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의 역사를 말하는 책들을 읽다보면 역사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모멘트들을 발견하게 된다. 항시 무엇인가를 지키고자 하는, 또는 불변하는 정상(正常)이라 일컫는 것에서는 예외없이 반작용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발자크가 말했던가,  생리학은 병리학을 통해서 새로워지고 발전한다고. 세계에 병리적 현실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할 때 역사는 새로 쓰기를 시작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작금의 한국사회 현실은 바로 이러한 역사교체의 적절한 하나의 보기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은 한 점의 회화, 1812년 프랑스 화가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권력층의 충동적 본능과 야망이 낳은 비이성적 욕망의 극단에 대한 폭로이자 비판이었다.

 

나는 여기서 역사 교체 분수령이 되는 세칭 말세(末世) 현상을 읽었는데, 아마 21세기 현재의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사회의 주소가 이와 다르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 인간의 탐욕이 자초한 종말의 세계에 기술과학주의에 의해 가공된 기만적인 허구의 세계를 축조하고 제한없는 분노와 증언으로 오직 파괴와 죽음만이 실존을 가능케 하는 세계, 모데란을 읽고 있었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고, 생명의 참을 수 없는 충동적 표출이 가져온 파멸의 비극적 서사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반복되는 순환인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선악의 논쟁 따윈 이미 무의미한 언설이 되고, 오직 실존에 대한 사고 실험으로 일관한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이러한 폭력적 잔인성에 의존해야 하는 세계가 지금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라고 말하는 듯하다.

 

출처: 이광래 , 미술 철학사 1, 도판118,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


제리코호의 뗏목은 모래톱에 좌초한 프리깃함의 선원을 모두 태울 구명보트가 부족해 선상에 있는 나뭇조각으로 뗏목을 만들어 보트에 밧줄로 연결하고, 그것에 149명을 태운 것이다. 뗏목으로 인해 보트가 나아가지 못하자 밧줄을 끊어 뗏목 위의 149명은 표류하게 되었고. 구조되기까지 단 7일 만에 악의에 찬 동료 선원의 살해와 식인의 야수성으로 단 15명만이 살아있었다는 충격적 사건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공포와 절망, 그리고 광기로 채워진 그림은 당대의 난파된 인간성의 적나라한 폭로였을 것이다. 이 파멸적 인간 군상의 얘기는 200년 전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이러한 인간 현실 세계에 대한 자성과 비판은 시공을 초월하여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으며, 또한 지역을 불문하고 동시적이기도 했다.

 

인간의 사악한 본성, 그 비이성적인 욕망과 광기의 폭로와 경고는 세기를 거듭하면서도 여전히 오늘에도 무수히 읽히고 있는 고전(古典)이 그 실례일 것이다. 16세기 영국 헨리 8세의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지적하는 당대 영국사회 상류 지배계급의 파렴치와 야만성의 비판이나 18세기 독일의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가 묘사한 것도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 욕망의 광기 아니겠는가. 20세기 조지 오웰의 1984도 사실 이러한 인간성 말살의 세계에 대한 또 하나의 변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중엽부터 홍수처럼 배설된 문학작품들은 거의 모두 인간 세계에 만연한, 아니 만연함이 넘쳐 현실을 벗어난 환상과 가공의 세계로 넘어가 이 던적스러운 인간성을 떨어내려 몸부림치고들 있음을 본다.

 

이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에 여전히 목소리를 내고, 인간 본연에 대한 물음을 통한 자기 성찰의 사유를 촉구하는 문학과 미술 등 예술작품들이 그 영향력을 잃지 않는 까닭이다. 어쩌면 괴팍한 취향 아니냐고 시비를 삼을 지도 모르겠다. 고작 末世라니 라고 말이다. 우리는 지속하여 말세를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경고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동질과 동일의 반복이고, 그것은 차이와 다름에 대한 갈라치기고 차별과 분리, 계급이라는 이원화된 불평등의 고착이요, 야만과 폭력의 안주이며 승인일 것이다. 같음의 반복은 정체이고, 타락이며, 부패이고, 착취이며, 탐욕이자 폭력이다.


1790~1794년에 잇달아 발표한 순수의 노래:Songs of Innocence경험의 노래: Songs of Experience에서 이 세계에 대한 회의와 부정적 세계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영국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가 인간 타락의 근원을 대립을 강요해 온 이원론적 가치 체계임을 지적하였듯, 이 오래된 인간의 분리주의적 욕망은 환상적 세계에서나 그 개념 감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성의 부식과 마비로 인해 일어나는 오늘 한국사회에 진행되고 있는 극단적 상황은 아마 결코 새로운 인간세계의 현실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대안의 창조적 모색을 위해 함께 머리를 모아야 할 때인 것 같다.

