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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암소들의 여름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정현규 옮김 / 쿠오레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이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단어들은 구속, 자유, 무관심, 외면, 모순, 허위, 국외자(Out-sider), 소외, 조롱과 같이 우리사회의 음울한 갈등과 불안을 상징한다. 비록 유머러스한 에피소드와 주인공들의 순박한 돌출 행동으로 어두움을 희석하고는 있지만,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인간소외에 대한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
작품의 시작에서 보여주듯이 주인공 ‘소르요넨’의 직업은 택시기사다. 자기의사는 중요치 않다. 본질적으로 택시기사는 타인(손님)의 의사에 따르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즉, 구속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자유로움에 대한 희망이 간절한 인물이다. 결국 자기의 자유의지를 실현하기위해 꽉 막힌 도시를 벗어나 뻥 뚫린 시외의 도로로 달려 나간다. 그런 그의 앞에서 도로 한가운데 길을 막고 선 노년의 신사가 넥타이 매려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 노년의 신사를 태운 소르요넨은 이 차가 가는 곳이 곧 목적지라는 황당한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내 이 둘의 의기는 투합한다. 치매환자인 ‘뤼트키넨’의 망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구속에서의 탈출이 동일한 삶의 방향으로 공명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모든 에피소드와 장면은 이면에 아주 독립적인 주제의식을 심어놓고 있어, 이러한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들을 보면서 독자들은 더욱 소설적 기법에 대한 탐색에 빠져들고, 흥미가 더해짐을 느낄 수 있다. 치매노인이라는 성격은 단순히 질병적 요소, 즉 환자로서의 인식에 불과하며, 작가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하나의 완벽한 인간으로서 그들이 겪는 고통스런 세계를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젊은 시절 전차병으로 참전했던 기억에 우쭐하고, 측량기사로서 사람들에게 존중받던 자신을 내내 자랑스럽게 여긴다. 전쟁 전시장의 장갑차속에서 벌어지는 뤼트키넨의 행동과 그의 웅크리고 잠든 모습, 옛 전우의 농장에서 벌어지는 엿새에 걸친 신나는 파괴행위, 정부에서 파견된 감사인이 내리는 삼림과 농장의 파괴에 대한 다분히 사회주의적 모순이 가져오는 웃기는 결과보고서, 웰빙을 부르짖는 자연주의자 프랑스 여성들의 핀란드 숲속 늪지대에서의 야생체험 현장, 그리고 소르요넨에서, 세르비아 출신의 외국인에 이르는 등장인물들의 면면, 경찰관과 마을주민들, 마지막 암소의 죽음까지...
이들에서 지속적으로 흐르는 세 가지의 의식을 접하게 되는데, 그 첫째는 구속과 자유와 그리고 죽음 또는 망각의 삶의 공식을 통해 소외된 인간, 그리고 사회적 외면과 무관심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이며, 둘째는 인간의 위선과 허영 등 허위의식에 대한 조롱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사회 등 권력주체의 무능과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옛 전우의 농장에 보내는 마을주민과 주변집단의 시선, 그리고 국가가 내리는 개인과 자연에 대한 기만적이고 자의적 판단에 기초한 희생의 강요나, 의문과 문제를 제기하는 자에 대한 배타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다수의 기이한 무관심에서 극단적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국가적 이익의 갈등을 보여준다. 그러나 해학적이지만 삼림 등 농장과 국가재산의 파괴에 대한 처벌을 심사하던 감사인들의 국가가 추가적인 농가지원금이 들지 않으므로 오히려 이상적인 파괴라고 진단하는 것은 국가의 무지와 무능에 대한 조롱이면서 한편은 개인과 국가의 화해라고도 볼 수 있다.
작가의 지속되는 오늘 우리 인간들의 고독과 소외에 대한 해부와 망각과 파괴와 구속과 자유의 오묘한 교차적 사건들을 통해 결정론적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주인공들의 분투를 북구의 하얀 어둠처럼 그려내고 있다. 역시 파실린나는 ‘라플란드’의 숲과 같은 지배당하지 않는 삶의 이상을 지향하는듯하다. 진중한 주제들을 경쾌하게 펼쳐내는 작가의 역량이 더욱 빛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