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엽서
안느 브레스트 지음, 이수진 옮김 / 사유와공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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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계통수에는 소화되지 못하고 우리가 계속해서 부담을 벗으려고 

노력하는 정신적 충격의 장소가 있다.” 

-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Alejandro Jodorowsky;1919~ )


우리들은 이야기를 왜 읽는가? 스토리 컨설턴트인 리사 크론(Lisa Cron)’Wired for Story에서 소설을 읽는 것은 힘겨운 현실로부터 이야기 속으로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탐색하기 위해 읽는다.’고 말했다. 이 말을 뜬금없이 서두에 하는 것은 안느 브레스트의 소설 우편엽서야 말로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현실사회가 인간 삶의 역사에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라거나 그럴 줄 몰랐어.’와 같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외면의 무지이거나 방관적 협조이다. 소설은 프랑스에 동화하려는 한 유대인 가족의 낙관적 욕망이 실제를 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초래된 가혹한 참상을 통해 인간 보편의 정서를 성찰하게 한다.

 

이 소설이 끝나는 후기 속에서 작가 안느는 이 책은 어머니의 조사(調査)와 글쓰기가 없었다면 쓰이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밝히고 있듯, 이 작품은 자전적이고 실화적인 20세기 일백년을 가로지르는 한 가문의 가족사라 할 수도 있다. 또한 이처럼 기록과 조사라는 사실성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객관적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독특한 방법을 읽을 수 있다. 때문에 소설에는 잘 알려진 문학과 예술인들의 글들과 기록된 사실로서의 이야기들이 양념처럼 이야기 속에 등장하여 역사적 상황을 입증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악착스러울 정도로 반()유대주의의 선봉에 섰던, 제멜바이스로 잘 알려진 루이 페르디낭 셀린 유대인은 85%의 찌꺼기와 15%의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던가, 그 아둔한 유대인 놈이 누구(프로이트를 지칭)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똥을 싸질러 놓았다.”며 상식을 벗어난 궤변으로 유대인종을 비방하는 글을 썼음을 드러냄으로써 당대(1930년대) 프랑스 내 유대인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분위기를 전하기도 하고, Suite Francaise(프랑스 조곡)의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수용소의 이송 동선으로 소설 속 유대인 가족인 노에미와 자크의 가스실 죽음의 여정을 겹치도록 해서 사실로서의 역사성을 부각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시인 르네 샤르의 레지스탕스로서의 적극적 저항 행위 속에서 독일 협력의 방관적 협조자였던 자연 예찬의 작가 장 지오노의 집 대문을 폭발시키는 일화가 그려지는가 하면, 그의 연인과 자손들이 라비노비치가() 생존자(미리얌-화자의 할머니)의 후손인 화자()와 연결됨으로써 프랑스 지성사적 인물들의 윤리적 현재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특히, 할아버지인 빈센트의 어머니와 변기(작품명 (Fountain))로 현대예술의 미에 대한 의문을 던졌던 '마르셀 뒤샹'의 내밀한 관계를 통해 레지스탕스 자금지원의 사실도 표면화하고 있다.

 


이야기는 표제처럼 익명의 우편엽서로부터 시작된다.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에브라임 라비노비치의 가족 네 명의 이름만이 적힌 엽서가 61년이 지난 2003년 화자의 어머니인 렐리아의 집에 배달된 것이다. 화자인 렐리아의 딸인 안(안느)은 자신을 뿌리까지 프랑스인이라 생각하는 유대인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이 프랑스 사회에 완벽하게 동화(同化)된 성공한 프랑스 중산층 부르주아 계층이라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굳이 유대인이라는 인종적 범주를 상기할 이유가 없으며, 살아가는 데 어떠한 불편도 없다고 느낀다. 엽서는 곧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실제 일상에서 균열과 충동을 일으킨다.

