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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유고 산문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5월
평점 :
나는 한일 병탄에 이르는 조선의 역사,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일제 부역에 나섰던 족속들의 매국의 행보를 다시금 열거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숨어있던 그것들의 종자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 양 기어 나와 대가리를 빳빳이 쳐들고 국민과 국기(國基)를 모욕, 부정하는 사태에 직면하리라고는 결코 예기치 못했다. 故 박경리선생의 『日本散考』를 다시금 읽으며, 주구가 되어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종자들에 뿌리내린 그 저열성의 근본을 확인한다. 혹여 나와 우리들이 잊고 있는 역사 인식과 저것들에 도사린 역사 지우기의 반민족적 행태의 근인을 보다 명료하게 정리코자 읽는 것이다.
이 책의 주요 산문원고들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저자가 일본의 반성 없는 태도에 편승하여 마치 자신들만은 메타적이고 세계시민의 시선을 가진 듯 가식과 위선들을 떨어대며 일본의 시각에 동조하는 종자들의 양태를 목도하면서, 뚜렷한 역사인식을 토대로 철저한 조사를 거쳐 쓴 글들이다. 아마 선생이 생존해 오늘의 이 꼴을 보신다면 우리 공동체가 비극적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국민대중에 경계의 목적으로 남겨준 일종의 ‘일본 사용 설명서’이자, ‘종일(從日) 부역 족속들에 대한 엄중한 자성의 요구서’이기도 한 이 통분의 기록 앞에서 우매한 동족들에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셨을 것만 같다.
종일부역 종자들은 “그 시절(식민지배기간)이 좋았다고,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먹고사는 걱정이 없어졌으며, 일본인이 되어 자랑스러웠다고, 그렇게 종일 종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다고? “‘천만의 말씀!’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현재 반일(反日)하는 것이며,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반일하는 것이며, 오늘과 같은 종일부역자 종자들과 반성없는 일본인이 있기 때문에 반일하는 것이다.”
일제를 위해 부역하고 푼돈을 얻어 쓰며, 그야말로 청풍당상(淸風堂上)에 앉아 나라 팔아먹고 호가호식(豪家好食)하던 양반 족속들, 그리고 그 종자들에게는 일제의 압제가 오히려 그리움이고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말한다. 그 푼돈도 이 나라 발전의 밑천이 되었노라고. 일제에 항거하는 민중들을 빨갱이라고 낙인찍어 지배권력이 알아서 처리해주니 동족을 노예처럼 굴리며 주머니를 채우는데 더없이 우아한 환경이었음을 더 말해서 무엇 하랴.
이것들이 오늘 광복절을 부정하고, 민족의 고유 영토를 분쟁화하며, 독립 투쟁에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빨갱이라 왜곡하여 테러리스트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민족의 정신을 깡그리 뒤엎어 한 줌도 되지 않는 더러운 종자무리들이 역사와 국가 정체성을 전복하려 하고 있다. 가히 반역의 무리들이며, 반민족 행위자들이다. 급기야 일본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며 국민을 향해 존재하지도 않는 열등감, 패배의식이라는 단어를 내밀며 국민의 역사정신에 훈계까지 해대기에 이르렀다. 수치심도, 역사 인식도, 민족 정체성도, 그 어느 하나 갖추지 못한 가장 저열한 것들이 뚫린 주둥아리라고 똥 내지르듯 배설하고 있다. 그 악취가 온 나라의 대기를 더럽히고 있다. 감정적으로 들리는가? 그래 감정의 문제를 어찌 배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감정에는 논리적이고 역사적 사실이라는 근거가 있다.
