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딩의 여덟째 날
리루이 지음, 배도임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삼신할미의 사당이 마을을 내려다보는 중국의 한 촌락에 십자가의 첨탑을 높이 세운 성당의 오만한 계몽의 침략이란 상징적 충돌을 통해 20세기 전후 중국사회와 중국인들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 그것은 종교를 앞세운 서구제국주의의 근대화의 민얼굴과 여기에 대처하는 중국인들의 양가적인 양태들 속에서 부글거리는 선망과 질시와 좌절과 분노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 한국문학들이 카톨릭이라는 서양 종교의 박해라고 말하며 종교적 자유를 억압했다는 식의 편협한 관점에서 근대화,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인간의 삶 전반에 미치는 성찰이라는 역사 인식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각성케 된다.

 

‘장마딩’이란, 선교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온‘지오반니’라는 수사(사제)의 중국식 이름이고, 그의 신앙적 아버지인‘꼬르’주교의 애정의 산물이랄 수 있다. 이들에게 토속신앙으로 삼신할미를 모시는 중국인들은 한낱 우매한 이교도일 뿐이고, 그들의 사당은 하느님의 성전인 성당과 공존할 수 없는 우상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 소박한 동양인들은 서구의 물질문명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경외와 선망, 경계와 질시의 시선을 갖는다. 욕망을 자극하지만 선뜻 다가가기엔 왠지 불온한 무엇인 것이다.

 

소설은 이 두 경계가 부딪쳐 마침내 피와 죽음을 촉발하는 사건의 중심에 장마딩을 세운다. 그가 이교도들의 뭇매에 사망하지만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이란 의학적 생체의 회복에 불과하지만 주검과 동일한 몇 일간의 실신은 이교도의 핵심을 무너뜨리기에 더할 수 없는 명분이 된다. 이로 인해 마을 이교도의 핵심 인물이 참수되고, 그의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 왕석류(장왕)의 자기 속박은 집착과 광기, 그리고 원한과 복수라는 분노를 낳는다. 주교는 장마딩의 부활을 숨긴 채 토착신앙 말살 도모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의 광기는 삼신할미의 현영(現影)이 된다.

 

이것은‘의화단 사건’이라 불리는 1899년 중국 화북지역으로부터 확산된 반제국주의, 반기독교 농민투쟁이라는 무력적 배외(排外)운동이 왜 촉발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스냅사진들이 되어 그 단면들로 이어진다. 내쳐진 장마딩의 고난의 일정들, 의화단 일파들이 벌이는 강간과 폭력, 성당을 에워싼 분노한 농민들, 성당 마당에 누운 즐비한 사체들, 등등이 그러할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적 폭력, 분노한 농민의 저항으로서의 폭력이 충돌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과 서, 토착신앙과 기독교의 화해가 왕석류와 장마딩의 조우로 상징화된다.

 

진실의 속죄를 위해 찾아든 삼신할미 사당, 죽은 남편의 씨를 잉태하여야 한다는 여인의 광기어린 집착은 장마딩에게 참수된 남편의 환영을 덧씌운다. 그리곤 소설은 슬그머니 인간의 몸을 빌려 동서의 물질적 결합을 통한 융합을 그려낸다. 그러나 서양의 유일신 숭배 종교인 기독교는 결코 또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런 관용의 신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꽤나 이상적(理想的)이고 가능치 않은 낭만적 지점에 멈추었다는 인상을 준다. 게다가 장마딩이 죽음에 이르러 남긴 표제인‘여덟째 날’이 기독교의 신이 7일간 세상을 창조하고 난 다음의 날이라는 뜻에서 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 삶의 새로운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것이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한 엄숙한 승인으로서 근대화라는 이성의 맹목성을 거부하는 몸짓인지 끝내 해독하지 못하고 말았다.

 

또한 장마딩의 죽음에 덧씌운 인간의 절망이니 구원이니 하는 임의적인 환상이나, 후에 태어난 혼혈아들이 거룩한 화합이나 되는 냥, 무언가 숭고한 삶의 가치를 말하는 냥 하는 것은 어떤 유치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서구 제국주의의 선도부대로서의 기독교의 폭력성과 비굴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 동양의 현실을 수려한 문장으로 지펴낸 작품임에 이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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