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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덩컨의 영혼의 몸짓 - 진정한 자유는 내 안에 있다 ㅣ 이다의 이유 8
이사도라 덩컨 지음, 서나연 옮김 / 이다북스 / 2022년 5월
평점 :
절판
“미래의 무용은 인류 전체의 것이 되리라. (...)
그녀는 여성의 자유를 춤출 것이다. (...)
미래의 무용가, 그녀가 온다.
새로운 여성의 육체를 감싸는 자유로운 영혼이여.”
- 49, 50, 51쪽 발췌정리
한 인간이 시대정신이라 부르는 것, 세상이 너무도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돌파하고, 새로운 무엇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킨다는 것은 실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행보가 아닐 수 없다. 형식과 인위적 규칙들로 구성된 동작으로 표현되는 ‘발레’, 춤을 추어, 이것의 기교를 세련되고 능숙하게 구현해야만 시대의 지성들에게 인정받는 세계에서, 알려진 적 없는 새로운 표현을 내밀며 이것이 진정한 춤이라고 선언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춤, 무용 예술의 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의 전환이라는 인간의 정신 혁명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터이다.
책은 이 새로운 정신, 새로운 표현을 세계에 실현하려는 한 인간의 ‘힘의 의지’, 시대를 초월한 인류 예술을 향한 집념의 기록이라 할 것이다. 반감과 외면, 비난과 질시의 시선 속에서 인간사회의 그 오래된 믿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인간 정신의 올바른 반영이요!’ 라고 선언하는 것은 단지 용기를 뛰어넘는 것 정도가 아니다. 덩컨은 자신의 무용가로서의 사명을 말하는 가운데 “내게는 의지가 있다.”고 천명한다. 이 의지는 인간 “개체 안에 응축된 움직임”이며, “춤은 이 의지의 자연스런 표현”이라고 부연(敷衍)한다. 어쩌면 덩컨은 이 문장을 쓸 때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이미 체화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덩컨은 단지 춤추는 여성 무용수의 차원을 넘어선다.
덩컨의 야망은 미국의 정신을 담아낼 진정한 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으며, 거대한 대륙을 개척하던 불굴의 용기, 하늘 높이 머리를 치켜들고 위대한 생명의 진동을 담아대는 아름다움과 힘의 춤을 꿈꾸었다. 덩컨에게 “스커트와 타이츠 안에서 춤추는 일그러진 근육, 근육 안에 변형된 골격이라는 몸에 무리한 변형을 강요하는(39쪽)” 발레, 여성의 몸을 옥죄는 기성의 규칙에 대한 혐오가 흐른다.
덩컨은 인간의 몸, 그 자연을 구속하는 감금과 위선의 표현은 “예술의 퇴보이자 살아있는 죽음일 뿐“이라 말한다. 자연의 본질과 조화하지 못하고 이를 파괴하는 경직된 육체를 해방시켜 유연성과 자유로운 영혼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그녀의 소명이 된다. 그녀에게 자연을 닮은,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인 춤, 자연(自然)인 무용은 곧 코르셋과 구두로 변형되고 조여진 허위와 위선으로부터의 탈출, 여성과 인간 정신의 해방이다.
덩컨은 이러한 정신을 고대 그리스의 힘의 응축과 힘의 전개를 자연으로부터 재현한 조각들, 신전들, 화병의 그림들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바다의 물결과 바람의 흐름과 대지의 변화, 그리고 건축과 회화, 조각의 선 및 형태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인간의 몸짓, 즉 자연의 파동이다. 그녀는 대체 어떤 예술이 작품을 위해서 자연을 고치는가? 라고 묻는다. 시인도, 화가도, 조각가도, 극작가도 어느 누구도 자연을 고치지 않는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변형시킨 발레를 비롯한 왈츠, 마르주카, 미뉴에트 등 기성의 춤들에 대한 비판이다. 음악과 춤추는 인간의 기형적 어긋남, 퇴색한 감상주의, 비굴함과 답답함에 얽매인 표현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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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덩컨은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작을 반복적으로설명한다. 생명의 고양감과 자연과 합일이라는 황홀경,힘에의 의지를 표현하는, 자연스럽게 육체를 통해 표현되는 최고의 춤 동작이었던 듯하다.1899년 92번째 Street Performance의 한 장면】
덩컨은 인간의 고유한 몸짓, 본성에 대응하는 자연 본질과의 조화를 위해 대지와 자신의 몸이 일체화되는 맨발의 춤을 춘다. 또한 춤은 육체인 자연의 동작이기에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의상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가벼운 한 겹의 천이면 족한 것이다. 그녀는 쓴다. “2천 년간 감금된 예술에 자유를 돌려주려 애써왔다.(85쪽)”고.
한편 덩컨의 글에는 그녀의 정신에 깊게 스며든 바그너와 니체의 영향이 곳곳에 드러나는데, 특히 디오니소스 축제의 황홀경에 빠진 영혼을 반영하는 육체의 표현처럼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제자들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요 참조 문헌으로 거듭 숙독해야 할 지표로 당부하기까지 한다. 지상의 세계보다 더 높은 영혼의 고양(高揚)을 향한 염원으로서 춤을, 진정한 예술로서의 무용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숭고한 인간 정신의 진지한 술회를 읽는 것은 어떤 숙연한 존경과 인류애를 느끼게 한다.
덩컨의 글은 감정적으로 정제되어 있어 어떤 수다스러운 사적 감정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되어 있어 그녀가 겪었던 삶의 고통을 제한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1913년 자신의 두 아이 디어드라와 패트릭을 자동차 추락사고로 잃는데, 아주 짧게 당시의 고통이 표현되고 있다. “두 아이를 잃은 이후로 내가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146쪽)” 그것은 “착란에 빠질 정도”로 “억제할 수 없는 고통”이었음을, 음악과 하나 된 영혼, 이로부터 탄생한 자신의 춤이 주는 위로를 제자들에게 말하는 글에서 흘리듯 언급할 뿐이다. 아이들의 아버지인 각기 다른 두 남자, 그리고 유일한 결혼 배우자였던 시인 예세닌의 자살 또한 그녀의 글에는 얼씬 거리지도 않는다. 다만 다음의 문장과 같이 지극히 담백한 언어로 순탄치 않았음을, 그녀의 조화에 대한 철학과 달리 불화하였음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평생 사랑과 예술만 알고 살아왔다. 그리고 종종 사랑은 예술을 파괴했다.
예술의 오만한 부름은 사랑에 비극적인 종지부를 찍곤 했다.
둘 사이에는 일치란 없으며, 끊임없는 전투만이 계속될 뿐이다.” -164쪽
자연의 고유한 언어, 자연과 합치하는 내적 충동의 춤을, 그 자유의 몸짓을 추구했던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지펴냈던 한 인간의 기록에서 진정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기꺼이 인생을 바칠 삶에 대한 소명의식을 생각게 된다. 성숙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의식하고 자각하는 아름다운 한 영혼의 응축된 의지를 거닐며 자유로운 춤, 그 숭고한 이상을 표현하는 동작을 그려본다. 아마도 책은 현대 무용을 기획하고 공연하는 이들에게 귀중한 사상적 바탕을 제공해 줄 것이겠지만, 나아가 시대정신을 깨부수고 과감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지표가 되어 줄 터이다. 진솔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읽는 것은 항상 기쁨이다. 우리를 에워싼 지식의 질서를 깨부수자, 그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