 권위를 유지하던 클린이라는 인물의 조교수로 배치된다.


 



자만심만 가득하고 수하 조교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무능한 권위주의자인 클린은 제멜바이스에게 온갖 종류의 질투와 집결된 어리석음으로 위험한 갈등을 지속적으로 촉발한다. 당시 산부인과 병동은 산욕열로 사망하는 임산부의 비율이 폭발적인 상황이었으며, 오히려 병동에 입원하지 못해 거리에서 분만하는 산모들이 훨씬 안전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 클린의 산부인과 병동은 장례의 문장들로 이루어진 육중한 장막이라는 은유 바로 그것이었음이다. 산부인과 의료진들 -인습에 길들여진 경건하고 비굴한 자들 - 의 의식이란 산욕열이 서민층 아낙네들이 모성의 삶에 들어오면서 종종 치러야 했던 일종의 고통스런 조공이라 여기(77)”는데 만족하고 있었으니, 임산부들의 출산은 곧 죽음과 동의어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기서 셀린은 지적한다. 숙명이라 불리는 이 주변 환경의 강박 한가운데 버티어 서고, 무엇인가를 감행하고, 그러면서 자신을 휩쓸어가려는 공동의 운명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힘을 제 안에서 발견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79)” 는 것이다. 좀처럼 이 인습적 타성, 시대를 휘감아 도는 상식이라는 숙명을 넘어서려는 자는 오히려 주변의 돌팔매를 얻어맞기 일쑤인 것이 인간 사회라는 말이다.

 

최고의 지성이란 자들이 제멜바이스의 발견을 인정하고 적용하기까지 4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 이들은 만장일치로 증오심에 사로잡혀 제공된 이 거대한 진보를 거부했다.“ -103

 

제멜바이스는 시신 해부실습 중 메스에 찔려 그 여파로 동료 의사가 사망하자 이를 추적 하여 산모들의 사망 원인이 되었던 산욕열과 이 병이 일치함을 느낀다. 시체로부터의 감염이 산욕열의 병인이라는 가설이다. 당시 조직학의 수준은 현미경 수준 포착 염색법을 알지 못했기에 세균을 보지 못하였으니, 논리적 추론에 의한 병인의 확인 이상은 불가능했기에 이를 입증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곧바로 산모들을 수술하는 모든 의료진에게 손을 씻은 후 접촉할 것을 요구하지만 클린은 질투와 무지로 그를 반박하고 급기야 내치기까지 한다. 이 작품은 제멜바이스의 이러한 감염 예방을 위한 병인 규명과 당대 의료 지성들의 거친 위선과 몰이해, 진실 경멸이라는 어리석음과 공격성과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자칭 전문가라 하는 이들, 본연의 학문에서 이처럼 맹목적이고 어리석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기도 하지만, 이 같은 맹목성에 더해 거짓말과 멍청함, 비열함까지 갖추었음을 보는 것은 사실 인간에 대한 수치스러움이다. 셀린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온갖 질투와 허영이 고삐 풀린 듯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온다.(...) 훗날 인간 과오의 역사를 작성하게 된다면 아마도 이보다 막강한 과실의 예는 찾기 힘들 것(107)”이라고.

 

제멜바이스는 이런 배타적 시련 속에 고향 헝가리로 돌아오지만 그에게 가해지는 고립과 폭력 속에서 그의 불은 사그라들고 만다. 마지막까지 그를 도우려 했던 동료는 당시 프랑스 산부인과 계를 지배하던 난공불락의 권위자인 뒤부아를 찾아가지만 그는 세균 감염, 즉 감염 예방을 위한 의료진의 손 소독은 이미 폐기된 것이라며 적대감마저 보인다. 세상은 권위에 복종하고 인간의 정신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만다.

