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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센덴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0
서머셋 모옴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평점 :
이 작품은 서머셋 몸(W. Somerset Maugham) 자신의 1차 세계대전 중 유럽지역 영국첩보원으로서의 경험 일부분을 토대로 하고 있어 그의 소설 중 독특한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굴레』나 『달과 6펜스』를 떠올리면 첩보물이란 미스터리 소설을 그와 연결하는 것이 낯설기도 하지만, 그만큼 강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을 부인키 어렵다. 또한 이 작품과 더불어 1937년 발표된 『공포의 배경』은 소위 첩보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심리적 스릴러의 원천이 되었다고 하니 문학사적 위치도 간과할 수 없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1928년에 최초로 발표되었으며,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10년을 전후한 세계대전 기간으로, 영국,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지역과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혁명이 완성되는 1911년의 러시아를 무대로 하고 있다. 특히 작가의 체험이 그대로 반영된 듯 보이는 내용들의 사실성으로 인해 인물에 대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작품의 특징이랄 수 있겠다. 그리고 모호한 이야기의 구조를 하고 있는데, 총 16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각각이 하나의 인상적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전체는 연결되어 한 편의 장편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몇몇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완성도 높은 하나의 단편소설로서 완벽한 기능을 수행한다. 사랑을, 허영심의 본질을, 조국애를, 전쟁과 첩보전의 비정함을, 소시민적 삶에 대한 연민을, 전쟁이란 혼돈과 위험의 특수한 시공에서 펼쳐내기에 보다 다양한 인간의 양태를 발견하게도 된다.

영국 첩보원이 된‘아센덴’은 ‘제임스 본드’류의 민완하고 다재다능한 이상화된 스파이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을 하고 있어, 오히려 진지하고 내용의 신뢰를 갖게 된다. 리얼리즘이 지향하는 맛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위험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 적대적 상대자에게조차 보내는 인간적 연민, 위선을 걷어내고 진솔하게 드러내는 감정들로 인해 비정하다거나 냉혹한 첩보원이란 도식이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쟁이란 적의와 증오에 희생자일 밖에 없는 첩보원들, 그들 역시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내이며, 자식이자 어버이다. 어센덴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동료 스파이나 적의 스파이 모두에 대해 그네들 본연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고 내면과 일상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조국 영국을 배신하고 적국인 독일을 위해 첩보활동을 하는 영국인에 대해서 증오와 분노라는 적의보다는 삶의 수단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나 독일인 아내를 위한 곡진한 사랑을 발견하는 식이다. 전쟁 중인 조국에 위해를 가하고 영국 첩보원을 죽음에 몰아넣은 배신자일지언정 그를 함정에 빠뜨려 처단해야만 하는 첩보원으로서의 애환이 진실 되게 그려지고 있다. 영국으로 향한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두절되자 기다림의 두려움으로 고통 받는 첩보원의 아내를 묘사한 장면은 압권이다. 반면에 독일의 첩자인 인도인을 체포하기 위해 그의 연인을 이용하는 정보기관의 비정한 일화는 사랑조차 한낱 죽음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착잡한 인간애로 갈등하는 첩보원을 보게 되는 것은 어떤 인간적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어센덴이라는 스파이로서의 인물 자체에 시선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현대의 미스터리 액션, 서스펜스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들과는 근본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스릴이나 박진감, 긴장감을 요소로 하고 있지 않으며, 허황된 영웅을 탄생시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위 스파이를 구성하는 임무의 본질들이나 활동 내용, 그 추진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사실성을 통해 인간과 삶의 본원적 모습들, 시대에 대한 주의 깊은 성찰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성취를 이뤄내고 있는 것은 결정적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는데, 임무를 위해 파견된 국가의 주재영국대사가 사랑과 결혼, 그리고 허영에 대해 들려주는 인생의 회고담이다. 고급 외교관 신분이었던 청년이 천박한 무희에 불과한 여성에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에 빠져들지만, 신분과 권력, 명예에 대한 지향으로 사랑을 떠나 자신의 야심을 지원해 줄 수 있는 가문의 여성과 혼인하는 것이다. 사실 통속적인 스토리라 할 수 있으나 이 회고에서 발산되는 ‘허영’, ‘인생에서 진정 중요 한 것’에 대한 문장들은 가히 문호다운 사색적 명문들로 채워져 있기에 압도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괴롭히는 여러 감정 중 가장 파괴적이고 보편적이며 뿌리 깊은 허영심이란 감정이 우리들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허영심의 속박에서 구출되지 않는” 이유들...(정말 매혹적이랄 수 있다.)
사랑, 배신, 삶과 죽음의 기로 등이 무대를 바꾸며 스파이 활동에 녹아 흐르다, “인생에서 노인이 되어 후회할 수 있는 것을 만들지 못했다”는 사회적 성공을 했다는 인물의 고백에서 절정을 이루고, 블라디보스톡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어지는 러시아 횡단열차의 이동과 볼셰비키 혁명 전야의 불안한 정세 속에 펼쳐지는 인간 군상들의 예술과 사랑, 폭력과 무참한 희생이 한 평범한 미국인 가장의 소심하기조차 한 세탁물로 상징되는 자기애의 집착이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작가의 말처럼 전쟁의 현실감이 상실된 시기에 전쟁 첩보활동은 단지 소재에 불과 하게 된다. 그 환경,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삶의 심연을 공감어린 인간애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를 위로하며 인생의 가치를 되새겨 보는 작업이야말로 변화하지 않을 문학의 본성 일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기쁨이 분명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