박경리 선생의 이 모음 글들은 종일 부역배들이 숭배하는 일본인, 일본의 정신이라는 그 텅 비고 공허한 망상과 이 빈 정신에 들어 찬 잔인성과 왜곡된 죽음의 미화, 역사적 무의식에 켜켜이 쌓인 반도와 대륙에 대한 열등감과 침탈, 섬을 탈출하려는 확장에 대한 야욕의 역사를 관류하며, 한국의 지식인이라 자처하며 종일하는 밀정들에 대한 경고와 민중적 경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책은 일본과 일본인의 실체에 대한 철저한 통찰을 주요 논제로 하고 있다. 이 통찰을 통해 이들의 밀정 노릇을 하는 이 땅의 종일부역 종자들의 허상과 역사 왜곡, 부정의 망상을 꾸짖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일본의 반성 없음을 비난하는 한국인의 반복되는 요구가 일본인을 피로하게 하고, 그렇게 강제된 반성의 언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일본인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괴이한 말아닌 오물을 쏟아내는 종자까지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한국인의 의식 깊은 곳의 원한은 열등감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웃기는 개수작이다. 일제에 강점된 식민 36년은 일본에게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해왔다는 사실이며, 때문에 그 원한이 일방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뿐 아니라, 이 증오의 가시는 자연스레 뽑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현상은 외려 일본인과 이들 종일 부역자들이 이러한 한국인의 원한과 증오보다 더 극악한 원한을 한국인에게 품고 있는 현상이다.
나는 40년 전에 일본의 도쿄에 첫 걸음을 했으며, 그 때 도쿄역 건너편 야에수(八重洲)지구에 있는 마루젠(丸善)서점에 가게 되었었다. 이러한 행태는 업무 차 방문 때마다 하는 나의 루틴이었으며 이는 40여년간 계속되었다. 들어서자 제일 먼저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대규모로 진열된 혐한(嫌韓)서적들이다. 한국과 한국인을 조롱하고 폄훼하며 비난하기 위해 그 많은 종류의 책들이 써지고 있으며,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것은 가히 아연실색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오늘까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튀르키예에 한국 건설업체가 건설한 해양 현수교가 완공되자 일본 공영방송에서는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조롱과 함께 저주를 퍼부었다. 일본인들의 신체에 켜켜이 쌓여온 질투의 심술궂은 사촌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고통에서 기쁨을 느끼는 던적스럽기 그지없는 저열함 그것일 것이다. 그리곤 최근 튀르키예 정부가 해당 교량의 수려함과 안전성에 감사의 말을 표시했음이 해외 매스컴을 장식하자 근거 없는 원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집요한 한국에 대한 원한의 근본은 무엇일까? 이는 역사적 열등감과 정복자로서의 오만함의 발로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저자는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오랜 세월 선험적인 것, 즉 무의식 속에 깊이 박힌 한국이 자신들의 원류임을 부정하는 광적 부인의식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역사의 원류는 어떻게 해석되든 좋다. 이미 터럭만큼도 동질성이 없는 마당에 이것이 무엇이 문제가 될까. 이보다 근저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 신도(神道)라는 그들의 정신이라는 것의 생명없이 텅 빈 도구화적 속성과 아무런 본질도 없이 기만과 닫힌 정신세계이다. 이들의 건국신화라는 『고사기』에 기록된 구전의 이야기는 전체가 날조와 삭제, 표절로 미화된 짜깁기임을 입증하고, 후일 한일합방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무수한 땜질로 역사를 수정, 왜곡하였음은 이의가 없는 정설이다.
이들의 창조신화에는 현실의 권력 상속에 관한 실질 문제이외에는 그 어떠한 약속이나 계율, 정신적 메시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만세일계의 위력만이 넘실대며 그것을 신국(神國)이라 포장한다. 정신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단지 기만성만이 가득한 텅 빈 상자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신국이라는 상자에는 어떤 본질 없이 그때그때 써 먹을 수 있는 도구만이 담기고, 사상적 내용이 없어 실체와 본질에 대해 무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일본인들이 미화하고 자랑하는 자기네 정신의 표본이라 하는 ‘하라키리(切腹)’는 생선 배 갈라 내장 꺼내듯, 복부이기에 절명까지 시간이 걸리고 배 가른 사람의 목을 쳐주는 가이쿠샤라는 존재에 의해 두 번의 죽음을 맞는다.(여기에만 두 개의 피 묻은 칼이 필수가 된다) 이 추악하고 야만적인 자살방법에 일본인들은 비단을 휘감아 치장하고 미화한다. “자기 고통의 하수인이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게 하는 잔인무도한 의식일 뿐,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복합된” 광적 잔혹함이다. 이것을 대단한 죽음의 철학인양 미화된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체념의 타의성만이 넘실댈 뿐이다. 일본인의 의식 속에는 오직 도구성이라는 기회주의적 수단과 민족정신이란 것 없이 공허한 빈 상자만이 있다.
