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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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위프트’의 신랄함이란! 사람이라는 생물과 이 생물들의 사회에 대한 혐오가 깊고 짙다. 총 4부로 구성된 환상적인 이 여행기가 오랜 세월 금서로 묶일 수밖에 없었고 특히 3부「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와 4부 「말들의 나라」가 삭제되어 출간되었던 이유를 확인하는 데는 어떤 어려움이 없을 만큼 명료한 경멸과 비판이 빼곡하다.
1부「작은 사람들의 나라」‘릴리퍼트’나 2부「큰 사람들의 나라」‘브롭딩낵’역시 그 본말(本末)은 제쳐둔 채 외형적 판타지의 서사만을 희화한 것들이 상업주의 책략에 의해 나도는 것을 보게 되면 아마 조너선 스위프트는 아연실색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야말로‘야후’다운 짓거리라고 자신의 판단과 예견이 옳았음을 더욱 확신할지도 모르겠다.

형태나 모습, 사고나 관습 등 제도들, 그리고 종(種)까지 초월한 낯선 공간에 표류하게 됨으로써 이것들이 척도로 작용하여 이성적이라고 자칭하는 인간사회의 비이성과 악덕, 도덕적 일탈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나마 1,2부는 온화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단지 관료의 채용방식이나 파당적 이기주의, 상류층의 무절제한 사치와 정치가와 종교인의 탐욕, 무지의 은폐를 상대적 시각으로 인간사회를 비판하게 하여 단정적인 결론에 이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릴리퍼트의 강제법규 중에는 “계란을 깰 때는 좁은 방향의 끝 부분을 깨도록”하고 있다. 넓은 방향의 끝부분을 깨거나 다른 방향에서 깨면 처벌되는 것이다. 인간사회의 관습이나 제도라는 것이 이처럼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런 것이고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보여주는 풍자이다.
이러한 비유적 일화를 통해 인간사회의 반성적 사유를 요청하기도 하지만, 제도적 결함을 직설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릴리퍼트에서는 뛰어난 능력보다 훌륭한 덕성을 가진 사람을 관료로 채용한다고 하면서 사회에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는 자는 외려 능력을 가진 자들임을 그들의 교활한 은폐와 변호행태로 설명한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고위 관료들의 청문회를 보면 단 한명도 법을 어기지 않고 부정(不正)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릴리퍼트의 관료채용제도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만 같다.

브롭딩낵의 큰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과 행동양식을 닮은 작은 걸리버를 연구하고 나서 오랜 논쟁결과 ‘자연의 장난’으로 생겨났다고 결론짓는다. 자신들의 무지를 감추는 식자(識者) 연(然)하는 지식인의 천박성을 겨냥한 것이다. 또한 정치 관료들이 탐욕과 집착, 욕망을 벗어나 있는 자들인지, 뇌물을 받거나 하는 나쁜 자리는 없는지, 그들이 국민을 희생시킴으로써 자기들이 사용한 돈과 노력을 보상받으려고 하지 않는지,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재앙인지를 말하는가하면, “의원 자격을 갖추는데 무지와 태만, 부도덕이 적절한 사실임을 증명하는 그대의 나라에서는 온통 법을 악용하고 왜곡하며 회피하는 일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자들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법이 가장 잘 설명되거나 해석되고 있으며 적용된다는 사실...”의 구절에 이르면 우리사회를 콕 집어 말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그만 숨이 턱 막히기도 한다. 그리곤 걸리버로부터 인간사회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큰사람은 인간사회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세상의 표면에 기어 다니는 생물 중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이라고.