 

알량한 이성이라는 사슬의 관습에 얌전히 용접된 채 주의 깊게 앉아있는 어린이 모양처럼 인습과 권위에 복종하면서 진실에는 사납게 달려들어 두드려 팬다. 작가는 다시 반복한다. 우리 인류의 운명에 적합한 양상을 선택할 줄 모르는 이에게 수치를!(130)”이라고. 마치 선량한 시민에게 폭력과 죽음을 휘두르던 어제의 살인자들이 오늘은 모럴리스트가 되어 뻔한 참회의 헛소리를 지껄이고는 다시금 끈덕지게 예전의 짓거리를 계속하는 작금의 한국 사회처럼 말이다. 여기에 교태어린 인간들은 과장된 아부의 헛소리를 읊어대며 죽음과의 협약에 공모한다. 이 뻔하디뻔한 공허한 노래를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언제 그치려나? 지상 표면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하철에 담아 비스듬한 레일을 급속으로 달려가도록 하는 것이 감응(affects;情動)’의 문체임을 역설하던 셀린의 비굴하고 무관심하며 무기력하기만한 인간과 인간 세계에 대한 이 신랄한 비평은 인간의 비속성, 그 실체를 음울하게 확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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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끝 쏜살 문고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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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의 나이에 발표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첫 작품집 쾌락과 나날(Les Plaisirs et les Jours)중 네 편의 단편 소설을 뽑아 구성한 작은 선집이다. 아마 좀처럼 읽어내기에 참담한 인내력을 요구하는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앞서 고유한 문체나 독특한 정서 등 문학적 감응을 통한 통독의 내심으로 유혹하기에 그만인 작품들이라 하겠다.

 

원작품집의 작품 배치와 같이 처음과 마지막 작품인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이하 발다사르로 표기)질투의 끝으로 동일한 편집 구성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여성 주인공의 관능으로의 타락이라는 공통의 제재로 묶일 수 있는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이하 비올랑트로 표기)어느 아가씨의 고백이라는 두 편을 통해 어쩌면 그가 훗날 천착하게 되는 무의식의 심층, 정서적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소위 프루스트적 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인생이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 요란한 외침과 노여움에 가득 찬,

아무 뜻도 없는 이야기인 것을 - 셰익스피어, 맥베스55장에서

 

 

처음과 마지막 단편인 발다사르질투의 끝두 작품의 제재(題材)인 죽음과 질투는 각기 다르면서도 같은 감응을 선사하는데, 전자는 예고된 죽음에 친숙해져 있는, 즉 죽음의 유혹에 포획된 인물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 길 떠나는 이들에 매혹적인 약속을 속삭이는 짙은 바다(41)”이지만, 후자에겐 고통과 미혹으로부터의 해방, 지난한 갈등을 해결하는 평온으로서의 종료이다. 각기 마지막 장면의 묘사는 1896쾌락과 나날의 서문을 쓴 아나톨 프랑스의 표현처럼 지는 해의 서글픈 찬란함이요, 신비하고 병적인 아름다움의 우아함을 느끼게 한다.

 

질투라는 감정은 샘내고 시기하는 천박한 심리적 망상이라기보다는 꽤나 매혹적인 인간의 지성, 세련되고 무엇보다 논리에 집착하는 상상의 지각처럼 보인다. 발다사르의 경우 자신의 다가 온 죽음에 불현 듯 시라쿠사의 공녀 피아를 경쟁자인 카스트루치오로부터 빼앗아 곁에 두고 싶은 강박적 이기심으로 발현되고, 질투의 끝오노레는 연인 프랑수아즈(손느 부인)’에 대한 단 한 마디의 소문 - 그자 말로는 손느 부인이 아주 격정적이라더군...!” - 에 의해 연인의 부정(不貞)에 대한 상상으로 빚어진 것이다.

 

특히 오노레의 뇌리에서 맴도는 떨어내지 못하는 상상의 연속은 치밀한 논리적 추론을 하는 이성과 매우 닮아있다. 이것이 죽음과 연결되는 것은 어쩌면 인간 에너지의 극한 소모, 불가해한 고통의 수반인 때문인 것만 같다. 발다사르 또한 죽음의 임박에서 피아에 대한 무리한 사랑의 요구인 영혼과 기억의 웅변 역시 그 어느 때의 말보다 빼어난 지성이다. 프루스트는 삶의 열정으로서 질투에 어린 숙명적 한계를 보았던 것만 같다.


