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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혁명 - 죽음의 체제에 맞서는 새로운 저항들의 의미
에바 폰 레데커 지음, 임보라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평점 :
삶의 형식으로서의 자본주의 비판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계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먹고 잠자고 가족을 보호하고 자손을 양육하는데 요구되는 재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고용주를 위한 노동을 하여야만 하고, 자신의 상품가치를 유지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재투자와 재생산의 노력을 지속하며, 경쟁자를 누르고 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려 몸부림을 치고, 낙오된 자들을 보며 당분간의 안전감을 느낀다. 그런가하면 미세먼지와 탄소 배출로 인한 대기오염과 기후 온난화로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묻지마 혐오 살인으로 여성과 소수자들이 살해되며, 상품가치가 떨어져 노동력을 값싸게 팔아야만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부담을 축소하거나 아예 없애버리면서 자기 주머니 채우기에 급급한 우익 파쇼들이 극성스럽게 인간을 갈라치기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아마 이런 식으로 죽 열거하자면 억만 겁이 지나도 모두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즉 우리 삶의 토대 전체를 명확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 삶의 토대를 상상해 낼 수 있어야 그것을 개선하든지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변화시키던지 할 문제들을 파악할 수 있기에 현실 세계의 실체를 규명해야만 한다. 이 책은 우리 삶의 토대를 훼손시킬 뿐 아니라 망가뜨리는 파괴를, 즉 우리 삶의 형식이 초래하는 전체적인 파괴를 증언하려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포괄적인 시나리오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재앙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방식으로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총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5장 <혁명>을 기점으로 앞의 4개장은 우리네 삶의 형식을 조건지운 토대에 내재된 위기들을 역설하고 있으며, 뒤 4개장은 이들 문제를 지닌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절로 떠오르는 트로이의 여성이 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았으며, 이 여성을 저주로 몰아 살해한 권력자들과 대중의 몽매함을 후세에 전하는 ‘카산드라’ 말이다. 철학자이자 지구상의 모든 포괄적 위기에 행동가로 나서는 저자 ‘에바 폰 레데커’가 현대의 카산드라로 환생하여 나섰다고 해도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2015년 스웨덴 의회 앞에서 지구 생태계에 가져 올 결과 목록을 낭송하면서 흐느끼는 어린 소녀 ‘그레타 툰베리’의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다가오는 지구적 재앙에 대한 무방비와 무감한 모든 인간들을 향한 호소,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망가진 삶의 형식을 바꿀 수 있다고, 우리들의 행동 양식에 대한 믿음을 향한 외침이다. 이 외침을 듣고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는 어쩌면 절로 방향이 설 것이다. 때문에 책의 전반 부 4개장(章) 만으로도 이 책은 소임을 다한 것이다. 후반부 4개장은 그 대안의 모색이니 천천히 이 세계 삶의 구성원인 각자가 실천의 가이드로 삼으면 족할 것이다.
내 삶의 형식이 된, 이 세계를 살아가는 내면화된 인식이란 무엇일까? 카산드라인 에바는 크게 네 범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는 재산의 지배이다. ‘사유재산제’,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그것으로 할 수 있다.”는 절대적 사물지배의 소유형태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근대화의 산물인데, 이러한 생각은 이전에는 없었던 원리다. 이것의 등장부터가 교활성과 폭력성을 동반한 것인데, 자유와 평등을 이름으로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교활한 위선이고, 들판과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토지와 농부를 갈라치기함으로써 극단적 방식으로 점유함으로써 사유재산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소유한 자가 원하는 대로 관리 처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예와 농노의 해방이라는 이름에서 ‘자유’가 정의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 자산가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존재,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 천명되었다는 것은 발칙함이다. 