 

소설은 총 44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장은 너무도 읽기가 고통스러운 장이다. 에브라임 라비노비치, 즉 화자의 증조부를 중심으로 그의 연애사로부터 시작해서 출생지인 러시아를 떠나 리투아니아를 거쳐 프랑스로 이주해 자신과 자식들이 유대인으로서가 아니라 서구의 찬란한 자유의 빛을 마음껏 쬐며 성장하는 삶을 꿈꾼다. 적극적인 프랑스 국민이 되기 위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그의 귀화 신청을 거부한다. 프랑스 공적 사회는 그(유대인)를 향해 수많은 부정적 신호를 보낸다. 주변의 소리들은 유대인 축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음에도 그는 별거 아닌 호들갑으로 들리고, 자식들인 노에미와 자크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유대인을 모욕하는 행위로 고통받고 있음에도, 이 모든 건 파리로 쳐들어 온 독일 출신 유대인들 때문이야. 프랑스가 침범 당했다고 느낀 거지, 그래. 그게 맞아.”라고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타자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기 몽매함을 부인하고 나아가 정당화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에브라임은 고작 앞으로는 조용히 사는 게 좋겠어.”를 삶의 답변으로 내놓는다. 파리의 집을 피해, 별장으로 사용하던 포르주의 작은 마을로 거처를 옯긴다. 19393월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고, 194010월 폴란드를 침공하며, 친독 정부 비시정부가 제정한 유대인 신분법에 의해, 도청에 유대인 등록을 하면서도, 기만적인 독일의 노동자 구인 포스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까지 한다.

 

안 될 이유도 없지, 프랑스를 위해 우리가 몇 달 독일에서 일하는 게 귀화에 도움에 될지도 모르잖아? 우리의 노력,(...) 선의를 증명할 수 있을 거야.” 자기 욕망에 눈멀어 사실을 가리게 만들었을 때,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인데,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비참한 결과, 즉 자신의 아이들과 아내와 자신의 참혹한 죽음으로 뒤바뀐다. 안타까움과 미련할 만큼 우매한 한 인간의 동화의 열정이 죽음으로 대답하는 여정을 읽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이로서 소설의 중요한 탐색 중 하나가 끝났던 것 같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그런 정치적 일들은 나와 내 가족의 일상과는 관련이 없어.’, 과연 정치적 행위가 그 사회의 일원과 관련이 없을 수 있을까? 이 물음이 곧 답변이 될 것 같다. 안타까움과 미련할 만큼 어리석은 한 인간의 동화의 열정이 죽음으로 대답하는 여정을 읽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이로서 소설의 중요한 탐색 중 하나가 끝났던 것 같다.

 

그리곤 두 번째 탐색에 몰입했는데, 그것은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아무런 경험도 도출해내지 못하는 무능력의 문제일 것이다. 1925, 1950, 1985, 그리고 현재에 지속되는 유대인을 향한 동일한 의미를 지닌 행위와 언어의 위협과 폭력이다. ‘더러운 유대인이라며 날아오는 돌멩이들이고, 집 담 벽에 그려진 나치문양이며, 우리 집에서는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무심한 배타적 언어이다.

 

한편으론 독일 점령기간 중 일어난 부역과 밀고, 무관심의 양상들이 레지스탕스의 활동과 대비되어 인간들의 혐오스러운 광기들이 열거된다. 비시 정권이 독일군에 보내기 위해 프랑스 청년들을 비롯한 건강한 남자들을 강제 동원하려 할 때, 이에 저항하는 이들과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조장하고는 함정으로 유인해 독일군에 넘겨 돈을 버는 민족 배신자들과 밀고자들, 그리고 철저한 무관심으로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독일에 동조하는 신호를 보냈던 사람들을 펼쳐 놓는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전쟁과 점령 기간이 지나고 해방된 1945년 이후의 프랑스 사회의 책임 회피와 사실의 부인이라는 행위로 죽은 자들이 1996년에 이를 때까지 부정되어 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무관심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협력이 아닌가요?”, 역사적 사실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을 때, 이 무관심은 다시금 부정의 화살이 되어 되돌아온다. 오늘에도 여전히 반유대주의 정서는 사그라들 줄 모르고, 이젠 자신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거라 믿는 현실 부정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인식인지를 깨워댄다. 불행의 역사가 반복되는 건 이런 어리석은 믿음과 눈 먼 욕망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외세의 반복되는 침략에 거듭 무력하게 굴복하는 상황들도 이것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소설의 중심에는 물론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문제에 대한 고뇌어린 사유가 저변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한 인종이라는 개별성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 차별에 내재한 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밀하고 굴절된 타자에 대한 혐오의 감정은 마치 은밀한 성적욕망과 닮아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스티븐 소더버그감독의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아트 슈피겔만: 한 생존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정서적 유사성으로 화자인 안에게 떠오르기도 한다.