이 정도의 빈정거림이 온화한 것이라면 3,4부의 독설은 가히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혐오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부「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라퓨타’는 정신이나 마음이 온통 수학과 음악에 모두 갇혀 있는 사회로 묘사된다. 마치 과학과 합리주의적 이성이라는 광신적 믿음에 갇혀있는 오늘의 인간사회와 같다.
그리고 매우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일반 국민의 불평에 따르면 국왕과 대신들은 모두 기억력이 짧고 무엇이든 쉽게 잊어버리는 질병에 걸려 있다.”는 구절인데, 부정하고 부패한 한국의 정치인, 탐욕스런 자본가들이 심판대에 오르면 한결같이 모르쇠로 일관하며, 1년도 지나지 않은 일을 기억나지 않는다고 읍소하는 파렴치한 장면들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국회가 결정하는 짓거리라는 것이 모두 국민의 의지에 반하는 것인 만큼 그들이 결정한 것을 정반대 방향으로 시행하면 반드시 국민에게 이로운 방향이 될 것이라는 조언이나, 의원을 뽑을 때 그저 제비로 뽑는 것이 오히려 희망과 기대가 엇갈려 불평자가 줄어들 것이고, 그저 뽑히지 않은 자는 운명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 훨씬 합리적이고 선한 것 아니냐고 조롱하는 대목은 당리당략, 개인적 이익에 함몰되어 왜곡된 오늘의 민주정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더구나 “아첨하는 자들에게는 성실을, 매국노에게는 진실을 부여”하는 것은 18세기 영국이나 21세기 한국이나 차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동족을 수탈하고 배반했던 자들이 처단되지 않고 그대로 득세하여 오늘의 지배계층을 이룬 한국사회와 같으니 말이다. “얼마나 많은 악당들이 명예와 세력과 권위와 풍요로움이 보장되는 자리에 올랐으며...포주와 창녀, 뚜쟁이, 아첨꾼, 익살스러운 광대에 의해 도전을 받았는지...”하며 인간의 지혜와 성실성에 대해 경멸을 보내는 걸리버를 대하면 그대로 숙연해지기도 한다.
또한 “사치로 인해 로마제국의 부패가 그토록 빨리 진행되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그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이것과 비슷한 경우를 보고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모든 종류의 악이 훨씬 오래전부터 성행했으며,..”할 때에는 물신숭배와 소비지상의 오늘의 비이성적 광기에 그저 담담히 수긍케 된다.

아마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의 신념과 정치철학의 핵심은 4부, 「말들의 나라」‘뉴홀랜드’라 하여야 할 것이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한 말들의 나라, 자연의‘완전한 창조물’로서 이성적 존재로 행동하는 존재, ‘휴이넘’이라고 부른다.
인간에 대한 거부, 인간이 조성한 사회에 지극한 혐오가 책 전체를 휩쓴다. 공교롭게도 휴이넘이 지배하는 사회에 ‘야후’, 즉 길들여지지 않은 괴물인 인간이 종속되어 있다. 거짓과 위선, 아첨, 기만, 절도, 살해,...라는 단어의 복합체인 동물. 걸리버로부터 인간사회, 즉 이성을 지닌 야후의 사회를 전해들은 휴이넘의 평가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그야말로 신랄하고 냉혹한 비판이 되어 꽂힌다.

“돈 때문에 하얀 것을 검다고, 검은 것은 하얗다고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를 사용하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는 야릇한 사회가 바로 우리의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나머지는 모두 노예나 다름없다.”는 평가나, “구걸, 강도, 절도, 사기, 거짓맹세, 아첨, 위증, 위조, 도박, 거짓말, 아양, 허세, 투표, 잡문, 몽상, 독살, 매음, 위선, 인신공격, 자유사상 등... 많은 인간들이 이걸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열거는 분노와 수치스러움이란 감정이 교차케 한다.
제도를 사용해 나중에 있을 보복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약탈한 걸 가지고 유유자적 은퇴하는 정치 관료와 자본가들, “교활함과 무례함에 의해 장관”이 되는 일례에 이르면 얼마 전까지 설쳐대던 광대가 떠오른다. 건방지고 야비하고, 배반 잘하고 복수심도 강하며, 게다가 겁 많은 정신까지, 야후 같은 인간은 이성을 사용해 악덕을 더욱 향상시켜왔으니 그 잔인함, 폭력성은 가히 견줄 대상이 없기도 하다. 마침내 휴이넘은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이성적일 수 있는 동물’이라 결론을 맺는다.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에 대한,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층적인 탐색기라 할 수 있다. 본성에 대해서,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 사상과 사유의 상대적 고찰에 대해서, 각종 관습과 제도적 장치의 자의성에 대해서, 그리고 미덕으로서의 선과 옳음에 대해서 생각게 하는 윤리학이기도 하다. 비아냥, 조롱, 풍자 등 희화적 요소, 그리고 환상적 상상력이 기막힌 하모니를 이룬 문학사적 기념비작으로도 그 위상을 확인 할 수 도 있다. 혹, 이처럼 지독한 인간 혐오를 외친‘조너선 스위프트’를 염세주의자로 몰아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한 영원히 죽지 않는 스트럴드블럭의 럭낵 사람들처럼 죽지 않음으로 생기는 무서운 절망 - 고집, 불평, 욕심, 침울, 허영, 수다, 사랑할 줄 모르고 후세에 애정도 없음...시기와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 참 - 으로 자신들이 갈 수 없는 영원한 안식처를 보고 한탄하는 무지함을 계속하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과 인간사회가 해결하여야 할 영원한 과제들로 가득 찬 이 작품은 18세기 영국인과 영국사회보다 오늘의 한국인과 한국사회에 더 요구되는 것들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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