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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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제까지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어떤 연대감, 마음의 고요한 파문을 일으키게 한다. 차곡차곡 우리 몸에 새겨진 수많은 세월의 사연들을 품고 있는 이해할 수 있고, 서로 토닥이며 들려주고 들을 수 있는 그런 애기들이며, 또한 우리의 삶 속에 분명 존재하고 있음에도 모두가 잠든 고즈넉한 깊은 밤에야 비로소 그 생생한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얘기들이기 때문일 터이다.

8편의 단편이 연작형태로 하나의 지향 - 아마 점점 잊혀져가고 상실된 인간의 보편적 감성을 깨우는 - 을 느끼게 하지만, 그 각각의 이야기들이 발산하는 색조와 형상은 몽롱하거나 때론 아련하고, 살짝 싫지 않은 열기를 지니기도 하며, 생의 연륜이 묻어나는 위트와 유머의 속 깊은 의미와 같이 저마다의 독특함으로 다채롭다.

 

소설의 배경은 지중해가 바라다 보이는 1 세기가 지난 이스라엘의 개척자 마을, ‘텔일란’이라는 가공의 마을이다. 어딘지 모를 쇠락(衰落)의 기운, 그리고 쇄도하는 변화의 경계에 선 왠지 모를 불분명한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그 분명치 못함,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던 삶의 정체들을 노련하게 보여주는 회화(繪畵)같은 이 작품에 한없이 빠져들게 된다.

 

이 마을을 처음으로 여는 「상속자」라는 작품에는 쇠약해진 노모와 함께 사는 중년의 남자가 있다. 노쇠한 어머니에 대한 부담과 자기 생의 설계와 연민으로 고민하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되고, 어린 조카의 보살핌이 자기 삶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는 여의사를 그린「친척」에서 정상의 외피 속에 감추어진 공허함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들이 사는 이유에 직면하게 되는 것인데, 정작 삶의 진정한 가치, 행복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생각게 한다.

 

「땅파기」란 작품은 이 소설에서 양적으로나 그 감성의 전달, 의도된 목소리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여겨지는데, 은퇴한 전직 국회의원인 노인과 교사인 중년의 딸, 그리고 가난한 아랍 청년의 동거에서 빚어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다양한 의식들로 인해 다수자와 소수자, 강자와 약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과거와 현재의 몰이해, 이질화의 현상들을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헛간을 빌어 사용하는 아랍청년의 하모니카 소리에 대해 “동양의 비탄으로 영혼을 쏟아내고 있어”라며,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담은 저의라고 비아냥대는 장면처럼 적의(敵意)조차 해학에 녹여내어 그 진중한 메시지를 감정적 격앙 없이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있다.

 

한편 발전 지상적 논리에 의해 귀중한 고유의 것들을 잃어버리고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의 몰지각처럼 경제적 효익(效益)을 위해 고택(古宅)을 매입하려는 부동산업자와 고택을 안내하는 처녀와의 아슬아슬한 심리적 교환의 떨림 속에 지펴내는 가치에 대한 물음을 담은 「길을 잃다」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여기에 자기실현과 성취의 가치에 매몰된, 그러나 아내의 인생에는 무심했던 남자가 사라진 아내를 찾아 해매는 공허함 그득한 「기다리기」는 물질, 지위, 권력 등 끝없는 욕망의 무모함 뒤에 남게 되는 실체, 바로 부존재, 무(無)라는 인생의 풍경을 잔잔히 흐르게 한다.

 

30세 여인을 향한 17세 소년의 서툰 사랑의 열정, 그 표현의 미숙함과 연민을 덮는 고유의 불안과 슬픔들, 자식을 잃은 어느 부부에 대한 비릿한 연민과 그 아픔에 대한 인간적 소통의 한계와 무기력함을 통해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의 절대적 고독을 확인하게도 된다. 이해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 하지만 우리들은 어느덧“이기적인 동기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인간들로 변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이방인이 되어 서로에게 이질적으로 변해”의심, 비판, 피해의식으로 마음들이 정말 죽어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0대 소년에서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노인의 삶에 이르는 우리들의 일상성 속에 깃든 인생의 시원적 모습들에 이처럼 감성적 공감을 하게하는 것은 아마 자긍심 넘치는 작가의 선언처럼 연륜의 진실함, 진솔함 때문이리라.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무덤 파는 노인이 외치듯, “이런 수다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하며, “해가 떴고, ....뜨거운 하루가 다시 시작됐고, 이제 일하러 가야하오.” “우리 할 일은 그게 다요.”라는 선언처럼 이제 입을 닥쳐야 할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저무는 석양처럼‘기울어가는 그림자’일 뿐이 듯이, 서로 ‘고요한 동료애’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묻는 것 같다. 쓸데없이 부산을 떨며 움켜쥔 삶의 시간을 이제 관대하게 내려놓는 연습을, 시골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그러한 심정을 알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미덕은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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