 



비올랑트는 채워지지 않은 감각적 쾌락, 이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세계를 향해 고향 스티리아를 떠나 궁중 사교계로 향하여 관능을 추구하는 의지박약한 한 여인의 일생을 술회한다. 곧 사교계에서 절대적 지위를 누리며 숭앙받는 예술작품이 되지만 욕망의 덧없음, 권태로움으로 삶의 활기를 잃어버리기에 이른다. 원하던 물질적 삶에 대한 배움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던 스티리아 성의 집사이자 그녀의 가정교사 오귀스탱과의 약속은 끝없이 미뤄진다.

 

일면 교훈적인 어조로 구성된 오귀스탱이 비올랑트에게 하는 조언은 사교계 인물들이 추구하는 쾌락의 본질을 꿰뚫는다. 훌륭한 것에 마음을 쓰면 바로 그 훌륭함 때문에 ... 싫어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사교계이며, 이것들이 사랑하지 않는 음악, 사색, 고독, 들녂(자연)..”의 상실이 곧 권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권태가 야기하는 염증과 경멸마저 무너뜨리는 습관이라는 타성의 힘이 인간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불행과 행복을 분리하는 힘, 인간 욕망의 취약성을 복잡한 허영심과 섬세한 고뇌로 수놓은 젊은 작품이다.

 

반면에 관능적 욕망에 허물어지는 여자라는 비올랑트와 닮은 듯한 제재를 가진 어느 아가씨의 고백은 내게 이 작품집에서 가장 뛰어난 이야기로 읽힌다.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었지만 서툰 발사로 즉사하지 못하고 일주일의 삶이 남은 여자의 자살에 이르게 된 과정의 술회이다. 아마 이 소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가장 많이 떠올리게 하는 이유로 더 집중하고 애착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자는 어린 시절 엄마의 따뜻한 사랑, 고귀할 만큼 지극한 사랑의 기억이 깊숙이 배어있는 레주블리(Les Oublis; 망각)’라는 장소에서의 엄마와의 달콤한 감동적 해후와 이별의 감미로운 인상들을 얘기한다. 여자에게 엄마는 신성이며, 고양된 영혼이고 지고(至高)한 순수이다. 즉 시간을 가로질러 과거와 현재가 만나 강렬한 매혹의 순간을 기억, 체험하는 이 여정에서 마르셀의 어머니에 대한 반복되는 집착의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된다. 무의식에 침전되어 있던 매혹적인 기억들의 시간. 그리고 끔찍한 경악의 순간들을.

 

타락과 천진난만이 교차하고 모성의 자애와 자연의 잔인함이 교대하며 인간에게 안기는 생의 고통들이 지극히 섬세한 관찰의 문장으로 우아하게 독자의 가슴에 스며들게 한다. 혹자는 질투의 끝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스완의 오데트에 대한 질투, 마르셀의 알베르틴에 대한 질투라는 동일점을 시사하는 전 단계적 읽기의 대표작이라 소개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작은 프루스트의 소설선집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기에 앞선 사전 읽기의 텍스트라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과 욕망, 질투와 회한, 삶과 죽음에 대한 흥미로운 문학적 주제들을 풍성하게 담아낸 젊고 활력 넘치는 소설 그 자체로의 가치를 결코 폄훼할 수 없는 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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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5-22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읽어야겠어요.
이제는,
프루스트!^^

필리아 2022-05-22 10:45   좋아요 1 | URL
네, 책의 유혹이 그치질 않죠 ^*
 
시지프 신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255
알베르 카뮈 지음, 박언주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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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실존은 굴욕적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에서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간의 대면에서 태어난다. (...)

