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 모든 파도는 비밀을 품고 있다 Short Story Collection 1
남궁진 엮음, 아서 코난 도일 원작 / 센텐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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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가 활약하는 범죄미스터리에 익숙한 독자에게 광활한 대양(大洋)의 고립된 선상(船上)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그 낯섦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세심한 과학적 추리의 탐정물 작가인 코난 도일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다. 지상의 법질서와 문명적 조건과 인간의 시선이 쉽사리 차단되는 선상 사건이라는 제약은 인간지성을 새롭게 해독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여섯 편의 선상 이야기와 18세기 악명을 떨치던 해적선장 샤키에 관한 네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신비 또는 초자연적이라는 모호한 언어 뒤에 감추어진 실체를 밝히거나, 엿들은 이야기의 외향만으로 두려움과 적의를 갖는 인간의 연약한 상상력이 몰고 온 해프닝, 금융 사기꾼을 응징하기 위한 한바탕 강도 놀이의 유쾌함과 넉넉한 우의(友誼), 얼어붙은 해양에서의 고립이 가져오는 두려움과 이때 인간이 장악당하는 미신을 배경으로 연인에 대한 그리움, 사랑 한 편을 그려내기도 한다. 어느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세간의 풍문으로 떠도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풀어헤쳐 이성의 세계, 윤리의 세계를 펼치려 했던 듯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서 코난 도일은 여전히 과학적 이성의 계몽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단편 줄무늬 상자를 재밌게 읽었는데, 부러진 돗대, 생명의 징표가 없는 떠도는 함선을 발견한 선장은 이등 항해사와 함께 낯 선 배에 접근하고, 날카롭고 무거운 무기로 머리를 맞아 사망한 듯한 한 선원의 사체를 발견한다. 베에서 살인이 있었으리라 추정되고, 그들은 배 안에서 선적된 물품 목록과 함께 가치 있어 보이는 보물 상자들을 찾아 자신들의 함선으로 옮긴다. 이때 일등 항해사는 나서서 높은 가치의 보물이 들어 있을 것이라며 상자의 개봉을 제안하지만 이 상자를 절대 열지 마십시오.”라는 경고 문구가 그들의 행위를 멈추게 한다.

 

일확천금에 대한 선원들의 보상 심리는 상자의 개봉을 유혹한다. 선장은 이 상자에 권리를 가진 소유자에게 전달 할 때까지 임의 개봉을 금지하고 상자를 보관해 둔다. 호기심과 욕망은 인간의 행위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 일등 항해사는 밤에 몰래 상자를 열어보려다 사망한다. 조난되었던 배에서 발견되었던 사체와 동일한 모습을 한 채 죽은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려 저주스런 물건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신이시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저 지옥 같은 상자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온갖 추정 끝에 선장과 이등항해사, 목수 세 사람은 상자를 조심스레 연다. 텅 빈 공간의 한 끝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황금 촛대가 있다. 그들은 보물을 보호하기 위한 강철 가시가 야생동물처럼 튀어나와 덮치는 모양을 바라본다. 부당하게 얻은 이익을 보존하기 위한 살인 장치, 수많은 인간들이 탐욕으로 그 기술의 희생자가 되었다. 탐한 물건을 보존하기 위한 흉측스러운 살인 장치, 현대 기술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그침 없는 호기심과 탐욕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 아닐까?

 

단편 폴스타호의 선장은 선원들의 욕망과 달리 얼음이 뱃길을 점진적으로 막아 귀환을 어렵게 할 수 있는 북위 81도의 얼음 바다에서 신속하게 이동하기는커녕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선장의 느긋함 속에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선원들의 두려움과 이로 인한 환영과 환청, 그리고 미신의 세계에 붙들려가는 상황을 아름다움과 긴장감을 교차시키며 독자를 흡입한다. 신비로움에 휩싸인 선장 니콜라스 크레기는 모비딕의 에이허브를 떠올리게 하고, 바람과 얼음, 유령과 더불어 형태를 알 수 없는 극심한 고요함으로 독자의 시선을 꽉 붙들어 맨다.

 

푸르지만 상기된 밝은 미소를 띤 모습으로 얼어붙은 채 설원 위에 누워있는 선장의 발견은 그가 애처롭게 찾던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마침내 유령이 되어 그에게 입 맞추었음을 상상케 한다. 어둡고 고립된 선상 이야기와 사랑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인 한 영혼의 이야기가 매혹적으로 교차하는 이야기다. 사랑은 이성을 벗어난 것일 게다. 선장의 동행자인 의사는 더 이상 유령을 이야기하는 선원들의 의견을 비웃지 않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코난 도일은 다양한 분야에 사회적 관심과 책임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조셉 하바쿡 제프슨의 성명서는 위도 38도에서 발견된 버려진 선박과 실종된 선원에 대한 미스터리를 생존자로서 증언하는 기록을 하고 있는데, 유색 인종에 대한 극심한 차별과 폭력, 죽음에 대한 반발이 야기한 사건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작은 정사각형 상자는 영국의 아일랜드 통치에 반대하는 페니안 단원에 대한 팽배한 영국인들의 두려움이 한낱 비둘기 비행의 특별한 경기를 선박 폭파를 하려는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어리석음을 그리고 있다. 구체적으로 아일랜드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국인들에게 잠재된 피해의식이라는 망상을 비판하려는 작품이리라.

 

아무튼 내겐 코난 도일이라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확장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작품집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의 후반부를 구성하는 해적 샤키 선장에 관한 네 편은 18세기 시대가 낳은 사악함을 상징하는 작가의 당대에 대한 비유적 비판인 것 같다. 품위 없는 천박한 영국 개들!(Perros! Perros Ingleses! Lepero, Lepero)라고 영국 해적들을 향해 외치는 스페인 처녀의 저주의 웅변처럼 샤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샤키라는 인물의 해적 연대기라 할 네 편의 단편은 계략과 어리석음, 교활함과 잔악성이 교대로 흐르며, 당대 영국인의 의식을 채우고 있던 약탈경제에 대한 일침이 아니었을까 싶다. 탐정물의 작가만이 아닌 시대의 자기반성에도 시선을 기울였던 또 다른 측면의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선상에 감춰진 비밀들은 어쩌면 시대가 은폐한 추오의 드러냄을 향한 의지 아니었을까? 그래, 모든 파도는 비밀을 품고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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