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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수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1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온통 하늘을 막아선 녹나무의 검푸른 우듬지와 스산하게 출렁이는 그 음산한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천년 세월의 업보를 쌓아간 나무, 그 장구한 세월 스러져간 인간들의 체액을 자양분 삼아 그들의 증오와 사랑,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분노의 공허함을 지켜본다.
지방 토호세력에 축출된 지방관 일가족의 참담한 죽음에서 시작된다. 탐욕에 얼룩진 분노와 슬픔, 그 회한(悔恨), 아이가 주워 먹은 죽은 아비 곁에 떨어진 녹나무 열매의 씨앗은 인간의 감성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이들의 육신을 거름으로 싹을 틔운다. 자연의 생성과 변화하는 거대한 흐름에 인간은 단지 순간의 작은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천년 수령(樹齡)의 녹나무를 중심으로 1,200년대 일본 헤이안(平安)시대에서 21세기 오늘에 이르는 시간의 교차를 통하여 인간 심성에 대한 가히 철학적 성찰이라 할 정도의 깊은 사유의 맛을 담은 연작(連作)형태의 구성으로 시간을 초월한 거대한 시선을 부여한다.
연작의 각 스토리는 독자적인 완성도를 갖는 단편 작품으로 읽혀도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작품 전편에 흐르는 음험하고 소름 돋는 녹나무의 분위기와 소재의 연결, 인물들의 시간경과에 따른 재등장은 눈썰미 있는 독자들에게 독서를 멈추지 못하게 한다. 중세에서 근세, 현대의 각기 대비되는 시간에 사는 인간 군상들의 그 욕망을 향한 몸짓들을 병치시킨 이야기 구조는 찰나(刹那)에 불과한 우리네 삶을 불현듯 소스라치는 당혹감으로 몰아넣는다.
어찌 보면 인간의 그 짧은 생존의 몸부림에서 시작되는 욕망들은 타자(他者)에 대한 인정을 부정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듯하다. 자신의 아이를 부자 집안의 아이와 바꿔치기하고 타인의 아이는 연못에 밀어 넣는 어미의 심정, 단지 먹거리와 교환할 옷가지를 위해 여인을 살해하는 산적처럼, 그리고 자신의 권력과 부의 축재를 위해 행동하는 시장과 같이 비루하고 사악한 인간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키워가는 녹나무, 그 우듬지에 어른거리는 아이의 깔깔대는 웃음 속에 흩뿌려져 있다.
피비린내 나는 탐욕의 희생물들이 천년세월 자신의 뿌리 언저리에 묻히고, 그 뿌리가 빨아드린 악의 기운은 다름 아닌 인간들의 모습이다. 흉측스럽게 불룩불룩 튀어나온 나무의 혹들과 지상에 어지러이 드러난 뒤엉킨 뿌리의 흉물스러움,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떨어지는 거대한 나뭇가지의 죽음이 서린 증오와 경외, 그래서 아이를 잡아먹는 ‘고토리’나무로 불리는 천년수 녹나무는 나무그늘 아래 인간들에게 자신의 가지(落枝)를 내던져 운명을 맞는다.
가파르게 이어진 백 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몸통 그리고 가지와 잎사귀로 하늘을 온통 가린 기괴한 녹나무와 초라하고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신사(神社), 무수한 죽음을 안고 있는 연못의 풍경이 뇌리에 무겁게 가라앉아 왠지 모를 무상함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타자에 대한 연민,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 겸양의 덕,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 그리고 칠정(七情)이 8편의 연작에 저마다의 색채와 탄탄한 이야기로 녹아들어 인간의 도덕적 실천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려는 작가의 혼신의 노력을 담고 있다. 밤에 구슬피 우는 저 새와 우듬지의 술렁거리는 소리가 천년의 회한을 담고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