비합리성, 인간의 향수, 그리고 이 둘의 대면에서..." - 47쪽에서

 

산다는 것은 진정 쉽지 않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있다. 어떤 순간, 산다는 것의 이 습관같은 삶에 진저리 처질 때가 있다. 일상의 하찮음, 삶의 의미 부재, 고통의 무용함 등이 육신을 훑고 지나 갈 때면 마치 낯선 곳에 멍하니 서 있는 듯한 자신에 흠칫 놀라곤 한다. 삶의 유한함이 몰고 온 ''라는 개체와 이 세계의 불화(不和), 그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가슴 깊이 밀고 들어오는 느낌에 전율한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공허와 분노가 치밀어 두리번거리며 방황하는 정신, 아니 의지를 다스리려 할 때면 카뮈의 이 에세이를 집어 들고 대체 어떻게  "희망의 전적인 부재, 계속적인 거부, 그리고 의식적인 불만을 전제"하면서 삶에 열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지를 반복하며 곱씹게 된다.

 

세계는 전혀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세계는 내 이해의 바깥에 있다. 카뮈는 말한다.  "만약 인간 사고에 대한 단 하나의 유의미한 역사를 써야 한다면, 그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후회와 무기력의 역사"일 것이라고. 인간의 몸인 내 육신은 죽음 앞에서 뒷걸음질 치지만 육체는 돌이킬 수 없는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 이 모순, 그럼에도 이 한계를 회피하기 위해 희망을, 삶을 초월하고 이상화하며, 혹은 삶을 배반하는 위대한 이념, 내세에 대한 희망과 같은 속임수에 내 삶을 걸지 못한다.

 

그래서 해독 불가능하고 한계가 정해져있는 세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하나의 원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 세계와 나는 불화한다. 그러니 선택지는 명확하다. 벗어나거나 버티는 것, 자살하거나 아니면 희망 없는 상태에서 고집스럽게 버텨내며 살아가는 것 중에서 골라야 한다. 나는 습관처럼 살고 있다. 매번 이 끔찍한 균열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원상복귀하고 마는 것이다. 여전히 나와 세계는 적의로 가득하다. 이 부조리를 끌어안고, 공허한 미래의 약속인 희망이라는 어휘를 떠나보낸 나는 '죽음의 초대를 삶의 원칙으로' 바꾸어 놓은 카뮈의 반항, 열정, 자유의 정신세계를 다시금 펼쳐들고 밑줄 그으며 문장을 거듭 거듭 읽어본다.

 

부조리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임을 모르지 않지만, 동경이나 희구, 희망이라는 미래는 내게 없음을 알면서 현실, 바로 지금의 삶에 고집스레 열정을 쏟아내는, 그 자체로 행복을 견인하는 것은 끊임없는 비약과 구원으로의 도피, 유혹을 낳는다. 카뮈가 그려낸 '리외'라는 인물을 안다. 어찌할 수 없는 재앙,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직면했을 때, 그가 묵묵히 하나하나의 생명을 위해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안다. 온통 고통과 인내를 수반하는 자기 몫의 삶을 다하는 것, 아마 세계와 한 인간 삶의 간극인 부조리에 대한 인식을 지니며 명징한 자기 이해를 수행하는 숭고함으로 내게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아름다움과 용기, 지성을 아는 것이 곧 내 삶의 방식으로 전용되지 않는다. 공허와 습관을 반복하는 무기력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거대한 바위를 산비탈로 굴러 올리기를 반복해야하는 형벌을 수행하는 '시지프', 그의 모든 힘, 열정을 쏟아 부어도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다. 인간 삶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카뮈는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팽팽하게 긴장한 육체의 반복적인 노력의 행위에서 부조리한 인간의 위대한 열정을 발굴해 낸다.

 

산 정상으로 바위를 올려놓았을 때 비탈로 다시금 굴러 내려간다. 시지프는 굴러 올리기 위해 아래로 되돌아간다. 그때 순전히 '인간적인 확신'으로 돌보다 더 단단하고 강한 시지프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인간 조건의 한계)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음을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은 가득 채워진다." 반항하는 인간, 인간 조건에 경멸을 보낼 수 있을 때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음을, 그것이 삶의 행복일 수 있음을 상상해낸다.

