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의 화가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새로운 방법
유예진 지음, 유재길 감수 / 현암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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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보면 대체 이러한 묘사와 비유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는데, 많은 부분이 이 한 권의 책으로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어떻게 예술역량을 쌓아갔는지, 특히나 프루스트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하기까지 그리곤 마침내 완성하기까지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작품 곳곳에 직간접적으로 묘사되는 회화들, 그리고 등장인물들조차 명화(名畵)속 한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라든가, 많은 소재들 또한 그림에서 차용된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모호하게 여겨졌던 많은 구절들이 절로 선명해진다. 더구나 화자(話者)인‘마르셀’에게 예술적 영감은 물론 작가로서의 의지와 자신감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인 인상파 화가 ‘엘스티르’가 ‘휘슬러, 모네, 르누아르, 마네’등의 이론이 혼합되어 구축된 인물임을 알게 되면서, 마르셀의 예술론에 대한 지향점을 보다 명료하게 확인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 무엇보다 제 1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를 펼치면 뒤죽박죽의 기억이 두서없이 전개되고 지루하게 긴 문장과 일관된 서사도 없어 아예 2권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질려버릴 정도로 곤혹스러운 독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처음 이 작품의 출간을 모든 출판사들이 거절하여 자비로 출판한 것이나, 출간되자마자 ‘개인적 인상의 나열이자 고작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예술과는 동떨어진 아무것도 아닌 시간 남아도는 사람들이 정말 시간을 잃어버리고 싶으면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한 혹독한 비평처럼 낭패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2권 「게르망트 쪽으로」,제4권「소돔과 고모라」등으로 이어지면 제법 사건같은 것이 발생해서 흥미를 만들기는 하지만 역시 여느 기성의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구성과 내용 탓에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제1권을 출간한 후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머리로 사고해서 쓴 것이 아니라 책에 언급되는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 저의 감수성에 의해 느껴진 것입니다.”라고 하였듯이 그의 오감에 의해 촉발된 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어느 하나 극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기억들이 아닌 것이기에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 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읽어내기가 만만찮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지만, 이 작품의 대부분이 작가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로 프루스트의 예술은 회화, 즉 화가에 의한 회화감상법으로 이것이 곧 작가를 꿈꾸는 마르셀이 추구하는 그만의 작가론을 형성하는 중요한 바탕이었다는 점에서 가능한 것이다. 작품 전체에는 수백 명의 등장인물들이 있지만 주요 인물들은 예외 없이 어느 실존의 예술가이거나 그림 속 등장인물을 모델로 창조된 인물이며, 인물의 성격역시 여러 회화 속 실재인물, 또는 신화가 말하는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 만큼 작품에서 직접 언급되는 그림은 말할 것도 없이, 언급되는 문장을 통해 연관되는 화가나 그림을 떠올리면 이야기의 선명한 윤곽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제 1권의 제목이기도 한‘스완’은 어린‘마르셀’에게 최초로 예술에 대한 호기심을 불어넣는 인물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부유한 유대인이다. 그런데 이 인물은 바로 인상파 화가‘르누아르’의 잘 알려진 <뱃놀이 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에 유별나게 검은 정장을 하고 뒷모습을 보이는 인물로 그려진 당시 유명 미술잡지인 <가제트 데 보자르>의 편집장이자 미술수집가인‘샤를 에르퓌시’로, 르누아르가 자신의 후원자인 그에 대한 예의로 그려 넣은 것이다. 따라서 실존인물과 소설 속 허구인물은 이름만 다를 뿐, 유대인이며 미술품 수집가인 것 하고, 그 자신은 단지 예술의 감상자로서 진정한 예술가가 되지못한‘예술 미혼자’로 남는 것은 소설 그대로이다. 또한 스완이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엉뚱하게도 ‘보티첼리’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인 <모세의 삶>에 그려진 양치기의 딸‘시포라’의 표정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오데트’의 이미지나, 그녀의 동성애나 창부로서의 기질 등이‘바토’가 그린 한 쌍의 그림인 <무관심>과 <소녀>에서 차용되는 것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술가나 회화작품이 인물의 성격과 창조에만 차용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진정한 주제와 이야기의 진행에는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소설의 외형적인 측면인 서사적 주제는 진정한 소설가로서 확신을 갖기까지의‘마르셀’에 대한 성장기로서 예술적 자기 능력에 대한 회의와 자신감, 그리곤 사랑과 예술의 열정 사이에서의 갈등, 마침내 일상적 소박함과 평범함에서조차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깨달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적 발견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여정은 바로 무수한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으로 은유되어 표현되고 있는데, 거대한 예술의 도시 베네치아는 도시 자체가 회화가 되어 예술 학습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특히 “샤르댕, 베르메르, 램브란트”는 거의 절대적인 이상이 된다. 이들은 바로 “사물에서 초시간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표현할 방법을 찾아 낸”사람들이며, 내재적 측면으로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렇듯이 “시간의 공간화, 즉 소설이라는 정해진 틀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소설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한다. 즉 소설 속 인상주의 화가 ‘엘스티르’로 대변되는 프루스트의 인상주의적 시선으로 “영혼의 안식처”는 ‘잃어버린 시간’이자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삶이 모험으로 가득 차 있지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극적인 일들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의 예술가로서의 지향은 항상 의기소침하고 회의적인 것과의 갈등이었기에 마침내 하찮은 소재인 정물들을 그린 ‘샤르댕’의 그림은 소재와 상관없이 새로운 시선으로 작품을 소화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되는 것이며, ‘베르메르’의 <델프트의 풍경>에 그려진 “덧칠에 덧칠을 하고 여러 겹을 입혀 완성한 ‘노란벽의 작은 자락’”은 자신의 소설이 “다양한 원고 조각을 이어서 만든 수정에 수정을 가하여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해야 하는 작품”이 되어야 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비의도적인 기억들로 이어지는 이 작품을 매개하는 것으로서 회화예술에 대한 프루스트의 이해는 실로 상당한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프루스트가 소설가, 예술가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고 궁극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게 되는 인생의 결정적 계기가 되게 한 작가가 있다.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인데, 그의 저술 중 『아미앵의 성서』와 『참께와 백합』이라는 두 권을 번역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원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중추를 이루는 화가, 소설가들과 그들의 그림과 작품이 직간접적으로 소설의 흐름과 인상에 영향을 주고 있는 사례가 즐비하게 소개되고 있을 뿐 아니라, 프루스트의 동성애자로서의 성적취향이나 어머니에 대한 오이디프스적 사랑이 어떻게 작품 속 회화에 녹아있는지도 발견하게 된다. ‘프루스트와 회화’에 대한 이 미학적이고 문학적인 저술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독해하는데 더 할 수 없는 긴요한 참고가 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이 한 권의 책이 프루스트를 해설하는 여느 백 권의 책보다 낫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덮어두었던 제5권 「갇힌 여인」을 다시 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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