그 상자는 항시 남의 것을 베껴 만든 조악함, 그것을 경제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데는 긴요할 것이지만 의식은 야만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귀중한 것인 생명의 지엄함과 창조의 정신이 없다. 텅빈 공허한 정신과 잔인하고 어두운 죽음의 세계, 그 수동성과 무감증만이 있는 일본의 망상을 숭배하며 종일 부역배들의 종자들은 말한다. 삶의 터전을 잃고 국토가 유린당하며 민족이 살육당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던 식민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이 마땅한 권리 쟁취를 하기 위해 민족주의와 반일사상을 간직하는 것이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떨치지 못한 저열성이라고. 이런 무식한 개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들의 민족주의와 반일 사상은 몇 푼의 물질 피해가 아니라 환산이 불가능한 민족적 정기와 민중의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상처이다. 마치 평등의 세계주의자인 양 한국인의 민족주의와 반일을 조롱 비난하며 이상주의자처럼 지적 허영을 떨어댄다. 강자 편에서, 가해자 편에 서서 양심을 비판하는 것은 피해자의 불이익을 바라보지 않는 외눈박이의 사시(斜視)이며, 허구이자 망상일 뿐이다. 일본인, 일본은 단 한 차례도 진실어린 반성도 사죄를 한 적이 없다, 고작 통분에 공감한다느니, 과거사의 불편이 있었음을 인정한다느니 하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뻔뻔스레 빠져나갈 뿐 아니라 여전히 한국인과 한국의 민족주의와 반일정신을 조롱, 폄훼하며 나아가 한국의 자랑을 자신들의 피해로 간주하며 못 견뎌한다.
일본의 극우를 대표하는 독재 정당인 자민당은 “도대체 마음의 문제를 외교 레벨에서 사죄로 풀 수 있는 것인가”라고 사죄의 무의미성을, 불필요성을 주장한다. 지금 이 땅의 종일 부역배 종자들이 따라 하는 말이 바로 이 터무니없는 말이다. 일본인과 일본은 사죄할 용기조차 없는 족속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또한 그까짓 사죄를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누가 모르겠는가! 방자하고 양심없는 시정잡배나 하는 소리를 일본을 대변해 지껄이는 종일 종자들의 이치에 닿지도 않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언어 오용에 이처럼 시시콜콜 따지고 입증해야 하는 오늘의 상황이 서글픈 생각조차 든다.
지금 반일의 대중화와 대중의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외세와 불의한 매국노들이 판칠 때면 항상 부녀자들과 승려들, 힘없는 백성이 일어나 항쟁했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는 선생의 통찰에 공감한다. 일본이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는 때 우리는 비로소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식민사관에 물들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전복하려는 종일 부역 종자들이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횡행한 적이 없을 것이다.
박경리 선생은 “일본인에게 예(禮)를 차리지 말라!”고 했으나, 이를 수정해서 ‘종일 부역배 종자들인 일본의 밀정들과 일본인에게는 예를 차리지 말라’ 고 해야 할 것 같다. 한 가지 지적하고 맺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을 선별 편집한 문학평론가 이승윤은 이 문장을 “도발적 발언”이라 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심히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를 도발한다는 것인가? 일본을 도발한다고? 종일 부역배들에게 도발적이란 말일 텐데, 그것들에게 도발할 것이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선생이 한국의 동족들인 민중에게 경계삼아 하는 말인데 어떻게 도발이란 말이 가능한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 책은 작금 한국 사회의 어지럽혀진 역사의 부정과 전복 사태를 냉철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줄 터이다. 나도 민족주의와 반일을 내던지고 싶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않으니 너무도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