 

한편으로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열광하는 것, 이것이 부조리한 창조자 앞에 펼쳐진 길이라고 한다. 허무에 자기만의 색깔을 입힐 수 있는 것, 자신의 조건에 맞서는 끈질긴 반항과 성과 없는 노력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집요함, 이것이 인간의 유일한 위엄임을 깊이 마음에 새겨 넣는다. 진실의 한계에 대한 정확한 판단, 그 절도와 힘을 생각해 본다. 카프카 (Das Schloss)의 인물 '측량기사 K'의 죽음을 깨우쳐 가는 무시무시한 배움의 과정을 삶이라 부르는 그 감동 어린 얼굴을 그려보게 본다. 모순 속에서 믿음을 길어내는 그 의지로 충만한 인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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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 정신분석과 문학 무의식의 저널 Umbr(a)
알렌카 주판치치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1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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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결코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르는 어떤 것으로의 통로이며, 주이상스를

기록하는 증상, 실재의 귀환을 위한 공간을 기록하고 열어주는 행위이다."

- 59쪽에서

 

 

이 책은 글쓰기가 불가피하게 노정하는 틈새, 그 결여를 통해 드러나는 '분리된 주체'로 맺어지는 "쓰기와 정신분석을 연결시키는 개념의 길을 닦는 개간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글 혹은 문학의 문자가 재현해 내지 못하는 무엇이 있다. 바로 그 무엇이 봉합되지 못한 분리된 주체이며, 이것을 읽어내는 것이 정신분석이고, 이를 통해 실재와 조우를 가능케 하여 충실한 삶의 이해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담론이라 하겠다.

 

사실 이러한 연결 노력이 아니더라도 글쓰기, 특히 문학 작품이란 어떤 일관성과 이해를 원하는 본질적인 심리적 요구에 따라 사람들이 인식하고 작동시키는 정신과정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한다. 그럼에도 '정신분석적 독해''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무의식적 환상, 원초적 장면, 어린 시절 기억 등등', 작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서 풀어내는 "완전한 예상 가능성을 함축하는 지루하고 이론적으로 빈약한 환원적이고, 고작 정신분석 진리를 확증하는 데 이용될 뿐(110~111, 축약 발췌 인용)"이라고 비판되기도 한다. 이 책 라이팅: 정신분석과 문학에 대한 내 읽기는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겠다.

 

아마 이러한 비판에 대한 가장 치열한 논의가 진행된 글은 '-미셸 라바테'가 쓴 문학해석에 저항하는 문자: 라깡의 문학비평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신분석적 해석은 "텍스트의 고유성을 교조적으로 공식에 환원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 '데리다'"상식의 심리에 기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텍스트에서 반복되는 기표들, 그 언어학적 결절점에 주목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라깡의 서로 다른 견해이다. -미셸은 우리가 텍스트를 읽는 가능한 방법으로서 다음과 같이 데리다를 반박한다. "아무도 일정한 텍스트의 요소들로 환원시키거나 번역하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읽을 수 없"으며, "텍스트의 풍요로움이라는 순수성은 언제나 주제, 구조, 플롯이나 서사등과 같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델, 사례와 개념적 도구들이 필요한 것은 불가피한 것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한다. 물론 기원과 가정의 결과처럼 환원적인 해석이 아닌 정신분석적 이해를 가지고서.

 

"문학은 구멍과 삭제로 만들어졌다." -126쪽에서

 

