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유고 산문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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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일 병탄에 이르는 조선의 역사,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일제 부역에 나섰던 족속들의 매국의 행보를 다시금 열거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숨어있던 그것들의 종자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 양 기어 나와 대가리를 빳빳이 쳐들고 국민과 국기(國基)를 모욕, 부정하는 사태에 직면하리라고는 결코 예기치 못했다. 박경리선생의 日本散考를 다시금 읽으며, 주구가 되어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종자들에 뿌리내린 그 저열성의 근본을 확인한다. 혹여 나와 우리들이 잊고 있는 역사 인식과 저것들에 도사린 역사 지우기의 반민족적 행태의 근인을 보다 명료하게 정리코자 읽는 것이다.

 

이 책의 주요 산문원고들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저자가 일본의 반성 없는 태도에 편승하여 마치 자신들만은 메타적이고 세계시민의 시선을 가진 듯 가식과 위선들을 떨어대며 일본의 시각에 동조하는 종자들의 양태를 목도하면서, 뚜렷한 역사인식을 토대로 철저한 조사를 거쳐 쓴 글들이다. 아마 선생이 생존해 오늘의 이 꼴을 보신다면 우리 공동체가 비극적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국민대중에 경계의 목적으로 남겨준 일종의 일본 사용 설명서이자, ‘종일(從日) 부역 족속들에 대한 엄중한 자성의 요구서이기도 한 이 통분의 기록 앞에서 우매한 동족들에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셨을 것만 같다.

 

종일부역 종자들은  그 시절(식민지배기간)이 좋았다고,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먹고사는 걱정이 없어졌으며, 일본인이 되어 자랑스러웠다고, 그렇게 종일 종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다고?   “‘천만의 말씀!’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현재 반일(反日)하는 것이며,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반일하는 것이며, 오늘과 같은 종일부역자 종자들과 반성없는 일본인이 있기 때문에 반일하는 것이다.”


일제를 위해 부역하고 푼돈을 얻어 쓰며, 그야말로 청풍당상(淸風堂上)에 앉아 나라 팔아먹고 호가호식(豪家好食)하던 양반 족속들, 그리고 그 종자들에게는 일제의 압제가 오히려 그리움이고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말한다. 그 푼돈도 이 나라 발전의 밑천이 되었노라고. 일제에 항거하는 민중들을 빨갱이라고 낙인찍어 지배권력이 알아서 처리해주니 동족을 노예처럼 굴리며 주머니를 채우는데 더없이 우아한 환경이었음을 더 말해서 무엇 하랴.

 

이것들이 오늘 광복절을 부정하고, 민족의 고유 영토를 분쟁화하며, 독립 투쟁에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빨갱이라 왜곡하여 테러리스트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민족의 정신을 깡그리 뒤엎어 한 줌도 되지 않는 더러운 종자무리들이 역사와 국가 정체성을 전복하려 하고 있다. 가히 반역의 무리들이며, 반민족 행위자들이다. 급기야 일본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며 국민을 향해 존재하지도 않는 열등감, 패배의식이라는 단어를 내밀며 국민의 역사정신에 훈계까지 해대기에 이르렀다. 수치심도, 역사 인식도, 민족 정체성도, 그 어느 하나 갖추지 못한 가장 저열한 것들이 뚫린 주둥아리라고 똥 내지르듯 배설하고 있다. 그 악취가 온 나라의 대기를 더럽히고 있다. 감정적으로 들리는가? 그래 감정의 문제를 어찌 배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감정에는 논리적이고 역사적 사실이라는 근거가 있다.

 

박경리 선생의 이 모음 글들은 종일 부역배들이 숭배하는 일본인, 일본의 정신이라는 그 텅 비고 공허한 망상과 이 빈 정신에 들어 찬 잔인성과 왜곡된 죽음의 미화, 역사적 무의식에 켜켜이 쌓인 반도와 대륙에 대한 열등감과 침탈, 섬을 탈출하려는 확장에 대한 야욕의 역사를 관류하며, 한국의 지식인이라 자처하며 종일하는 밀정들에 대한 경고와 민중적 경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책은 일본과 일본인의 실체에 대한 철저한 통찰을 주요 논제로 하고 있다. 이 통찰을 통해 이들의 밀정 노릇을 하는 이 땅의 종일부역 종자들의 허상과 역사 왜곡, 부정의 망상을 꾸짖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일본의 반성 없음을 비난하는 한국인의 반복되는 요구가 일본인을 피로하게 하고, 그렇게 강제된 반성의 언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일본인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괴이한 말아닌 오물을 쏟아내는 종자까지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한국인의 의식 깊은 곳의 원한은 열등감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웃기는 개수작이다. 일제에 강점된 식민 36년은 일본에게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해왔다는 사실이며, 때문에 그 원한이 일방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뿐 아니라, 이 증오의 가시는 자연스레 뽑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현상은 외려 일본인과 이들 종일 부역자들이 이러한 한국인의 원한과 증오보다 더 극악한 원한을 한국인에게 품고 있는 현상이다.