 

소설에는 아주 적절한 비유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안은 자신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조상들의 계통수를 그리게 되는데, 그녀의 그림에는 불가피하게 아우슈비츠라는 마을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증조부모 에브라임과 엠마가 그렇고, 스페인계 프랑스인과 결혼함으로써 유일하게 생존하게 된 할머니 미리얌을 제외한 그녀의 동생들인 노에미와 자크, 증조부모의 형제들, 외조부모와 그 후손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트로스티네츠 절멸 수용소등이 등장하는 것이다. 조상들의 계통수를 그려 제출하라는 과제를 본 학교 선생이 이후 다정함과 애정이란 애초에 없었다는 듯 어린 안에게 멸시를 보내는 것으로 현실의 상황을 애처롭게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이라는 단어에 은닉된 비밀스럽고 미스터리한 의미들, 이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낙인찍힌 정체성을 안은 이렇게 묘사한다. 마치 피부 아래에 있는 또 다른 피부 같아, 우리 이전에 존재했고, 우리를 초월하는, 우리보다 더 큰 역사의 피부라고. 안은 신분증을 포함한 지갑 일체를 잃어버려 재발급을 신청하려 했을 때, 프랑스인임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부모가 프랑스인인지를 증명 할 수 있어야 함을 요구했음을 쓰라리게 기억한다. 오늘의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 철저한 배제와 차별의 정서가 그들 사회에 동화하려는 이방인을 분리된 존재임을 각성시킨다. 만일 이러한 구별의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이 고통스러운 동화의 문제가 이렇게 계속해서 제기될 수 있었을까를 생각게 된다. 그리고 안은 이러한 감정이 “1942년 프랑스에 살았던 유대인 에브라임과 그 가족들이 느꼈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상기한다. ‘나는 프랑스인이야, 내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안주하는 순간 그들은 죽음의 소각장에 이르렀음을.

 

이 소설을 읽는데 나는 여느 작품들과 달리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야기 중 에브라임 라비노비치 가족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까지의 상황들과 그네들이 가스실에 밀려들어가 죽음에 이르는 기록의 여정을 읽는 데만 며칠이 걸렸기 때문인데, 안타까움과 이주와 탈출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자기 합리화라는 무지에 매몰되는 것이 미련해보였던 까닭이다. 정말 힘든 독서였다. 계속 읽어야 할지, 그만 두어야 할지, 읽어나가는 데 무수한 갈등을 겪었다. 결국 거대한 재앙으로서의 역사는 지속하여 증언되어야 한다는 것, 끊임없이 정의를 놓치는 단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일 게다.

 

우리의 역사도 일제 부역자 처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과거를 안고 있다, 또한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일정한 국민적 윤리기준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오늘 터무니없는 정치적 술책의 출현까지 빚어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근인(根因)에 역사적 무관심과 무지가 자리잡고 있음을 이 작품 또한 복기해내고 있다. 특히 나치의 선전부장 괴벨스의 유대인 혐오의 프로파간다나 수용소에서 발송된 친지들을 안심시키려는 내용들의 편지를 이용하여 잔혹성을 부인하는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왜곡된 주장, 이를 여론으로 세뇌하려는 조작 행위는 사실 그 동기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기에 가세한 담론 권력을 쥔 자들의 기회주의적 동조까지 우리들의 역사 인식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그 어느 때 보다 극성인 지금이다.

 

이 소설은 자신의 부모와 동생들을 죽음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화자의 할머니인 미리얌의 자기 생존을 위한 몸서리나는 일생을 추적하며, 역사의 기억을 자기 정체성 고유의 언어로 되새긴 기록물이라 해야 할 것 같다. 600쪽에 이르는 이야기의 분량만큼 다양한 감동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우편엽서에 적힌 네 사람의 이름은 기억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는 일생을 자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한 생존자의 마지막 메시지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거듭 기술해본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재앙의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홀로코스트라는 광기의 역사는 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매양 빠져들게 한다. 아마 인간 본성의 근저를 지속하여 자극하는 본질적 물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의 매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늘의 현실에 여전히 작동하는 위선의 실체를 다시금 깨우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해결되지 않는 것은 반복될 수밖에 없고 한 세대 혹은 몇 세대 이후의 후손 중의 누군가에게 도달하게 된다.”는 한 시인의 경고는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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