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무라노 미로’시리즈로서는 국내에 먼저 소개되었지만 외전인 『물의 잠, 재의 꿈』을 포함하면 네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성적이라기보다는 본능이나 직관에 충실한 여성 탐정이라는 캐릭터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지만 앞 선 작품들에서 보았던 선악 관념이 더욱 흔들리고 보다 감성적 인물로 변한 미로를 접하게 됨으로써 도덕적 가치의 당혹스러운 도전에 직면하는 것은 또 다른 전율과 긴장이란 매혹을 주고 있다 할 수 있겠다.
미로가 도움을 요청하면 딸을 위해 기꺼이 능력을 보여주던 아버지‘무라노 젠조’에 대한 애증은 그녀의 출생 비화로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젠조에게 ‘의붓아버지’라는 시각을 부각하여 입힘으로써 개입될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 괴리감을 증폭시킨다. 이 감정을 증오와 불신으로 확장시키는 데에는 연인이자 적대감을 동시에 지녔던 한 남자의 자살소식을 아버지가 은폐했다는 인식이 기초하고 있다.

이처럼 미로는 자기 연민과 감성에 지배당한 여성으로서 증오와 삶의 체념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마치 그녀의 내면은 지옥의 어둠 같이 뒤틀린 잔인한 무엇으로 가득 차 있다. 자기의 감정, 특히 애정의 균열을 만들어낸 당사자로서 아버지 젠조를 지목함으로써 심장병을 앓고 있는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폭력적 분노, 광기에 휩싸인 미로의 거침없는 감정의 질주는 악마적 탐욕스러움으로 선(善)의 편이었던 그녀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완전히 전복시켜버린다. 이제 무라노 미로는 탐정이라는 추격자의 자리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인자로서 도망자의 위치에 선 것이다.

맹인(盲人) 안마사인 아버지 내연의 처가 외치는 비난과 위협의 외침을 뒤로하고, 더구나 돈까지 훔쳐들고 도피하는 미로의 모습은 경악 바로 그것이다. 이제 좇는 자와 달아나는 자들의 이유를 통해 그들을 이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근원, 인간의 원시적 본능으로서의 추악한 욕망들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낸다. 오랜 우정을 쌓았던 이웃이었던 동성애자, 죽은 아버지의 내연녀, 아버지의 동료였던 야쿠자, 이들 저마다의 과잉의 자기연민, 그 본색인 탐욕의 역겨움이 죽음의 사자가 되어 미로를 추적한다. 그러나 추해보이기만 하는 이들 사자들에게는 사랑하는 이의 상실, 혹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고뇌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설혹 더러운 자기내면과 역사의 은폐나 물질적 욕망을 덧씌우는 자기기만일지언정, 그래서 이들의 미로 추적은 당위성을 갖추게 되는 것일 게다.

이에 대비되어 미로의 한국으로의 도주와 도피생활을 함께하며 신뢰를 쌓아가는‘서진호’라는 인물을 통해 타자를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사랑, 즉 삶의 진정한 가치,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은 어쩌면 물질적 자본주의와 소비사회로 황폐해진 일본사회가 잃어버린 휴머니즘을 외국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상징적 이유로 파악되기도 한다. 한편 우리에게 이 작품이 특색 있게 다가오게 하는 소재, 즉 무대의 상당부분이 한국이라는 것이며, 더구나 1980년 5월 광주항쟁이라는 군부의 탐욕스런 권력욕이 만들어낸 잔인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소재가 배경으로 등장하여 나락으로 떨어진 오늘의 인간과 인간세상의 비열하고 추악한 본성을 입증하고 강화하는데 한 몫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시종 온갖 욕망으로 탁해진 절망적 세상을 그려내려는 데 더 없이 적절하다는 작가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오직 에고와 나르시시즘에 빠져드는 현대인들, 그래서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어야 할 신뢰란 미덕이 아무런 위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들을 구원할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게 한다. 증오의 씨앗이 에일리언처럼 몸속에서 자라고 그 아이를 자기 생존의 교환물로까지 비참하게 내몰듯이 비록 지옥의 세계 같은 절망의 현대를 말하지만 마침내 그 순박한 아이의 미소에 생명에 대한 신뢰를 보내는 미로의 다짐은 결코 작은 희망의 한 가닥을 놓지 않는 어둠의 미세한 균열을 보는 것 같은 낭만적 기대도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인 그녀의 유일한 신뢰인 서진호를 기다리기 위해 찾은 나하(那霸)의 밤거리는 왠지 모를 불안으로 차기작을 기대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