 

나는 40년 전에 일본의 도쿄에 첫 걸음을 했으며, 그 때 도쿄역 건너편 야에수(八重洲)지구에 있는 마루젠(丸善)서점에 가게 되었었다. 이러한 행태는 업무 차 방문 때마다 하는 나의 루틴이었으며 이는 40여년간 계속되었다. 들어서자 제일 먼저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대규모로 진열된 혐한(嫌韓)서적들이다. 한국과 한국인을 조롱하고 폄훼하며 비난하기 위해 그 많은 종류의 책들이 써지고 있으며,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것은 가히 아연실색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오늘까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튀르키예에 한국 건설업체가 건설한 해양 현수교가 완공되자 일본 공영방송에서는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조롱과 함께 저주를 퍼부었다일본인들의 신체에 켜켜이 쌓여온 질투의 심술궂은 사촌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고통에서 기쁨을 느끼는 던적스럽기 그지없는 저열함 그것일 것이다. 그리곤 최근 튀르키예 정부가 해당 교량의 수려함과 안전성에 감사의 말을 표시했음이 해외 매스컴을 장식하자 근거 없는 원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집요한 한국에 대한 원한의 근본은 무엇일까? 이는 역사적 열등감과 정복자로서의 오만함의 발로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저자는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오랜 세월 선험적인 것, 즉 무의식 속에 깊이 박힌 한국이 자신들의 원류임을 부정하는 광적 부인의식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역사의 원류는 어떻게 해석되든 좋다. 이미 터럭만큼도 동질성이 없는 마당에 이것이 무엇이 문제가 될까. 이보다 근저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 신도(神道)라는 그들의 정신이라는 것의 생명없이 텅 빈 도구화적 속성과 아무런 본질도 없이 기만과 닫힌 정신세계이다. 이들의 건국신화라는 고사기에 기록된 구전의 이야기는 전체가 날조와 삭제, 표절로 미화된 짜깁기임을 입증하고, 후일 한일합방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무수한 땜질로 역사를 수정, 왜곡하였음은 이의가 없는 정설이다.


이들의 창조신화에는 현실의 권력 상속에 관한 실질 문제이외에는 그 어떠한 약속이나 계율, 정신적 메시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만세일계의 위력만이 넘실대며 그것을 신국(神國)이라 포장한다. 정신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단지 기만성만이 가득한 텅 빈 상자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신국이라는 상자에는 어떤 본질 없이 그때그때 써 먹을 수 있는 도구만이 담기고, 사상적 내용이 없어 실체와 본질에 대해 무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일본인들이 미화하고 자랑하는 자기네 정신의 표본이라 하는 하라키리(切腹)’는 생선 배 갈라 내장 꺼내듯, 복부이기에 절명까지 시간이 걸리고 배 가른 사람의 목을 쳐주는 가이쿠샤라는 존재에 의해 두 번의 죽음을 맞는다.(여기에만 두 개의 피 묻은 칼이 필수가 된다) 이 추악하고 야만적인 자살방법에 일본인들은 비단을 휘감아 치장하고 미화한다. 자기 고통의 하수인이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게 하는 잔인무도한 의식일 뿐,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복합된광적 잔혹함이다. 이것을 대단한 죽음의 철학인양 미화된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체념의 타의성만이 넘실댈 뿐이다. 일본인의 의식 속에는 오직 도구성이라는 기회주의적 수단과 민족정신이란 것 없이 공허한 빈 상자만이 있다.

 

그 상자는 항시 남의 것을 베껴 만든 조악함, 그것을 경제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데는 긴요할 것이지만 의식은 야만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귀중한 것인 생명의 지엄함과 창조의 정신이 없다. 텅빈 공허한 정신과 잔인하고 어두운 죽음의 세계, 그 수동성과 무감증만이 있는 일본의 망상을 숭배하며 종일 부역배들의 종자들은 말한다. 삶의 터전을 잃고 국토가 유린당하며 민족이 살육당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던 식민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이 마땅한 권리 쟁취를 하기 위해 민족주의와 반일사상을 간직하는 것이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떨치지 못한 저열성이라고. 이런 무식한 개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들의 민족주의와 반일 사상은 몇 푼의 물질 피해가 아니라 환산이 불가능한 민족적 정기와 민중의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상처이다. 마치 평등의 세계주의자인 양 한국인의 민족주의와 반일을 조롱 비난하며 이상주의자처럼 지적 허영을 떨어댄다. 강자 편에서, 가해자 편에 서서 양심을 비판하는 것은 피해자의 불이익을 바라보지 않는 외눈박이의 사시(斜視)이며, 허구이자 망상일 뿐이다. 일본인, 일본은 단 한 차례도 진실어린 반성도 사죄를 한 적이 없다, 고작 통분에 공감한다느니, 과거사의 불편이 있었음을 인정한다느니 하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뻔뻔스레 빠져나갈 뿐 아니라 여전히 한국인과 한국의 민족주의와 반일정신을 조롱, 폄훼하며 나아가 한국의 자랑을 자신들의 피해로 간주하며 못 견뎌한다.

