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한도(歲寒圖)라는 書畵 한 첩이 지니는 역사, 학문, 예술, 그리고 그 정신에 대한 품격 높은 인문서라 할 수 있다. 텅 빈 초라한 집 한 채와 소나무 몇 그루가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황량한 이 그림이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이 책을 잡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19세기 조선 최고의 학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할까?

이 저작은 한 인물의 학문적 성장과 성취를 향한 열정, 시대적 배경부터 찬찬히 소개하고, 정치사적 혼란과 정쟁으로 인한 아버지 김노경의 고금도 유배 등 안동김씨 세력의 터무니없는 무고로 완당(阮堂)선생 일가의 부침 및 이재 권돈인과 황산 김유근과의 석교(石交)의 일화, 그리고 세한도가 그려지게 된 계기와 배경에 대한 지식, 서화의 심도 있는 감상과 이해, 그리고 오늘에 전해져 오기까지의 여정을 품격 높은 고증과 해석, 오랜 자료의 수집과 학문적 노력의 결정으로 담아내고 있다.

여전히 공허하고 피상적인 도학(道學; 유교 도덕에 관한 학문)의 공리공론에 사로잡혀 현실, 즉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지식이 전무(全無)한 당시 조선의 풍조를 벗어나 실증적인 연구와 학술에 대한 관심, 그리고 분리된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學藝一致와 병세의식(幷世意識) 등 북학(北學)이 도래하던 19세기의 정신사를 기초로 한 당시대의 학문적 흐름이 촘촘히 설명된다. 이는 연행(燕行)과 北學이란 단어가 당시를 대표하듯이 청의 뛰어난 문인들에 추사의 학문적 동경이 있었음은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는 추사가 청의 문사들과의 교우와 앞선 서책을 통한 강력한 정보력을 배경으로 19세기 조선최고의 학자로 발돋움 할 수 있었음을 설명한다. 그의 연행에서 어렵게 만난 담계(覃溪) 옹방강 선생으로부터의 배움과 학문의 최고 경지를 향한 문경(門徑;학문의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최적 루트)을 찾아 자기고유의 정신과 학문을 정립해 내려는 노력의 과정들을 조명하는 저자 박철상에서 지고한 노고의 흔적을 발견하게도 된다.
또한 고독하고 참담한 제주도 유배지에서 아내를 여의고 그 슬픔을 표현한 완당선생의 시(詩)는 애틋한 사랑과 서러움, 미안함과 원망이 담겨있어 200여년이 훌쩍 지난 오늘에도 그의 지고지순한 성품이 안타깝게 전해져 오는 듯하다.
“어떻게든 월하노인月下老人 저승 법정 세워놓고 / 내세에는 남편 아내 처지 바꿔 태어난 뒤 / 나 죽고 천리 밖에 그대 혼자 남게 하여 / 나의 이 슬픈 심정 그대도 알게 하리.”

이렇듯 천리만리 떨어진 유배지에 그 많던 친교는 모두 떠나버리고 안부조차 찾는 이 없는 추사가 유배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똑같이 자신을 대하고 있는 우선(蕅船)이상적의 행동을 보면서 문득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사람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법이다.”라는 『논어』「자한」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을 떠 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물의 형상을 묘사하기보다는 마음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보이지 않는 자신의 인품과 학식, 감정과 사상을 황량한 겨울 속에 산수화로 그려낸 세한도는 그대로 문인화의 정수가 된다.
누군가의 아류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스스로 터득한 초묵법(焦墨法;극도로 진한 먹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까칠한 종잇조각을 잇대어 그 위에 그린 그림과 제사(題辭)는 조선의 정신과 문경의 정점에 있는 작품으로서 조선 문인화의 전범(典範)으로 추앙된다. 정간(井間)을 쳤으나 칸을 벗어나고 줄이 맞지 않게 쓴 글씨 하나에도 유배생활로 지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려한 치밀함이고 텅 빈 상상속의 초라한 집도 그의 의식세계를 담고 있으며, 종잇조각을 잇대어 붙인 것 역시 당나라 안진경의 <걸미첩 乞米帖>을 연상시키는 궁핍함의 표현 장치라는 해설에 그만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지 못하던 우매한 정신세계를 들킨 것 같아 움찔하게 된다. 특히 “몸통은 썩고 가지 끝에 몇 개만 남아있는 소나무의 몰골, 끝에 붙어있는 솔잎의 애처로움이 절개를 지킨 이상적의 모습이자 유배생활에 지친 자신의 몰골을 담은 중의적 표현”이라는 해설과, 사마천의 『사기』中 「정세가 鄭世家」, 「급정열전 汲鄭列傳」편을 알아야 비로소 제사(題辭)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무지 속에서 햇빛을 보는 것 같은 기쁨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또한 장서인(藏書印)에 대한 독보적 전문가인 저자의 압봉인(押縫印), 한 장(閑章) 등의 인장에 대한 설명은 물론 세한도의 인장 각각이 지니는 작품 속의 의미와 인주(印朱)의 빛깔이 세한도의 꽃으로 피어나는 대목은 그야말로 탁견(卓見)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이상적을 통해 청나라 문사들이 완당의 세한도를 보고 제영(題詠)한 시들과 오랜 세월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이전되다가 일본인이 가져간 세한도를 어렵게 다시 찾아와 장황(裝潢;표구와 같이 서화를 여러 가지 형태로 꾸미는 것)하여 오늘의 우리들에게 우리의 정신을 음미할 수 있게 된 험난한 여정을 쫓아 볼 수 있는 여유가 된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세한도 한 첩의 감상과 이해를 위해 그 관련된 인물들, 서책, 제영들이 읽기에 곁들여져 시각적 지원을 하게끔 편집된 이 저작은 그야말로 품격 높은 하나의 우리정신이자 보물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