실제 토지에서 뿌리뽑혀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서 자유를 행하라고 하였으니, 무산 계급은 살기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 되는 존재로, 다시 말해 자기 노동력을 고용주에게 팔아넘기는 시간의 속박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노예가 되어야 했으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확보할 대상이 없었다는 말이다. 즉각적인 자유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너는 네 자신의 주인”이라는 굴레를 씌워 자유를 표방했으니 가히 공허한 개념이요, 부르주아의 말잔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사유재산은 물질적 재산을 손에 넣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지배력을 가졌다는 의미로써 인식되는 지점이다. 21세기 오늘에 이르는 근대 400년간은 이것이 인간에게 내면화되는 시간이었으며, 이 개념은 모든 인간들의 삶의 형식이 되었다. 이 내면화의 과정이 그저 순일(純一)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가부장적 혼인법과 종교재판을 통한 남성의지에 반하는 여성 사냥, 식민지 정복을 통한 피부색이라는 상표화(흑색)된 사유재산 표시로 사물 지배의 원칙이 강화되는 역사였다. 즉 모든 인간의 완전하고 훼손되지 않은 자기 소유의 합법적 층위에서 보호하는 법제의 역사를 강화하며 뼛속 깊이 내면화시켜왔다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은 이러한 모범과 계급들을 정체성으로 내면화했다. 그럼으로써 자기 소유의 경계를 확립했으며, 이것은 다시금 등급화된 차별 의식인 ‘환상 소유’라는 맹목적 지배 욕구로 각인 되었다. 환상소유란 깔보기 위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안전감을 지키기 위해 소외시킨 언제든 지배 가능한 물질적(노동력 포함) 대상을 가리킨다. ‘사유재산’의 승인이라는 이 중립적인 언어처럼 보이는 개념의 내면화란 이처럼 실로 엄청난 의미를 품고 있는 말이다. 이 개념에서 타자에 대한 비밀스러운 폭력의 욕망과 모든 대상의 사물화를 통한 지배 욕구, 지구 온난화라는 생태학적 버전의 사물지배욕이 출현하는 것이다. 독일의 지하철에서 구타당하던 한국인에게 “그래, 왜 도망가지 않는 거야?”, “다른 곳에 살았다면 이런 일이 없을 거 아냐” 라는 말에 담긴 의미에서 사유재산의 물적 지배와 환상 소유의 개념이 얼룩져 있음을 우리는 읽게 된다.
두 번째는 모든 대상의 상품화다.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란 “인간을 형상 없는 대중으로 갈아버리는 ‘악마의 맷돌’이다.”라고 말했다. 이건 은유가 아니다. 영국은 라이프치히, 워털루, 크리미아의 전쟁터에서 뼈를 캐고, 시칠리의 지하 묘지에 쌓인 여러 세대의 뼈를 빻아 분말가루로 포장, 운반 가능한 상품으로 변형하여 판매, 이윤을 얻었다. 인위적으로 합성되지 않는 잎, 뿌리, 골격구조의 필수요소인 인(P)을 얻기위해 뼈를 가는 공장이 1800년대 초부터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 불경스러움은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에서 쌓은 잔해더미에 비하면 오히려 무해한 것에 불과하다. 상품이란 폐기된 잔여로부터 분리된 생산물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분리된 잔여물, 배기가스, 포장재는 버려지며 주인 없이 남겨진다. 우리는 상품과 폐기물이라는 이 분리의 개념을 또한 내면화했다.
이 말 또한 무시무시한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 상품화란 투자와 수익 사이의 평형만을 고려하는 철저한 이익개념의 언어이다. 해서 상품화의 폭풍으로 빚어지는 피해나 난파선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 않기에 미래에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한 인간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강제된 재산의 한 양태가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써버림으로써만 살아가야하는 물질적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완전히 탈락할 때까지 이웃과 경쟁한다.
“당신의 이웃을 제거하라!”가 표어가 된다. 영역 내 순위가 높을수록 제거 원칙에 따라 공개적 권력의 지위가 부여되고 안전하기에 기를 쓰고 경쟁한다. 이 상품화의 내면화에는 사유재산의 물적지배와 환상소유가 얽혀 미래가치에 배팅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미래가치가 무가치하다는 데 배팅하게 하거나, 약한 사람들을 향한 일정한 가해 속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이 우월감이 된다. 하다못해 TV 연애 프로그램조차 경쟁자를 제거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지만 너무도 익숙해서 그 내용이 시사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타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자신의 멸시를 피하는 것, 상품화는 이렇게 물질 지배와 타자 말살에의 의지 사이의 연관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상품의 가치란 것은 전체 사회적 맥락의 영향과는 아무런 관련도 맺지 못한다. 오직 물질적 속성으로 간주하기에 사물지배가 우리에게는 잘 인식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목표는 즉각적이며 경쟁으로 돌진해 나가는 이윤이다. 이 이윤이 있는 곳에 대량의 페기물이 남는다. 그러나 자본은 이 폐기물에 관심이 없다. 수많은 붕괴, 잔해, 무용함이 자본에 의해 어떻게 생산되고 은폐되는지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곳이 우리 삶의 토대를 형성하는 세계이다.