 

일본의 극우를 대표하는 독재 정당인 자민당은 도대체 마음의 문제를 외교 레벨에서 사죄로 풀 수 있는 것인가라고 사죄의 무의미성을, 불필요성을 주장한다. 지금 이 땅의 종일 부역배 종자들이 따라 하는 말이 바로 이 터무니없는 말이다. 일본인과 일본은 사죄할 용기조차 없는 족속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또한 그까짓 사죄를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누가 모르겠는가! 방자하고 양심없는 시정잡배나 하는 소리를 일본을 대변해 지껄이는 종일 종자들의 이치에 닿지도 않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언어 오용에 이처럼 시시콜콜 따지고 입증해야 하는 오늘의 상황이 서글픈 생각조차 든다.

 

지금 반일의 대중화와 대중의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외세와 불의한 매국노들이 판칠 때면 항상 부녀자들과 승려들, 힘없는 백성이 일어나 항쟁했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는 선생의 통찰에 공감한다. 일본이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는 때 우리는 비로소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식민사관에 물들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전복하려는 종일 부역 종자들이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횡행한 적이 없을 것이다.

 

박경리 선생은 일본인에게 예()를 차리지 말라!”고 했으나, 이를 수정해서 종일 부역배 종자들인 일본의 밀정들과 일본인에게는 예를 차리지 말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한 가지 지적하고 맺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을 선별 편집한 문학평론가 이승윤은 이 문장을 도발적 발언이라 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심히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를 도발한다는 것인가? 일본을 도발한다고? 종일 부역배들에게 도발적이란 말일 텐데, 그것들에게 도발할 것이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선생이 한국의 동족들인 민중에게 경계삼아 하는 말인데 어떻게 도발이란 말이 가능한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 책은 작금 한국 사회의 어지럽혀진 역사의 부정과 전복 사태를 냉철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줄 터이다. 나도 민족주의와 반일을 내던지고 싶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않으니 너무도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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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ew - 지식의 탄생 (Knowing what we know), 사이먼 윈체스터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세계에서 지식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 8월 29일 출간 예정인 사이먼 윈체스터의

지식의 탄생(Knowing what we know)』에 대한 프리뷰입니다.]



모든 인생의 발자취는 끊임없는 지식의 축적으로 만들어진다.” -10

 

책은 지식의 생성에서 오늘과 같은 지식(knowledge)의 의미로 쓰이게 된 변화과정, 그리고 지식의 전승과 확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이러한 배경 하에 지식의 획득과 기억이 더 이상 인간의 뇌를 필요로 하지 않고 컴퓨터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지능의 쓸모에 대해 살펴보려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유리 화면에 손끝을 가볍게 터치하는 것만으로 어딘가에 있을 방대한 정보와 지식 더미에 접근하여 필요로 하는 지식을 재가공 또는 생성하여 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해 있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인공지능(Chat GPT와 같은)에 의해 자신의 지적 노력없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의 문제 제기처럼 지식의 생성, 분류, 조직, 저장, 확산에 있어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여 지식을 습득하고 대신 생각해준다면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는 정말 기이하고 염려스러운 상황이라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제기를 탐구하기 위해, 지식이란 인간에게 무엇인지, 즉 안다는 것의 의미를 플라톤의 테이아테토스에서 정의한 정당화된 믿음이라는 정의를 기초로 인간의 일관성 없는 다양한 관습과 의례, 종교로부터의 영향 속에서 믿음에 의지했던 지식이 합리성에 의존한 계몽주의에 의해 비로소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검증할 수 있는 확정적 개념으로서의 지식에 이른다. 소위 인식론이라 불리는 지식의 오랜 지배 끝에 이를 제치고 새롭게 대두된 오늘의 지식이론인 DIKW(Data, Information, Knowledge, Wisdom)체계를 토대로 지혜의 발현에 작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요인들이며, 지식 구조와 선행요소인 데이터와 정보의 역할, 그렇게 만들어진 모든 정보로부터 비로소 지식의 생성과 이 지식들을 삶의 유용한 소중한 지식으로 바꿔 놓은 지혜를 설명한다.

 