 

나는 본질상 동일과 동질을 통한 기득적 권력의지의 항속화의 욕망을 위해 자기와 다른, 차이에 대해 억압과 구속을 정체성으로 하는 수구(守舊)주의자들에 대해 근원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자유와 해방을 삶의 조건으로 하는 인간의 태생적 본성을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그 동일성을 반복만 하려는 나르시시즘의 욕망에 역겨움을 느낀다. 끊임없는 자기회귀, 그 극한의 자기애에 대한 욕망은 타자를 보지 못하게 한다. 욕망의 본질이란 결핍이고 부족이다. 빼앗겨 상처받은 자들은 그 결핍으로부터 끊임없는 탈주를 시도하기 마련이고, 바로 그 시도의 역동적 동태성이 역사적 전환을 생산한다. 잃어버린 욕망의 억압과 구속에서 풀려나려는 자유와 해방의 추구가 거대한 새로운 흐름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탈주의 욕망, 문화적 불안정성과 영혼의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인간 세계를 간파한 흔치않은 철학적 사유의 화가인 오딜롱 르동을 나는 사랑한다. 19세기 산업사회화 된 프랑스의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피폐와 야합하여 무관심과 몽매성에 빠져들었던 것은 21세기 오늘의 인류 사회와 그리 다르지 않다. 부정(不淨)한 나르시시즘, 요즘 유행하는 언어로 나를 사랑하기는 사실 탈출구가 막힌 부패한 영혼의 망상적 헛소리처럼 들린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없는 라는 없는 것에서 대체 새로운 무엇이 발굴될 것이라는 것처럼 황당한 소리도 없을 것이다.

 

출처: 이광래, 미술 철학사 1, 도판 321, 오딜롱 르동 우는 거미, 1881


내가 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의 작품 우는 거미, 1881는 종()이나 생명의 일탈 같은 수구적 질서나 규범으로부터의 벗어남은 그 낯섦만큼이나 강렬하게 인식된다. 마치 카프카의 오드라데크(가장의 근심)나 갑충(변신)처럼 말이다. 즉 생리학의 지식이 병리학이라는 일탈로부터 얻어지듯, 그 어떤 인식론적 장애도 넘어서려는 초월적 욕구의 의지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르동을 신랄하게 공격했던 미라보나 불편해했던 졸라와 같은 기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자들의 비난이란, 역사라는 거대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보잘 것 없음이 보이듯, 우리는 역사의 조망 속에서 무엇이 인간이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다.

 

나는 권력 담론을 휘두르던 에밀 졸라의 당대 예술인들을 향한 자의적 비난의 목소리들에서 권위와 동일성을 강요하려는 타자에 대한 억압을 본다. 자연주의자임을 자처하며, 당대 노동자와 농민의 처절하고 참혹한 삶에 주목케 하려던 사실주의에 대한 잔혹한 말들이 얼마나 일방적 언어였는지, 그 자폐적 언어의 무자비한 사용에 반감을 지우지 못한다. 때문에 즉물주의(卽物主義)의 그 발가벗은 사실화들로 비난을 받았음에도 쿠르베의 반()부르주아적 그림들을 좋아한다. 파리 코뮌의 적극적 선봉자로서 민중의 고통을, 지배층의 위선과 기만의 폭로에 주저함이 없었던 인물로 나는 기억한다. 어쩌면 이렇듯 인류는 소수의 눈 밝은 이들의 말세에 대한 통각(痛覺), 그 경고의 메시지들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그 위기를 벗어나왔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 오늘의 세계는 더 이상 지역적으로 고립된 시공이 아니다. 세계 어느 한 귀퉁이에서 발생한 현상이나 사건도 곧 세계 전체의 관심사가 된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을 누려왔던 친일 반민주적 일군의 소수집단은 변태적 극우화, 아니 사대주의적이고 극단적인 권력과 재화의 욕망 집단임을 수치심을 잊은 채 광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비단 동아시아의 귀퉁이 작은 반도 국가의 현상만이 아니다. 지구촌 곳곳이 이러한 우경화된 탐욕의 정치 세계를 항해하고 있다. 일종의 말세(末世) 현상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말세에 대한 자각, 소수의 민감한 통찰자들은 역사 교체시기에 여지없이 등장해왔다. 그것이 특정한 한 인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거대한 조류처럼 예술과 문학, 철학 등 인문적 흐름으로부터였다. 물론 자연과학도 인간 계몽의 한 축이었으나 그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힘(반영)에 실려 왔다,

 

세계의 병리적 현상이 폭넓게 인류의 세계를 뒤덮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새로운 역사의 시대로 교체를 요구하는 역사적 순환주기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신권에 의한 1000년의 억압, 그리고 잠시의 소생시기인 르네상스, 다시 절대왕권에 의한 폭압, 인권과 평등의 시기, 또 다시 독재와 전체주의의 광기, 불안정한 평화, 오늘의 우경화된 광범위한 기술과학주의와 물질주의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화, 이제 무엇이 올 것인가? 우리들은 인간의 파멸적 본성을 무수히 보아왔다. 이것은 절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말세 현상을 직감할 때마다 선인들이 지적한 인간성의 본류가 변화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불과 10여년 만에 두 차례의 몽매한 선출권력을 탄핵하였으며, 다시 새로운 리더를 선출하는 시간이 당도했다. 헛된 이데올로기적 망상에 사로잡혀 증오에 완전히 먹혀버려 나락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낯설어 멀리하려 했지만 그 낯섦이 새로운 세계의 질서로 향하는 시발점이 되기 위해 머리를 맞댈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 말세의 예언이 결정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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