세 번째는 노동의 소진이다. 우리가 길을 걸으며 둘러보면 보이는 포석과 금속 대문, 플라스틱 창문 등은 석회공장, 크레인, 컴퓨터가 동원되었지만 인간의 손이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에는 만든 인간 손의 흔적이 아니라 브랜드 명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사실 그것들은 많은 손들이 염세 세정제, 석회 먼지, 손목 터널 증후군에 시달린 흔적이다. 거리 하나하나는 인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만들어 나 갈 수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렇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 우리의 많은 손들로 다르게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임금 노동을 통해 작업대 주인에게 상품을 넘긴다. 임금 노동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활동성을 더 이상 통제하는 주체가 아니다. 생산 과정과 방식은 개인의 이성이나 본능으로 제어할 수 없는 오직 고용주인 자본의 주인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품은 구매자의 요구나 생산의 비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이윤을 예측하는 회사의 투기가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들이 인간의 손을 노동력 착취에 연결시킨다. 인간은 섬세하게 분절된 마리오네트, 즉 사물이다. 해서 이윤은 이 사물의 삶과 죽음에 관심이 없으며, 단지 상품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는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렸다.
자기가 자신을 소유한다고 간주하는 법적 사실을 오늘 우리들은 의심하고 있지 않지만 노동자의 자기 소유권은 실은 분열되어 있다. 고용계약이 체결되는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자기 소유권은 이내 상품화된 노동자의 시간이 고용주의 소유로 넘어간다. 임금 노동이란 오직 고용주를 누구로 선택하는 가의 문제 이외에는 다른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는 자유이다. 실제로 현대 사회는 자본가에게만 온전히 자기 소유권을 부여하는 세계이다. 이러한 인간 상품화의 논리가 내면화된 것은 21세기 자본주의가 갑자기 발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근대라 부르는 16세기부터 시작되어 인간 모두에게 스며들어 본래부터 존재했던 당연한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를 근대사상의 시조로 받들며, 너도나도 그의 방법서설을 뒤적이지만 은폐된 것을 읽지 못한다. 그는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의 사유재산구조의 합리적 타당성을 옹호하는 이론을 제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시대를 지배하던 우주전체가 인간의 몸에 반영되어 있다는 중세 세계관은 방해가 되었으며, 이를 깨부수어야만 했다. “신체는 무생적이라는 ‘사물 지배의 도그마’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기존 인식을 부수는 것이어야 함을 그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데카르트는 영혼이 있을 수 없는 동물을 비롯한 신체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여야만 했으며, 해부학을 신설하고 해부극장을 열어 관객들 앞에서 시체를 파헤치며 몸을 소유하듯 구경거리로 삼았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사유재산이라는 추동력은 이렇게 세상 모든 존재의 사물화를 전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자본주의 기원을 열었다고 거칠게 주장해도 될 것이다.
사유재산의 형태를 갖추지 못할 것은 우주 자연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 가치 추출 기계만 작동하면 되었다, 가치 있는 것과 폐기물 분리의 상품화, 다시 말해 가치창출의 개념은 이렇게 모든 인간의 삶에 주입되었다. 가부장제와 물질지배의 상품화는 여성 노동의 실재성을 은폐하였는데, 여성을 가부장의 소유물로 만듦으로써 돌봄을 여성의 성취가 아니라 타고난 본성으로 취급하는 터무니없는 언어의 정당화가 가능했다. 노동력의 활동성과 에너지의 충전을 위한 출산과 육아, 교육을 비롯한 제반 돌봄의 노동력을 자본은 공짜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자본은 이러한 노동력 착취의 토대에 서 있다.
이 모든 것은 환상 소유라는 현대 자본주의 핵심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이 환상소유는 모든 인간에게 뿌리깊게 내면화되어 있는데, 마땅히 거기 있어야 할 물질 자원으로 취급되는 것의 존재를 남겨두는 것이다, 이로부터 계급 분열의 이익인 우월주의라는 환상 소유가 작동한다. 정규직 노동자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 아파트 주민의 경비원을 향한 폭언과 폭력, 권력자의 실업자에 대한 모멸의 발언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로부터이다.
이것은 파쇼나 우익의 계급정치에 약탈의 역학을 조장하고 착취와 자본 종속의 논리를 강화한다. 이렇게 해서 하층 계급의 노동력은 항상 환상소유로 남아있게 된다. 이를 위해 교활한 관료주의는 사회법적 연대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압박하며 그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축소하거나 박탈해버리며, 윽박지른다. 실업 수당을 받는데 브랜드 옷을 입고 창구에 나타나다니!, “게으른 자들!, 사회적 기생충들!”, “너 스스로 책임져라!”라며 각자도생의 악을 질러댄다. 그럼으로써 환상소유의 대상을 항구적으로 남겨두어 멍청한 우월감을 지속시키려 한다. 폐기(廢棄)하면 그뿐이다, 상품의 논리다. 폐기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 까닭이다.