또한 지식은 어떻게 전달, 전파, 확산되어 사회에 퍼져 나갔는지, 그 수단들과 건강과 생존, 공동체 결속이라는 전승 목적을 살펴본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이로울 가능성이 큰 지식의 전승이 상업자본주의를 비롯한 민족주의와 전쟁들의 잡음에 파묻혀 사장되거나 지식 고유의 목적을 잃는 것은 왜 인지 성찰 한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저자 사이먼 윈체스터는 교육(가르치고 배움의 터전으로서의 장소), 저널리즘, 백과사전, 사진, 방송에 이르는 광대한 분야를 조사하고, 바빌론의 설형문자부터 금속활자 인쇄술, 인공지능에 이르는 지식 확산의 전반적 범위를 친근한 일화와 일상적 사례를 통해 독자의 사유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일례로 인간이 어떻게 정보를 획득하고 유지하며 전달하는 지에 대한 훌륭하고 포괄적 지식의 설명이 세 살 때 벌에 쏘인 기억의 일화로 충분할 만큼 일견 사변적일 수 있는 지식의 장벽을 철수시켜 주는 것인데, 이 경험은 말벌이라는 곤충의 존재를 알게 하고, 상처를 치료해주었던 어머니가 얼음과 연고로 통증을 가라앉혀주었으며, 이 상처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용감성을 알리는 일종의 전리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기도 했고, 참을성을 가지고 대처하면 칭찬을 받는 다는 사실과 벌에 쏘인 발이 왼발이라는 오른쪽과 구별이라는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일화에는 지식의 생성, 전달, 확산이 모두 포함되어있다. 결국 경험은 지식 습득, 즉 새로운 사실을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수세기에 걸친 지식의 생성과 전달 확산의 역사와 그것들이 의미하는 목적에 대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책의 중심 주제인 지식의 전달과 그 전달로 인해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사유하게 한다. 책의 한국어 표제는 지식의 탄생이라는 역사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하지만, 원 제목은 우리가 아는 것을 안다는 것(Knowing what we know)이라는 점에서 학습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심층 탐구라는 물음의 사유에 가깝게 여겨진다.

 

결국 저자가 도달, 제기하려는 물음은 이 매혹적인 지식의 여행을 통해 오늘의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지에 대한 숙고의 요청이고,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이 생각의 부족으로 이어지는 듯한 현대 정보기술 의존적 태도의 양가성의 문제일 것이다. 세 살 아이가 느꼈던 어떤 새로운 사실의 습득이 가져온 지식 획득과 전달의 즐거움이 사라진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사물과 사건과 상황을 안다는 생각에서 수학, 지도읽기, 암기 등의 가치들을 제거하여 사고 능력이 점점 위험에 빠져드는 작금의 세계는 우리를 어떤 인간들로 변하게 할 것인가의 우려이기도 할 것이다.

 

컴퓨터 알고리즘에 의해 출현하는 데이터와 정보의 편협성에 길들여지고, Chat GPT가 생성해주는 정보와 지식에 의존하는 세상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선험 또는 경험 지식을 위한 노력이 추구되지 않는, 그래서 소중한 지식으로 만들어낼 지혜가 없는, 현명한 인간이 없는 세상이 펼쳐진다면, 그 세계는 어떤 곳이 될지 상상해 보는 것은 왠지 두렵기조차 하다. 어쩌면 지혜 없는 정보만이 가득한 세계를 상상케 하는 생각이 없는, 지식이 결여된 세계를 숙고하고 자성해보는 시간이 되어 줄 것 같다. 독서와 체험의 삶에 이어 지혜를 잃은 인간 세계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우울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의 호기심과 지혜의 관계에 대한 지적은 오늘 우리들이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정말 우리 인류에게 중대한 질문이 무엇인지, 그 물음에 우린 답할 수 있는지도 또 하나의 물음이 되어 울리는 듯하다. 아무튼 이 책은 지식 전달의 역사를 뛰어넘어 인류의 미래 삶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 대한 고귀한 고찰로 안내한다. 호기심 많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지적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매혹적인 책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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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먼 윈체스터의 지식의 탄생에 대한 이 프리뷰는 프로롤그와 1, 배움의 시작, 2장 최초의 도서관에 대한 사전 읽기에 의해 써진 것입니다. 책은 위 2개 장을 포함하여 지성의 행진, 조작의 연대기, 생각이 필요 없는 시대 등 총 7, 575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분적 독서만으로 작성되었기에 저자의 결론이나 주제와 괴리가 있을 수 있음을 양지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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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 지음, 서대경 옮김 / 아모르문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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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시오? 아직도 피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오? 권력의 주구들아,

너희 차례를 기다려라. 너희도 곧 먹게 될 터이니!” -401쪽에서

 

이 작품을 읽기에 앞서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연주되는 등에(The Gadfly’)를 몇 차례 반복하여 들었다. 고독한 격정이 억제된 누군가의 삶의 풍파가 느껴진다.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의 이 소설(1897년 발표)1955년 영화화되자 영상 삽입곡으로 작곡되었던 것 같다.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는다면 작중 인물들의 내면에 다가가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 선율의 비장미로 이미 감응하는데 적합하게 예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Ethel Lilian Voynich), 1864~1960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등 외세의 억압과 통제에 대한 거센 저항이 시작되던 민족주의에 눈뜬 19세기 이탈리아다. 그러나 이것이 소설의 전경(前景)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저항과 혁명의 정신이 이야기의 토대로서 저변을 흐르며, 여인에 대한 사랑, 부정(父情)에 대한 그리움, ()과 속()의 갈림길에 선 신부의 고뇌를 통한 신을 향한 사랑의 문제 등이 서로 얽혀들며 내면에 깊은 상처를 안은 한 영혼이 뿜어내는 우정과 헌신성, 사랑이 진한 서정성과 감동을 일으키는 열정적이고 일견 낭만적이기까지 한 작품인 까닭이다.

