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아 갈로티 서문문고 316
레싱 지음, 송전 옮김 / 서문당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다섯 소년은 오래전 동숭동 연극공연을 보려 맨 앞줄 좌석에 앉았다. 베르테르의 로테에 대한 열정적 사랑의 몸짓과 그가 권총으로 자살하는 충격적 장면만이 오랜 시간  뇌리에 남았었고, 그로부터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이 낭만적 격정의 소설을 다시 펼쳐든다. 흘러간 세월 탓인지, 이젠 사랑의 열정에 대한 감상(感傷)은 휘발되어 사라지고 남은 이성의 찌꺼기만이 진실처럼 내게 날아든다. 자살한 청년이 마지막에 읽었을 책상 위에 홀로 펼쳐진 책, 에밀리아 갈로티의 상징성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런 탓일 게다. 청년 괴테의, 아니 그의 분신인 소설 속 베르터의 진짜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만이 관심사가 된 것이다. 메마른 이성의 고지식함만이. 아마 은 베르터의 고뇌는 바로 경직된 합리주의적 논리인 이성, 이것이 외면하고 있는 비논리적 감성을 말하려 한 것에 대한 정면으로 배치되는 읽기를 하게 된 것이니, 정말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젊은 괴테가 쓴 자전적 삶의 일화에서 출생한 소설이다. 줄거리는 물론 작품의 성격에 대해서는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듯한 그런 상식이 되어버린 소설이지만, 피상적인 이해만큼 사랑과 실연의 지독한 열정의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지식인 청년 베르터가 온전히 차지할 수 없는 한 여인에 대한 이룰 수 없는 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침내 자살하고 마는, 18세기말 당대에 베르터 신드롬까지 낳았던 감상적 낭만주의의 격정어린 소설이지만, 이는 서사(敍事)의 표면적 묘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마 지역 무도회에서 마주쳐 한 눈에 사로잡힌 영지 주문관의 딸인 실제의 여성 샤를로테에 대한 짝사랑의 경험은 소설의 서사 축을 형성하는 시대의 분위기에 맞춤의 골격이었겠지만, 정작 괴테가 소설을 통해 하고자 했던 목소리는 시민계급의 사회적, 직업적 한계에 대한 좌절과 그로인한 무기력이었던 것 같다. 사실 당대 시민계층은 이중적 모순에서 갈팡질팡했던 같다. 귀족계급인 상류사회에 편입을 원하면서도 그 진입여정이 요구하는 굴욕과 모욕의 인내라는 노예성에 대한 반감 또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한편으론 하층계급에 대한 차별로 인한 이익을 지속하여 누리고자 하는 마음 또한 물리치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점이다. 베르터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일은 시민사회의 숙명적인 신분의식이야.

물론 나도 차별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누구 못지않게 알고 있네,

다만 그런 차별이 내게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소설의 도입부 역시 청년 작가 괴테의 무도회 기억에 색을 입힌 것이어서, 그의 분신격인 베르터는 첫 눈에 영지 주문관의 딸인 로테에 빠져든다. 하지만 로테와의 친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미 약혼한 남성이 있는데, 궁정에서 큰 총애를 받는, 궁정관직을 지닌 훌륭한 자질의 청년 알베르트. 여행에서 돌아 온 알베르트가 나타나자 베르터는 로테를 떠나 친구와 어머니가 추천했던 공사(公使) 보좌역에 취임하고, 직업적 성취를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지각없는 천박함으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관례만을 고집하는 늙은 공사와 점증하는 갈등으로 직업의 미래에 한계를 절실하게 느낀다.

 

이윽고 공사의 상사인 C백작의 경고와 능력의 가능성에 우회적 칭찬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베르터는 공사보좌역을 박차고 나오는데, 그 결정적인 사건의 에피소드는 상류계급과 시민계급이 한 자리에 어울릴 수 없다는 엄중한 분리이고, 이는 그 무엇보다 선명한 차별, 직업과 신분적 한계를 특징짓는다. 상류 사회 신사숙녀의 저녁 모임이 있는 C백작의 오찬모임에 초대받은 베르터는 오찬 후에도 떠날 줄 모르고 어슬렁거리다 저녁 만찬을 위해 도착한 F남작, S부인, B양등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미 친교가 있었던 B양 조차 그를 외면한다. 급기야 C백작은 사람들이 자네가 여기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양이네.”라고 나가줄 것을 요구한다. 훗날 B(귀족으로 추정)으로부터 뒷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귀족 부인들이 당신과 같이 어울리느니 차라리 남편들을 데리고 나가버리겠다고 분노를 터뜨렸다는 것이다.