삶의 형식을 지배하는 네 번째의 범주는 생명을 파괴하다이다. “대기 오염의 71퍼센트는 100개 기업에 책임이 있으며, 세계 인구의 가장 부유한 10퍼센트가 전체 탄소 배출의 절반을 배출한다”고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삶과 삶의 토대를 소진시킨다. 사유 재산은 무자비한 횡포를 부릴 수 있는 울타리를 세우고, 상품화는 자본을 풍요롭게 만들지만 독과 폐가스를 사방으로 흩뿌린다. 노동 또한 그 자체로도 소진되며, 우리는 전부 이처럼 지구 황폐화 속에 얽매여 있다. “실제적인 사물지배로서 자본주의는 우리 삶의 형식이 되었다. 우리에게 다른 형식의 삶은 없다. 아직 없다!”
저자는 공공의 관심사에 신경쓰지 않은 내면의 기원을 고대 기독교의 자기 영혼 구제에만 관심을 기울여왔던 자기 보전의 이기심에서 찾고 있지만, 구태여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그저 400년 전 16세기 근대 초기의 데카르트의 사유재산 정당화 논리로도 충분할 것이다. 사유재산의 정당화는 절대적 사물지배의 논리를 출현시켰고, 이는 삶의 전체적 맥락에 대한 감각을 배제하고 ‘나만의 세계’인 자기 재산에만 관심을 갖도록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오늘 대다수의 사람들은 명확하게 정의된 영역에서 의지를 집중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훈육되고 성장한다. 결국 울타리 너머의 세계는 자신의 일이 아니다. “오로지 나! 나! 나! 만을 외치게 한다.” 그런데 세상이 이런 식으로 흐르고 있을까?
청년들이 작동되어야할 공권력의 치안 외면 속에서 무수히 죽어갔을 때에도, 호우와 같은 재난으로 인한 인명의 희생에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순간의 호기심 충족 소재로 받아들이는 불감증, 공감 부재는 자본주의 속성 자체가 내재하는 사유재산과 분리의 정체성에 근인(根因)하는 것일 게다. 성공한 상품이라는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 사유재산이 아닌 것은 폐기물이며, 배기가스이고, 버려지는 포장재일 뿐, 상품에서 분리된 모든 것은 무효로 선언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손실을 고려하지 않기에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오늘을 사는 세계의 사람들은 이렇게 삶의 토대를 회복할 수 없는 상실감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어떠한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으며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실(인류의 종말)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저 계속 살아간다. (...) 우리는 자신을 하나의 물건으로 여기고, 작은 땅 한 평의 무제한 처분으로 자유를 측정한다.”고.
책은 5장 <혁명>을 정점으로 이러한 삶의 형식과 삶의 토대를 다르게 할 수 있음을 그 실천의 역사와 방식들, 사유들을 논의한다. 그것은 ‘더 이상은 안 된다(Ni una mas)’는 하나의 문장이 대변한다. 가부장제, 신자유주의, 수탈주의, 식민주의 질서의 무력화를 향한 저항이요, 다르게 살기의 시작이다. 우리의 삶의 형식이 된 자본주의 형식은 피로와 모멸감, 생태계의 파괴로 빚어지는 바이러스의 창궐이요, 거주지역의 침수며, 탄소가스와 플라스틱 알갱이로 그득한 지구이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 갈 것이지만, 악화된 삶의 토대에서 일 것이다. 미래의 후손들은 종말이 다가온 불가항력의 세계와 마주할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괜찮은 건가?
착취가 아니라 공유하는 것,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개방하는 것, 훨씬 더 멋있는 자유를 향한 연대의 약속, 서로 반영되는 욕구의 무한한 상호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다른 방식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 삶이 속해 있는 세계 자연은 모두의 공유임을 인식하는 길을 향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한 설득의 변들이 쉼 없이 지면을 채우고 있다. 어쩌면 이 파괴적인 자본주의라는 삶의 형식의 무수한 위기들을 읽으며, 우리는 파괴적이지 않은 다른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위한 스스로의 시작점을 이 책에서 찾거나 영감을 얻어 창조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손으로 이런 세상을 만들어냈으니, 이것을 다르게 변화시키는 것도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또 다른 400년을 위한 작은 변화의 행보를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우울하고도 끔찍한 현실 세계의 날카로운 비판서이지만 사랑과 용기를 주는 진지한 비전의 글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부활한 카산드라, 에마의 인류에게 보내는 사랑의 선언이며, 또 하나의 위대한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