핵심은 이것일 것이다. 정신분석과 글쓰기 혹은 문학과의 연결지점, 즉 문자, 써진 글에서 읽어 낼 것이 무엇인가? 가 될 것 같다. 라깡은 "텍스트의 표면에 명시된 의도들의 핵심을 거스르면서 가능한 문자적으로 충실하게 읽"어야 한다고 했다. '캐서린 밀로'가 쓴 왜 작가인가는 이 사안의 적절한 답변으로 보인다. 드러나서는 안 될 자신의 욕망이 노출될 두려움으로 라깡에게 보내지 못한 엽서의 일화로 시작하여,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V. 스타인의 황홀경의 첫 장면, 이른바 '원초적 장면'이라 부를 수 있는 롤 스타인의 모습에서 일종의 근본적 부재를 읽어낸다. 그리곤 "그것은 부재 언어, 구멍 언어"라고, 다른 말들이 그 안에 묻혀 있는 구멍, 여기서 분리된 주체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 그 욕망의 근원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재현 불가능한 '실재', 상징계와 상상계를 잇는 구멍과 삭제이지 않을까? 문학은 이처럼 정신분석과 이어진다는 것일 게다.

 

이 책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트레이시 맥널티'제약의 작동: 상징적 삶의 미학을 향하여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이 매력적으로 다가 온 첫 번째 이유는 성문법, 혹은 쓰기가 상징계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가설의 치밀한 입증 여정 때문이다. "모세의 일신종교-유대인의 십계명-가 근본적 부재와 결여를 도입했다."는 것, 즉 이전의 토템구조와 같은 상상적 권위와 동일시하거나 복종하는 것이 아닌, 즉 대타자의 결여된 중심을 통과해가야 할 것을 규정해 놓은 상징계의 제도로 나아갔다는 증명이다.

 

희생거부, 신성의 육화현신 금지와 같은 이 율령이 전능한 아버지, 즉 초자아적 성격을 비워 냄으로써 대타자의 논리적 장소를 텅 비게 했다는 것이며, 이는 욕망의 주체가 등장하는 공간을 열었다는 것이다. 신이 뒤로 물러남으로써 인간 주체의 충만한 등장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석이 쓰기와 연결되어야 하는 필연적 성취가 아니겠는가라는 결정적 수긍의 지점이라 하겠다. 이것은 칸트의 '무한의 부정적 전시'로서의 쓰기에 닿아, 성문법(쓰기)이 상상계의 유혹에 저항하고 그 유혹이 권장하는 권력에의 복종을 거부하는, 이성적 능력의 자유로운 행사의 길을 열었음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우리는 쓰기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스스로 고양시키는 초월 능력의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매혹의 둘째 이유는 실험 문학집단 울리포(잠재적 문학의 작업실)의 형식적 강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쓰기를 통해, "엄격하게 형식적인 (실험적)강제가 갖는 해방적 잠재성"의 차원에 대한 발굴로서, "문자의 실천에 내포된 창조적 강제와의 투쟁 속에서 모색하고 유지되는 주체의 출현"에 대한 발견이라 하겠다. 결국 욕망과 자유의 행사 속에서 주체를 유지시키려는 이 야심적 실험에서 인간 삶의 충만한 다양성을 헤아릴 수 있음의 새로운 이해의 획득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도 수동적 저항의 역설이라 할 수 있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특이하고 기묘한 문장 하나를 통해 "가시적이고 실감나게 묘사 가능한 아무것도 없지만 뭔가가 일어난" , 그것 본원의 줄기를 따라감으로써, 이 불확정성과 미결정성의 문자가 야기하는 제3의 영역, 그 상징적 공간을 열어 의미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알렌카 주판치치'가 쓴 바틀비의 자리는 정신분석과 문학의 연결을 총합적으로 아우르는 정신분석비평의 멋진 보기라 해도 될 것 같다.

 

우리 인간들은 글을 통해 실재를 쫓으려하지만, 이 재현은 필연적으로 결여를 낳는다. 바로 이 결여, 틈새가 잔여물로 남겨진 실재를, 상징계를 통해 발굴하게 한다. 정신분석은 문학, 그 무의식의 주체인 실재를, 주체의 고유성을 식별하는 틈새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포착할 수 없는 사물의 현전을 환기시키고 발언 불가능한 그 실재를. 정신분석을 통해 우리는 문학의 공간, 언어의 순수성을 약속하는 공간을 배우게 된다. 두고두고 참조할 문학 비평서이자 정신분석이론의 실천적 기능을 다원적으로 이해케 하는 저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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