 

때문에 소설은 혁명이데올로기나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을 들이대는 그런 상투성의 작품이 아니다. 옮긴이의 설명처럼 오히려 혁명의 관념성이나 종교 이데올로기의 위선성을 정면으로 뚫고 나가는 실존적 삶의 궤적으로서 한 인간의 내면적 열정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의 죽음에 시름하던 청년 아서는 오스트리아를 축출하고 자유 이탈리아를 건설하겠다는 비밀 저항 운동 단체인 청년 이탈리아그룹에 관심을 갖게 된다. 가계(家系)내 성장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억압, 부조리는 자연스레 젊은 영혼의 마음을 장악하는 대상이 된 것 같다


그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보호와 가르침을 아끼지 않는 피사의 신학교 교장인 신부 몬타넬리가 있다. 아서의 비밀 조직 가입활동을 우려하지만 교황청의 명령을 받아 새로운 교구로 이동하게 되고, 피사에는 새로운 신부가 부임한다. 아서는 소꿉친구였던 젬마를 그룹에서 발견하게 되고 그녀의 조직에서의 역할과 활동에 더욱 호감이 깊어진다. 그녀가 아서의 조직 경쟁자인 볼라와 가깝게 지내고 함께하는 동지임에 아서는 질투를 느낀다. 몬타넬리 신부가 떠남에 따라 신임 신부에게 아서는 젬마와 볼라의 관계로 인한 혼란스러움과 시기심을 고해(告解)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청년이탈리아그룹 내에서의 사정을 발설하게 된다.

 

그는 영문을 모른 채 체포되어 구속되고, 조직원과 활동내용을 토설하라는 지속되는 고문을 받지만 끝내 입을 다문다. 그럼에도 어느 날 석방되고, 그가 그룹원들을 토설하여 풀려 난 것으로 오해된다. 그로부터 고해를 받은 신부의 배신에 의한 조작임에도 이를 알지 못하는 젬마는 볼라와 동료들의 체포와 구속을 아서의 책임으로 오인하고 뺨을 올려 부치며 배반자로 낙인을 찍고 돌아선다. 아서는 돌아가기 싫은 이복형제들이 있는 집으로 귀가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몬타넬리임을 듣게 되고, 성스러움과 고귀함으로 흉측함을 은폐한 존재로서 단정해버린다. 그는 자신의 온 영혼을 차지했던 가톨릭과 사제집단, 신에 대한 신앙을 폐기한다.

 

연인으로부터 거절되고, 신뢰했던 사제에 대한 배신감으로 실의에 잠긴 아서는 자살로 가장하고 아르헨티나로 향하는 선박에 승선한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무일푼 청년을 기다리는 것은 온갖 압박과 폭력의 무한정한 노출이며, 노예보다 못한 지옥 생활로 점철된다. 부러진 팔과 얼굴을 수직으로 찢어놓은 상처, 뒤틀린 신체와 절름거리는 다리로 그는 13년 만에 귀환한다. 귀환은 저항조직을 비롯한 대중에 널리 알려진 풍자가로서 오스트리아에 붙어 권력횡포를 자행하는 예수회파에 대항하는 연합전선 구축에 효과적인 대항책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예수회파의 음모를 폭로하고, 민중을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팸플릿의 글을 쓸 유일한 대안으로 호명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일명 쇠파리 등에’, 펠리체 리바레즈가 되어 이탈리아 통일전선 조직의 비밀 협력자가 되어 피렌체로 귀환한다. 그가 쓰는 조롱과 풍자의 글에 대한 내부의 옹호와 비판이 갈등하지만, 대중적 지지로 폭넓게 수렴된다. 조직에는 미망인이 된 볼라 부인, 즉 젬마가 있다. 볼라 부인은 리바레즈를 아서로 인식하지 못한다. 거북하고 불쾌한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진하는 사고와 행동에 대해 긍정적 이해를 갖게 되고, 두 사람은 작은 이념적 갈등이 있지만 대의에 대한 공통의 목표를 위해 정치적 동행을 하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낼 수 없는 아서인 리바레즈, 오해로 빚어진 어린 날의 우정에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주어 자살하게 했다는 죄의식을 품고 있는 볼라 부인으로 불리는 젬마의 리바레즈에 대한 의혹과 내면적 갈등이 끊어질 듯한 실()처럼 연결되며, 봉기를 위한 연대가 이어진다. 이처럼 아서와 젬마의 고귀한 사랑으로의 이행과 더불어, 추기경이 되어 민중으로부터 유일하게 청렴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몬타넬리에 대한 아서의 증오와 연민, 그리움과 사랑의 치열한 갈등이 속과 성의 갈림길에서의 선택과 병행하며 종교와 혁명의 가치의 통합을 통한 참됨에 대한 격렬한 사유가 흐른다.