 

괴테는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에 주인공의 심적 변화를 호메로스에서 낭만주의 사조의 서사시 오시안으로 이동한다. 오시안이 호메로스를 내 마음속에서 몰아냈어.”, 격정적 영웅의 찬미에서 달빛 아래 선조들의 혼령을 이끌고 가는 거센 폭풍우에 휩싸여 황야를 헤매고 다니는 망령들의 신음소리이고, 고귀하게 전사한 애인의 무덤가의 (...) 애처로운 통곡소리가 그의 마음에 자리잡은 것이다. 청년의 마음에 들끓는 여인 로테의 소유를 향한 갈증은 그의 도덕성, 즉 출구없는 억제 속에서 광적 혼란으로 치닫는다. 그 결말은 독서 여부와 무관하게 알려진 대로 권총 자살이다. 그런데 베르터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현장 묘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포도주는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습니다.

사면 책상 위에는 에밀리아 갈로티가 펼쳐진 채 놓여 있었습니다.”

 

이 문장은 편집자가 독자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명목 하에 베르터가 남긴 쪽지, 부쳐지지 않은 편지, 그 밖의 정보들로 엮인 베르터가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와 자살현장의 묘사의 말미(末尾)이다. 앞의 문장은 술에 취한 충동적 자살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고, 뒤의 문장은 그가 자살 직전까지 레싱의 희곡작품인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고 있었음을, 이 작품과 베르터의 죽음과의 연관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베르터는 왜 레싱의 작품을 읽었으며, 책의 펼쳐진 곳에는 어떤 장면이 있었을까, 그 장면이 자살을 촉발한 결정적인 것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하게 된 것이다.

 

에밀리아 갈로티는 당대 독일 시민계급의 비정치적 행동양식에 대한 비판이라는 시선이 주를 이루었던 모양이고, 괴테는 이 작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품평을 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봉건 영주에게 레싱이 창을 겨눈 것이라고 비평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일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전제군주의 자의적 지배에 대항하여 도덕적으로 항거하는 결정적 발걸음이었다는 것이다. 무소불위의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영주민에게 군림하던 영주 혹은 군주와 빌붙은 귀족 나부랭이들의 횡포가 극심하던 시절이고, 엄격한 검열이 이루어진 시대이다 보니 레싱은 자신의 희곡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 부던히 애를 썼던 모양이다. 따라서 연극의 배경도 18세기 독일이 아닌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소공국 구아스탈라로 설정하여 자신의 삶에 혹여 미칠지도 모를 불행을 방지하려 했음이다.

 

희곡(5막 42장)의 내용은 에밀리아 갈로티라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한 바람둥이 영주가 이미 결혼이 예정된 에밀리아를 손에 넣기 위한 이중의 기만성을 띤 살해 납치 자작극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 자작극을 기획 연출하는 관방대신 마리넬리를 앞세운 비열하고 교활한 납치극을 벌이고서는 그 후과(後果)가 영주 자신에게 미칠까봐 마리넬리에게 책임을 씌우는 것이고, 권력에 위협당하는 여인이 정조(貞操)를 위해 아버지의 조력을 받아 죽음으로 권력이 자행하려는 치욕에 저항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시민 계급의 각성과 자의식을 일깨우려는 형상화인 것이다.

 

베르터는 아마 에밀리아의 자살에 내재된 도덕적, 정치적 저항의 의미를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결혼이 예정된 여인을 손에 넣기 위한 영주의 무모한 술책의 끝, 그 좌절이라는 비극성을 보았던 것일까? 청년 베르터는 시민계급의 직업적 성취란 귀족들이 독차지한 고급 관료가 아닌 하급 관리나 기껏해야 공사나 추밀 참사관이 한계인 것을 알았고, 결코 상류 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 깊은 무기력에 빠져들었으며, 이를 타개하는 방편이 한 여인에 대한 열정적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 사랑의 대상조차 궁정 관료인 남편을 둔 유부녀였으니, 이것은 자신의 현존이 지닌 한계에 대한 크나큰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시안의 서사시 속, 무덤가에서 들려오는 애인의 통곡 소리를 듣는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 되었을 것 같다. 250여년이 지난 오늘이라고 인간사회의 계급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명칭이 바뀌었을 뿐. 어쩌면 베르터의 차별에 대한 이중적 시선에 그 답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에 초점이 맞춰진 차별의 관점 말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말이 요즈음 유행하듯, 자기 이익과 자기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볼 때 갖는 그 수직을 향한 환상적 욕구, 이 욕구를 이용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는 계층의 조작이 지속 가능할 때 아마 화창한 미래를 꿈꾸었을 청년들의 좌절은 참담함이요, 자기 경멸의 역겨움일 것이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격정적 사랑에 휩싸인 청년의 차지할 수 없는 연인을 향한 내적 갈등이란 이야기에 당대 신분사회의 한계와 그 저항을 은닉한 꾀바르고 은밀한, 도래할 시민혁명의 전주곡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레싱과 괴테, 동시대를 살던 두 문학 거인의 작품은 어리석은 세상의 눈을 속이고 진실을 외치고자 했던 목소리들이다. 시간의 흐름은 하나의 텍스트에 다른 관점을 들이댈 수 있을 만큼 무상하게 변하는 것인가 보다. 불가피한 운명에 순응하지 마라!” 불가피한 것이란 없다. 아마 이것이 이들의 외침이었을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