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대 시인의 문장으로 시작된 은유의 정신사가 이 책에 이르게 했다. 배를 난파시키는 사나운 바람이라는 인간 시련의 상징적 은유는 18세기 프랑스인에 와서 양면적 성격으로 변화했다.
인간의 정념이란 그 얼마나 불행을 가져오는 걸까요! [...] 그것은 배의 돛을
부풀리는 바람이네. 돛은 때로는 배를 가라앉히기도 하지만 돛이 없으면 배는
나아갈 수 없다, [...] 만물이 다 위험하지만 그것은 모두 필연에 바탕하고 있네.
- 18장 「隱者」에서
호기심이 이끈 독서는 인간 삶의 행복과 불행을 마치 예정된 조화인 듯 주장하는 이야기를 만나게 했다. 사실 이에 대한 시시비비는 사유의 저편으로 몰아내고 이야기 그 자체에 빠져들어 보기로 작정하고 읽었다. 19편 이야기의 연작으로 구성된 이 동화적 작품은 볼테르 자신의 삶의 곡절들과 절대 분리 불가능한 것만 같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이야기는 그가 욕망하는 사랑의 기원이 담긴 것 같고, 바로 이 사랑의 성취를 향해 겪어야 했던 불운과 행운의 거듭되는 반전의 사건들 속에서 삶의 동력, 인간 삶의 원천들을 보여주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품의 제목인 자디그(Zadig)는 아라비아어로 진실을 뜻하고, 히브리어로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자디그 또한 고대 바빌론의 유복한 가문의 고결한 청년으로 성장한 현자이며, “당시 철학에 거슬러 1년은 365와 4분의 1일이며,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확신하는” 인물이다. 18세기 과학적 이성을 대표하는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분신일 것이다.
【출처: 동서문화사 刊, 『캉디드,미크로메가스,자디그』, 426쪽에서】
또한 소설 속 자디그의 궁정 생활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모압다르 왕의 왕비인 아스타르테는 그를 살해하려는 귀족세력으로부터 볼테르를 보호해주었던 샤틀레 후작부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몰이해와 소외로 고통을 겪던 볼테르를 알아주었던 이 지성의 존재에 대해 바치는 사랑의 서사로 읽을 수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경쾌한 작품은 가벼움 속에 번뜩이는 삶의 지혜들로 결코 진지함을 잃지 않으며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집안과 재산까지 고루 갖춘 청년 자디그는 바빌론 최고의 결혼 상대자로 역시 최고의 미인인 세미르와 약혼하여 결혼을 준비하던 중 이에 앙심을 품은 경쟁자 오르칸의 습격을 받는다. 세미르를 지키기 위해 결투하여 약혼녀를 빼앗기지는 않지만 눈에 상처를 입는다. 자디그는 한 쪽 눈을 치유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자 세미르는 애꾸눈 사내는 역겹다며 바로 오르칸과 결혼하곤 자디그를 멸시한다. 자디그는 명문 귀족과 재산을 지닌 종족들에 회의를 느끼고 심성 고운 평민인 아조라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정숙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며 그 천박성에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의 도움을 받아 시험에 들게 하여 그녀의 역겨운 위선을 스스로 이해토록 돌려준다. 아마 당대 프랑스 궁정사회 귀족들의 문란이 얼마나 기만에 싸여있는지의 비난이었을 것이다.