 

그런데 이 소설의 위대함은 조롱과 독설, 부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숭고함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지는 점이랄 수 있다. 소설은 비극으로 맺지만 결코 비극이 아닌, 오랜 생의 격전 끝에 맞이하는 안식처럼 평온이 독자의 정신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감상글의 모두에 인용한 추기경 몬타넬리의 민중을 향한 음성은 다분히 중의적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을 신의 선택을 통해 내어 놓아야 했던 성인(聖人)의 피의 울부짖음이다. 그 피를 들이켜라, 기독교인들아...., 그 피를 들이켜라, 너희 모든 사람들아! 그 피는 너희들의 것이 아니더냐? 너희를 위해 붉은 핏물이 풀밭에 흐르고 있지 아니 하냐, (中略) 식인종들아..., 찢겨진 살을 씹어 삼키려므나.(394)“

 

민중을 위해 아버지로서 자식을 희생제물로 내어준, 추기경 몬타넬리의 통한의 외침이다. 그는 자신의 파멸로 어리석은 민중, 압제 권력에 살과 피를 내어 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이었으리라. 그럼에도 그는 그럼으로써 신을 배신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소설의 마지막을 이루는 3아버지와 아들7,8 챕터의 아서와 몬타넬리의 대화와 아서를 잃은 몬타넬리의 민중을 향한, 그리고 신을 향한 목소리는 핏 멍울이 되어 독자의 가슴에 맺힌다. 아마 소설을 관류하는 주제는 고뇌와 투쟁을 통해 드러나는 영혼의 광채 그것일 게다. 그 고독하고 격정으로 충만했던 한 인간의 삶에 감응하며, 나는 여전히 작은 빛조차 꿈꾸지 않았던 열정 없음의 그 수치심에 몸을 떤다. 때문인지 철지난 로맨티시즘에 자꾸 감정이 이끌리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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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 모든 파도는 비밀을 품고 있다 Short Story Collection 1
남궁진 엮음, 아서 코난 도일 원작 / 센텐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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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가 활약하는 범죄미스터리에 익숙한 독자에게 광활한 대양(大洋)의 고립된 선상(船上)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그 낯섦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세심한 과학적 추리의 탐정물 작가인 코난 도일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다. 지상의 법질서와 문명적 조건과 인간의 시선이 쉽사리 차단되는 선상 사건이라는 제약은 인간지성을 새롭게 해독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여섯 편의 선상 이야기와 18세기 악명을 떨치던 해적선장 샤키에 관한 네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신비 또는 초자연적이라는 모호한 언어 뒤에 감추어진 실체를 밝히거나, 엿들은 이야기의 외향만으로 두려움과 적의를 갖는 인간의 연약한 상상력이 몰고 온 해프닝, 금융 사기꾼을 응징하기 위한 한바탕 강도 놀이의 유쾌함과 넉넉한 우의(友誼), 얼어붙은 해양에서의 고립이 가져오는 두려움과 이때 인간이 장악당하는 미신을 배경으로 연인에 대한 그리움, 사랑 한 편을 그려내기도 한다. 어느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세간의 풍문으로 떠도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풀어헤쳐 이성의 세계, 윤리의 세계를 펼치려 했던 듯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서 코난 도일은 여전히 과학적 이성의 계몽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단편 줄무늬 상자를 재밌게 읽었는데, 부러진 돗대, 생명의 징표가 없는 떠도는 함선을 발견한 선장은 이등 항해사와 함께 낯 선 배에 접근하고, 날카롭고 무거운 무기로 머리를 맞아 사망한 듯한 한 선원의 사체를 발견한다. 베에서 살인이 있었으리라 추정되고, 그들은 배 안에서 선적된 물품 목록과 함께 가치 있어 보이는 보물 상자들을 찾아 자신들의 함선으로 옮긴다. 이때 일등 항해사는 나서서 높은 가치의 보물이 들어 있을 것이라며 상자의 개봉을 제안하지만 이 상자를 절대 열지 마십시오.”라는 경고 문구가 그들의 행위를 멈추게 한다.

 

일확천금에 대한 선원들의 보상 심리는 상자의 개봉을 유혹한다. 선장은 이 상자에 권리를 가진 소유자에게 전달 할 때까지 임의 개봉을 금지하고 상자를 보관해 둔다. 호기심과 욕망은 인간의 행위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 일등 항해사는 밤에 몰래 상자를 열어보려다 사망한다. 조난되었던 배에서 발견되었던 사체와 동일한 모습을 한 채 죽은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려 저주스런 물건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신이시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저 지옥 같은 상자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온갖 추정 끝에 선장과 이등항해사, 목수 세 사람은 상자를 조심스레 연다. 텅 빈 공간의 한 끝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황금 촛대가 있다. 그들은 보물을 보호하기 위한 강철 가시가 야생동물처럼 튀어나와 덮치는 모양을 바라본다. 부당하게 얻은 이익을 보존하기 위한 살인 장치, 수많은 인간들이 탐욕으로 그 기술의 희생자가 되었다. 탐한 물건을 보존하기 위한 흉측스러운 살인 장치, 현대 기술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그침 없는 호기심과 탐욕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 아닐까?

 

단편 폴스타호의 선장은 선원들의 욕망과 달리 얼음이 뱃길을 점진적으로 막아 귀환을 어렵게 할 수 있는 북위 81도의 얼음 바다에서 신속하게 이동하기는커녕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선장의 느긋함 속에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선원들의 두려움과 이로 인한 환영과 환청, 그리고 미신의 세계에 붙들려가는 상황을 아름다움과 긴장감을 교차시키며 독자를 흡입한다. 신비로움에 휩싸인 선장 니콜라스 크레기는 모비딕의 에이허브를 떠올리게 하고, 바람과 얼음, 유령과 더불어 형태를 알 수 없는 극심한 고요함으로 독자의 시선을 꽉 붙들어 맨다.

