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신검시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8편의 단편소설이 하나의 리듬과 이미지를 가지고 구성된 휴머니티가 물씬 풍기는 기이하고 정교한 구성의 추리문학이다.
전(全)편에 등장하는 ‘구라이시’라는 검시관의 탁월한 현장검시능력과 고집스러울 정도의 기존 질서에 대한 무시가 어울려 만들어낸 그의 별명이 ‘종신 검시관’이다. 조직 내 누구도 그의 지위와 자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치 않을 정도의 묵시적 인정을 의미한다.

발견된 사체의 자살과 타살의 구분이 모호한 사건에 주인공 ‘구라이시’는 현장에 출동한다. 그리고는 명쾌한 구분을 해낸다.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그리고 상상하지 못한 증거와 사유를 밝혀내는 완벽한 검시본능의 인물....
검시관의 조수 ‘이치노세’의 불륜 상대역이 교살된 사건으로 시작되는「붉은 명함」에서부터 작가는 심상치 않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이 갖는 냉정함과 이성적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한때 탐닉했던 여성의 죽음에 갈등과 연민과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미스터리는 미스터리이다. 주인공 ‘구라이시’의 명석한 현장검증이 유쾌하고 명석하게 뒤따르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각 단편들의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이다. 추리소설에서 중심인물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유형의 인물들이다. 경찰관도 검사까지도 인간애가 물씬 풍긴다. 「눈앞의 밀실」에서는 말단의 지방기자와 그의 상사아내가 동행하여 현장잠복을 한다는 코믹한 배경과 정교한 시간의 구성 속에 발생한 살인으로 흥미 있는 추리의 세계로 독자를 견인한다. 평범함 속에 짓궂은 작가의 유머가 숨겨져 있다.

아, 구라이시를 잠깐 잊었다. 현장검시에서는 냉철하고 고집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사람, 주변 동료와 갈등을 제조하는 사람으로, 그래서 더욱 검시관의 임무수행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또 다른 단편 「전별」에서 45년의 경찰생활을 끝내고 물러나는 수사부장에게 마지막으로 정말 인간미 물씬 묻어나는 멋진 멘트를 날린다. 수사부장은 생모에게 버려져 입양되어 키워졌다. 그의 생모에 대한 죽음을 자신의 은퇴시점에서 이해하게 되는데, 생모의 사체(死體)를 처리했던 ‘구라이시’는 수사부장의 노모(老母)가 자살한 것인지, 실족사 한 것인지를 조사한다.
수사부장의 전별식장에서 걸어 나오는 그에게 구라이시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자살하지 않는다.”고 속삭인다.

구라이시의 깊이 있고 따뜻한 인간애는 한 달 정도의 부하직원으로 스쳐갔던 여경(女警), 더구나 경찰을 그만둔 지 10여년이 지나 사체로 발견되자 이의 현장검시에서 ‘살인’이다! 라고 의도적인 실책을 만들어내는 자기명예의 희생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자살이 명확함에도 옛 부하의 죽음을 보다 명확히 하고 동료로서의 최선을 보여주기 위한 대규모의 탐문인력을 동원하기위해 짐짓 ‘타살’로 몰아 부치기도 한다. 자살의 동인(動因)이 명확해지자 자신의 실수라고 선언한다. 아 멋진 인간!

속물적 출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 자신의 임무에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 그래서 그는 부하와 동료로부터 ‘구라이시학교’의 ‘교장선생님’이다. 우리네들은 일천한 삶의 구실을 핑계로 비굴함을 일상으로 이해하지만 이를 멋들어지게 돌파하는 사람, 진정한 리더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이에 못지않은 구성요소가 또 하나 있다.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흥미로운 사유의 게임이다. 인간 삶의 통찰과 함께 추리소설이 가지는 묘미를 적절히 버무려 놓은 걸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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