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 토끼전 / 심청전 북현무 1
구윤숙.손영달 옮김, 고미숙 기획 / 북드라망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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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질서가 요구한대로 읽어왔던 옛 이야기를 이젠 이러한 틀을 벗어나 주체적인 읽기를 해보아야겠다는 내심을 실행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밥벌이의 근간이 있고, 게다가 읽을 책이 산더미인데,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옛날이야기를 굳이 다시 읽어 무엇을 입증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은 그럴듯한 핑계가 되어왔다. 그렇다고 몇몇 우리 고전 작품을 읽었다고 내 성장과정에 주입되었던 개념들이 단 번에 해소되어 마음이 정갈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일단은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하나의 작품씩이라도 읽어나가며 바로 잡아 내 마음을 조금은 후련하게 하고 싶어 한 걸음을 내디뎌 본다.

 

이 책 낭송, 토끼전/심청전 낭송이라는 말처럼, 소리 내어 고전을 읽음으로서 몸과 우주의 감응을 만드는 일종의 양생(養生)법의 실천으로서 기획되었던 듯싶다. 때문에 이 책의 저본(底本)도 수많은 판본과 이본(異本) 중에서 신재효 판소리(신씨 가장본)를 저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창본(昌本)을 두루 섞어 낭송대본으로 엮어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심청전>의 경우 주로 사용되는 완판본이나, 완판본 또는 경판본을 주요 저본으로 삼는 <토끼전>과 부분의 장면들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함에도 모든 텍스트에서 변화하지 않는 공통된 부분이 있으며, 그것은 당해 작품들이 전달하려는 중요한 메시지일 것이다.

 

이 책은 왜 <토끼전><심청전>을 한 권의 책에 같이 수록하였는지에 대해, 두 작품 공히 주인공이 물에 빠졌다는 것용궁에 다녀왔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면서 물()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맞춰간다는 액체(液體), 즉 유동성(流動性)의 지혜를 말한다. 그리고는 용궁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명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심청이나 토끼의 지혜를 보라는 얘기인 것 같은데, 너무 두루뭉술하고 포괄적 언어여서 뜬 구름처럼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말이다. 심청의 지혜가 대체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 토끼의 지혜는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보다 구체성을 가지고 작품의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집어 말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심청전>()’를 말하는 대표적 작품으로 꾸준히 호명되는 것이고, <토끼전>은 충()과 지배계급의 부패와 탐욕을 풍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를 토대로 전복하거나 공감하거나 다른 의견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 흔한 표면을 읽거나, 남의 다리 긁는 듯한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것이 다른 읽기는 아닐 것이다.

 


심청전 - 정말 효()에 대한 얘기인가?

 

우선 조선이라는 나라의 윤리적 배경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철저한 유교의 나라, 삼강오륜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윤리의 지표로 삼았던 사회이다. 세종은 백성을 장악 통제하기위해 그림까지 덧붙여 충성,효행, 열행의 삼강을 가르치는 삼강행실도를 만들어, 지배질서의 윤리를 강력하게 주입한다. 그 내용은 허벅지 살을 잘라 부모에게 먹이거나, 제 손가락을 잘라 뼈를 고아 드리고, 목숨까지 바치라는, 백여 가지에 이르는 극단의 이야기들을 열거한 윤리 모범집이다. 이러한 당대 백성들에게 폭넓고 뿌리 깊게 알려지고 체화된 도덕의 엽기적 훈계를 전제로 하여야만 심청전의 이해의 문을 열 수 있다.

 

눈먼 아비가 터무니없는 자존심으로 몽은사 화주승에 약속한 공양미 삼백석이 화근이다. 어린 딸의 동냥과 남의 집 살림을 거들어주고 연명하는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이의 생각없는 약속은 분명 눈을 뜨고자 하는 욕망과 빈곤의 모욕에 대한 반발심리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약조된 공양미는 효성 지극한 심청에게는 삼강행실도에서 말하는 지켜야 할 자식의 도리다. 문제는 이 공양미를 살림이 뻔한 마을에서 삼백석이라는 엄청난 백미를 구할 도리는 없다는 것이고, 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외부세계로부터 들여와야 한다는 것이다. 마침 남경상인의 바닷길 제례를 위한 제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고 공양미 삼백 석을 몽은사에 바치기로 한다.