 

푸르지만 상기된 밝은 미소를 띤 모습으로 얼어붙은 채 설원 위에 누워있는 선장의 발견은 그가 애처롭게 찾던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마침내 유령이 되어 그에게 입 맞추었음을 상상케 한다. 어둡고 고립된 선상 이야기와 사랑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인 한 영혼의 이야기가 매혹적으로 교차하는 이야기다. 사랑은 이성을 벗어난 것일 게다. 선장의 동행자인 의사는 더 이상 유령을 이야기하는 선원들의 의견을 비웃지 않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코난 도일은 다양한 분야에 사회적 관심과 책임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조셉 하바쿡 제프슨의 성명서는 위도 38도에서 발견된 버려진 선박과 실종된 선원에 대한 미스터리를 생존자로서 증언하는 기록을 하고 있는데, 유색 인종에 대한 극심한 차별과 폭력, 죽음에 대한 반발이 야기한 사건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작은 정사각형 상자는 영국의 아일랜드 통치에 반대하는 페니안 단원에 대한 팽배한 영국인들의 두려움이 한낱 비둘기 비행의 특별한 경기를 선박 폭파를 하려는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어리석음을 그리고 있다. 구체적으로 아일랜드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국인들에게 잠재된 피해의식이라는 망상을 비판하려는 작품이리라.

 

아무튼 내겐 코난 도일이라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확장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작품집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의 후반부를 구성하는 해적 샤키 선장에 관한 네 편은 18세기 시대가 낳은 사악함을 상징하는 작가의 당대에 대한 비유적 비판인 것 같다. 품위 없는 천박한 영국 개들!(Perros! Perros Ingleses! Lepero, Lepero)라고 영국 해적들을 향해 외치는 스페인 처녀의 저주의 웅변처럼 샤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샤키라는 인물의 해적 연대기라 할 네 편의 단편은 계략과 어리석음, 교활함과 잔악성이 교대로 흐르며, 당대 영국인의 의식을 채우고 있던 약탈경제에 대한 일침이 아니었을까 싶다. 탐정물의 작가만이 아닌 시대의 자기반성에도 시선을 기울였던 또 다른 측면의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선상에 감춰진 비밀들은 어쩌면 시대가 은폐한 추오의 드러냄을 향한 의지 아니었을까? 그래, 모든 파도는 비밀을 품고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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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 살인자의 성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5
페르난도 바예호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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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80~1990년대의 부패하고 범죄 집단화된 국가인 콜롬비아를 배경으로 한 절망적이고 자조적인 외침이다. 그런데, 저 먼 남미대륙 한 나라의, 그것도 30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줄 수 있는가라는 볼 멘 불평의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역사는 그 모습을 변조해서 반복된다. 1930년대 나치의 파시즘이 21세기 이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콜롬비아의 증오가 꼬리를 물고 영속되듯, 이 땅에서도 그것을 빼닮은 듯 범죄 집단화하는 국가권력의 양태가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다.

 


마약 밀매조직이 곧 정부였으며, 그 쓰레기들이 국가 행정과 공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이에 영합한 오래된 부패조직인 관료들은 자기 주머니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그 구성원인 시민이라는 존재들의 삶 또한 무지막지하고 극악무도한 패악질을 닮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그 짓을 흉내 내야만 생존의 여지가 있었으니 말이다. 화자(話者)는 생존해 있는 마지막 문법 학자로 자처 혹은 추정하는 페르난도(작가의 분신)라는 인물이며, 어느 검사에게 조국 콜롬비아에서의 자기 행적을 술회하는 형식을 하고 있다.

 

청부 살인자(sicario)란 위탁받아 살인하는 아주 젊은 청년이에요

심지어 어린아일 때도 있어요.” -12

 

지구상에서 가장 범죄가 잦은 나라, 증오와 원한의 수도, 메데인은 재앙의 얼굴을 하고 있다. 법은 불()처벌이 원칙이고, 범죄자이면서 처벌받지 않은 첫 번째 인간이 대통령인 나라, 이 시간에 그는 아마도 나라건 일터건 모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있을거야”(27). 이 낯설지 않은 익숙한 문장이 이 소설을 더욱 열중하여 읽게 한다. 메데인에는 150개의 성당이 있다. 청부 살인자들이 실수하지 않게 해달라고 성모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총을 쏠 때 목표물에 정확하게 명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많은 성당, 범죄의 일상성만큼이나 즐비한 성당의 실존은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죽음인 나라에 맞춤처럼 보인다.

