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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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신의 잔영이 남아있는 듯한 옛 거리를 걸으며, 그곳에 어려 있는 청춘의 기억들을 불러내고 이내 그 장면들에 잠기는 것은, 아마 세월에 더러워진 인간이 아닌 “천사처럼 청징하여 방탕의 흔적은 한조각도 찾을 수 없게” 자신도 모르게 교묘하게 각색되고 수정된 기억이 주는 위로 때문이 아닐까? 사실 애틋하고 아름답게만 그려지는 청춘의 기억들을 이렇게 냉정하게 표현하는 것이 김새는 일이기는 하지만, 삶의 시간이 꽤나 흐른 뒤에 그 서툴고 푸르게 빛나던 시절의 추억이 주는 풍성한 감성의 세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빼앗을 수 없는 커다란 축복일 것이다.

주인공‘이노’가 그려내는 청춘의 그 거침없고 화려한, 그리고 고이 간직하고픈 사라진 사람들과 거리들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로 구성된 이 소설집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것들, 잊고 지내온 것들에 대한 뭉클한 그리움의 가치를 펼쳐놓는다.
메이지(明治)시대 화족(華族;일본 귀족)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어주던‘이노 무에이(伊能夢影)’, 그 3代인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의 이야기이다. 할아버지의 사진관과 데릴사위로 풍경사진을 찍으며, 장인의 인정을 소망하지만 세대간의 장벽이 가로서 있고, 그리고 물질의 풍요를 만끽하는 손자인‘이노’의 순수한 시선이 있다. 

첫 편인 가스미초 이야기에는 중간고사를 앞둔 고등학생의 치기어린, 그러나 풋풋하고 어설픈 사랑의 이야기가 사라져가는 대상들, 전통과 근대화로 풍요로워진 도심의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소설의 제목이자 공간적 배경인 롯폰기. 아오야마에 둘러싸인 안개마을 가스미초(霞町)는 내 어린 시절, 4대문 안에 사는 서울 토박이라고 허세를 부리던 그 텃세가 떠올라, 이노 무리가 강 건너 천박한 아이들이라고 자신들에게 선민의식을 부여하는 시선과 겹쳐 그 생각 없던 순진무구함에 슬며시 미소가 돈다. 여기에는 이후의 단편들의 튼튼한 배경이 되는 신구의 공존, 결코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변해가는 도쿄의 풍물, 그리고 사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현실의 기록, 즉 객관적 공인으로서의 사진관이 세월의 증거로서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사진관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소재이자 모든 이야기들의 매개체가 된다.

새로운 교통수단에 의해 퇴출당하는 마지막 전차의 운행을 안타까워하는 할아버지, 제자이자 사위인 이노의 아버지가 달려오는 전차를 향해 각자의 카메라를 누르는 장면은 뇌리에 찰칵하고 각인된 것처럼 인상 깊다. 역사의 한 페이지로서만 남는 순간이다. 주변의 익숙한 것들이 하나 둘 사라져갈 때 우린 문득 세월의 거친 속도를 느끼게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떠올리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움에 대한 애틋함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그리움은 바라보는 사람까지 전염되게 하는데, 게이샤 출신으로 허리를 곳곳이 세우고 걷던 할머니의 아득한 로맨스에 대한 예기치 않은 목격은 “그처럼 아름다운 할머니의 뒷모습은 무대 위를 걸어가는 우타에몬(가부키 배우) 같았다.”하며 우아함과 이면에 서린 회한과 우수가 어울린 할머니와의 가부키 공연의 동행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기억은 할아버지의 아픈 사랑과 가족사의 비밀과 연결되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후두암으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입관에 첫사랑 노신사가 주었던 철 아닌 평지꽃을 어렵게 구해 넣어드리는 장면은 왠지 콧잔등을 시큰하게 한다.

한편, ‘해질 녁 터널’, ‘여우비’등의 단편에선 주인공 자신의 자유분방하고 허풍스런 여성 편력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완결된 구성으로서 완성도 높게 전달되는데, 청춘의 기억이란‘오래된 영화의 스틸 사진’이라 해서인가 신비로움으로 안내되는 청춘남녀의 사랑, 인간에 대한 편견이 불식되는 만남을 통한 한 뼘만큼의 성장이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 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빠져들게 된다. 각각의 작품이 이처럼 완벽한 서사와 주제를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음에도 거대한 한 편의 소설로서 어떠한 흐트러짐도 없이 다가오는 것은 이 소설이 가진 빼어난 유연함과 구성능력 탓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 전체에서 지속하여 뇌리에 남겨지는 상(像)이 있는데, 무명의 사진작가인 아버지가 처음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으로 은행나무 열매를 줍고 있는 할아버지를 찍은 <노스승>이라는 작품의 이미지다. 생전에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사진에 유일하게 칭찬이랄 수 있는 “착한 사진”이라한 작품이기때문만이 아니라, 전사한 외삼촌을 향한 응어리진 할아버지 마음의 슬픔이, 그리고 “진실의 나무 열매를 찾아 헤매는 늙은 예술가와 그 모습을 포착한 제자의 시선”이 흐르고 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진관 스튜디오 등나무 의자에 앉아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열정을 다해 찍어준 졸업사진의 모습이 “말 그대로 살아있는 모습이었다.”라고 외치는 이노의 경외의 목소리에서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진실, 그리고 짙은 사랑의 향기를 맡게 된다.

가볍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임에도 진심이 어려 있고, 시리고 흐릿한 슬픔이 흐름에도 이들 모두를 뒤덮을 만큼의 장엄함이 묻어 있는 작품이란 느낌이다. 더구나 나(이노)의 정체성이나 연민에서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그 시큼한 인생을 보듬으려고“나의 가느다란 목줄기와 약간 굽은 어깨가 할아버지와 똑 같았다.”하는 독백은 사내의 소통이고, 삶의 이해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인간의 사랑으로 다가온다. ‘아사다 지로’는 진정 청춘의 천분의 1초를 진심으로 그려내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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