코믹한 이야기들을 이처럼 펼쳐내며, 당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버무려낸다. 그리곤 틈틈이 계몽주의 이성의 요소들인 세계의 현상과 대상들의 특성 연구에 몰두하는 자디그를 보여주며, 그의 이성적 지성이 수시로 광적인 멍청이들에 의해 위협받는 현실을 그려낸다. 그의 예리한 지성은 오히려 마법이라며 화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고발을 받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율법 논쟁을 종결짓자 신성 모독죄로 몰리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오늘의 독자인 우리들은 그네들의 역사적 사실을 조망할 수 있기에 당대에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한 볼테르의 비판적 견해로서 읽을 수 있게 된다. 1726년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감금하게 된 명문귀족이었던 발리에 드 로앙(소설에서는 오르칸으로 등장)의 사주를 받은 자들로부터 살해의 위기에 처했던 일, 볼테르를 궁정에서 몰아내는데 안달했던 궁정 권세가 부아예(Boyer)는 글자의 순서만 바꾸어 대주교 예보르(Yebor)로 등장하여 어리석음을 뽐낸다. 지나치게 박식해도 위험에 빠지고, 그래서 입을 닫으면 그것을 문제 삼아 위협하는 세상, 자디그는 외친다.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행복한 자로 불린다는 이유 때문에 시기와 질투로 파멸에 몰리고, 진실이 뜻하지 않게 입증되어 불행은 행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누군가의 행운이 오래 머무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행불행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그것은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섭리, 신적 질서의 조화로 향한다. “이성의 문제를 가진 것만으로 만족했다.”는 자디그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인간 개체의 운명의 증언에 있어서 섭리라는 숙명성으로 치닫는 것은 아무래도 시대적 사유의 한계처럼 여겨진다.
궁정 장관이 된 자디그는 왕비를 사랑하게 되고, 왕비는 왕의 앞에서 무심코 자디그를 빈번하게 칭송하게 된다.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에게 이러한 마음을 토로하는데, 친구는 현명하게 자디그를 경고한다. “사랑이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징후가 있는 법이거든, 자디그, 내가 이렇게 자네의 심정을 읽었는데 왕께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심정을 자네의 마음에서 발견하지 못했을지 생각해 보게. (제8장 「질투」)” ,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이성이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고의 말처럼 왕은 자기 눈으로 본 모든 것을 믿었고, 보지 않은 모든 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제 의혹은 확신으로 바뀌어나가고, 자디그를 살해하고 왕비를 독살한 준비를 끝낸다. 사랑과 의심, 그리고 증오가 폭발하는 이 이야기는 여느 멜로드라마의 재미를 훌쩍 넘긴다. 왕비가 총애하던 난쟁이 시종의 사전 암시 덕택에 두 사람은 각자 도피의 여정을 떠난다. 이 여정에서 겪는 고초들은 지역마다의 문화와 관습적 차이, 경제적 불균형과 분배에 대한 문제로, 그리고 당시 사제의 신학과 같은 망상에서 생겨난 속임수에 대한 지탄을 통해 과학적 이성에 대한 신념을 이야기의 저변에 도도히 흐르게 한다.
이윽고 소설은 사드의 유명한 소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에서 유명하게 된 “선을 낳지 않는 악은 없다.”고 인용된 원천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에 그 어떤 인과성이란 없다는 것, 인간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도 전체 질서 속에선 선의 원천이 된다는 생각, 예정조화설, 섭리 또는 운명에 도달한다. 설사 이것이 세계 원리라 해서, 인간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마 볼테르는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간 세계는 엄연히 악행이 있어 타자들을 궁지에 처박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분배는 왜곡되어 극단적인 괴리와 갈등으로 사회적 분열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악인은 몇 안 되는 정의로운 인간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으니 악을 신의 섭리처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면 아마 인간 세상은 벌써 종말을 고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이야기는 시련과 행운을 오가며, 라이프니츠의 인과성 없는 개체들을 조화로 이끄는 거대한 힘에 대한 삶의 일화를 제시한다. 내겐 볼테르가 이러한 당대의 사변적 성찰을 내세워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대를 전하려했다는 의혹만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서 소설이겠지만 말이다.
바람, 폭풍우가 우리를 난파시키는 악이지만 그것에 의해 우리는 삶의 추진력을 얻는다. 동의하면서도 온전히 수긍할 수만은 없는 반항심이 생긴다. 왜 바다여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정녕 바다위에 둥둥 떠다니는 배에 승선한 존재일까? 우리에게 단단한 대지는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옳은 것일까? 아무튼 나는 요즘 이 모순, 부조리의 불가능한 이해를 이해하려는 부질없는 짓거리를 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