 

어디를 걷거나 어떠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더라도 죽음은 삶처럼 따라붙는 곳, 그 누구도 결백하지 않은 인간쓰레기들, 찌꺼기들만이 있는 나라,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는 곳이다. 죽이려는 열망과 재생하고 번식하려는 분노가 서로 경쟁하는 곳, 열두 살이 되면 범죄의 온상지인 코무나의 아이들은 늙은이와 다름없어진다. 살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지만 사회는 점차 유대감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해지고 누덕누덕 기운 침대보처럼 되어버린 도시, 소설은 온통 총알을 박아버리는 장면의 연속이다.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가난의 고통과 벌이의 고됨으로부터 해방을 주기 위해 서로 서로 죽음을 공연한다.

 

택시의 라디오에서는 공공의 젖이나 빨면서 나라의 돈을 빼앗아가는 엿 같은 관리들의 의미 없는 발표문이나 마약 밀매자들의 거슬리는 바나예토 음악이 틀어져 있다. 죽음, 권총, 경찰, 안녕 개새끼야.” 재의 수요일 성 십자가를 그어주는 곳, ! 피할 수 없는 단호한 단 한발의 총알. 사체에 몰려드는 구경꾼들, 야비하고 천한 영혼 밑바닥부터 말 할 수 없이 은밀하게 용솟음치는 기쁨을 어쩔 줄 몰라하는 선천적이고 만성적 비열함을 가진 군중들. 거짓말과 도둑질을 일삼는 가장 비열한 버러지들이 되어버린 시민이란 것들. 뉴스도 더는 새롭지 않다. 단지 죽음의 숫자가 오늘과 내일 조금씩 다를 뿐. 당국이라 말할 수 있는 게 없고, 단지 도둑질하고 공공의 것을 약탈하는 사악한 권력만이..., 그래서 기도의 내용도 이렇다. 이 삶에서 이미 지옥의 악몽을 겪었고, 그것도 아주 충분히 겪었으니, 영원한 저주에서 저를 구하소서. 이웃과 함께, 아멘.”

 

훔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둑맞지 않기 위해 피를 흘리며 지켜낸 곳.

주님, 그토록 이상한 생각에서 구하시고 보호하소서.” -89

 

소비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지독한 약탈자본주의가 시대를 휩쓸면서 이에 도취된 인간들은 타인으로부터 탈취를 영속화한다. 빼앗기 위해 죽이고, 그를 다시 찾아오기 위해 죽이고, 이 반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의 향연은 계속된다. 권력이 곧 불의(不義)한 조직인 세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니 수출할 것도 없고 오직 하얀 코카인 가루에 매달려 있다. 자동차도, 가전제품도, 명품 브랜드 옷과 가방도, 모든 것이 마약에 의존해 있는 세계, 마약 밀매 영역다툼으로 반복되는 매일의 죽음과 이 죽음을 괴로워하는 사회를 먹이로 먹고사는 기자라는 것들까지, 어느 한 구석도 악취나는 부패에 오염되지 않은 영역이 없는 곳이 소설 전반을 그칠 줄 모르고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럼에도 개들이 짖는 소리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면서 자기들이 더 낫다고 목청껏 소리치고 있는 형국이란 가히 저질 코미디 이상의 촌극이라 할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몰락하는 광경, 인간 군상의 저열한 추락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나 특출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주가조작, 부동산 투기를 위한 국토계획의 자의적 변경, 정적 살해를 위한 공권력의 사적 남용, 하다못해 마약밀매의 개입 징후까지, 이 소설의 극단적 양상들이 결코 먼 나라의 지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에 절로 전율케 된다.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고, 갈라치기와 적대로 시민 분열을 초래하며, 역사의 부정과 부역자들의 만행이 뻐젓이 저질러지다 보면 아마도 이 사회도 그간 쌓아온 질서와 정신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약탈자와 파렴치범들이 행세하며 처벌받지 않는 곳인데, 그 누구인들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겠는가? 사회는 순간 급속하게 저 지옥의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이 소설은 시종 욕하면서 빠져드는 작품일 것이다. 그 역겨움과 비열함과 악랄함, 그리고 그 어떤 사회적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래서 죽음은 늘 방치되고, 살인자는 더 이상 추적되지 않는 세계, 어른이 되기 전에 청부 살인자가 되어 또 다른 청부 살인자에 의해 죽어가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세계, 인간임에 대한 불명예와 치욕이 넘쳐흐른다. 왜곡된 현실을 더 왜곡하여 보려고 저 무도한 머저리는 마약밀매에 개입한 것인가? 아무튼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심사가 그리 편하지 않았다. 다만 서사적 힘은 가히 독보적이고 치명적일 만큼 흡입력이 뛰어나다, 페르난도 바예호는 라틴 아메리카의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라고 한다. 한 사회가 한번 폭력의 굴레에 갇히기 시작하면 그것을 걷어내는 데는 엄청난 사회적 희생을 필요로 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이미 정치검찰들에 의해 폭력의 굴레에 갇히기 시작했다. 아마 이것을 이전의 민주사회로 회복하는 데 우리사회는 엄청난 곤혹이라는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정치인 혹은 관료는 본질상 비천하고 악한 놈들이야 .(...) 절대로 그들이 순진하다고, 죄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하지 마. 그게 바로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거야.”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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