 

, 여기서부터가 문제적이다. 심청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아비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이 진짜 효인가하는 물음이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에게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슬픔이다. 이러한 통한을 주는 것이 과연 효행인가 하는 것이 하나이고, 공양미 삼백 석을 자신이 살고 구할  방법이 이야기 내에서 불가능했던 것인가가 또 하나이다. 심청이 살아서 공양미를 바치면 눈 먼 아비의 공양을 계속할 수 있으며(효행이 중단되지 않는다), 3년 후면 아비의 눈까지 뜨니 이것이야말로 진짜배기 효행이 될 것이다. 실제 심청을 어여삐 여기는 승상 부인은 공양미를 자신이 마련하겠다며 심청의 인당수 제물로 팔려나가는 것을 만류하는 장면이 있다. 그럼에도 심청은 자신의 죽음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엽기적 훈계로 세뇌되어 어지간한 행위에는 무감해진 당대의 백성들에게는 극단적 행위 아니고서는 동조를 이끌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는 돼야 환호하며 감동할 수 있다는 작자의 의도가 있었다고 추정 할 수 있다. 이는 지배계급이 강요하는 삼강오륜의 뻔한 상투성을 알고 있는 백성에게 이 정도의 자극적 수위(水位) 아니고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리라는 반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해독하는 이들도 있는데, 심청의 죽음 선택은 효라는 이상(理想)을 실천하는 비장미(悲壯美)’라고 한다. 즉 효를 과시하기 위해 선택한 일종의 거대한 이벤트라는 것인데, 그렇게되면 심청의 행위인 효라는 숭고성은 이 작품에서 사라지고 말아버린다. 이 작품은 분명 효를 말하긴 하지만 자식의 죽음과 같은 극단의 희생을 요구하는 윤리는 뭔가 잘못된 것이라며 은근히 반기를 드는 것이다. 나는 이진경 교수의 의견에 공감하는데, 명령에 절대 순응함으로써 그 명령의 부당성을 드러내는 항의라는 지적이다.

 

도덕적 규범과 통제가 지엄하게, 혹은 잔혹하게 실행되던 조선조에서 직접 반기를 들거나 저항하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삼강실행을 극단적으로 실행함으로써 그들의 입맛도 맞추는 은닉된 반어적 전략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책 낭송~의 두 편저자 구윤숙, 손영달은 물을 지혜의 상징으로 보았는데, 심청이 몸을 던지는 바다는 오히려 깊은 바다인 심연에 빠져드는 것, 즉 모든 근거를 잃고 어둠 속으로 용해되어 새로운 가치의 재탄생을 위한 근본의 장소로 보는 것이 보다 구체적 의미를 지닌 해석이 되지 않을까? 심청은 조선의 효라는 극한의 도덕을 같이 가지고 뛰어듦으로써 그것들을 용해시켜버리고, 연꽃으로 재탄생하지 않는가? 연 꽃봉오리라는 꽃의 잠재성을 지닌 모습으로 재탄생하여 바다라는 거대한 가변적 흐름위에 떠있는 것은 이러한 해석에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경 상인에 의해 건져 올려진 연꽃, 심청은 도화동 눈먼 아비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마 당대 사대부들은 이를 해독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정말 효를 말하려는 것이었다면 심청은 아비에게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심청은 돌아가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갔다면 심청의 이야기는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을 것 같다. 자아를 죽이고 새로운 자아로 탄생하려던 행위가 무위가 되어버리는 것이고, 또한 옛 미명의 원작자의 비판의도가 소멸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도덕적 명령에 대한 지나친 복종의 이야기를 통해 그 명령 자체를 황당하게 만드는 역설적 비판으로 읽어야 한다. 부모를 위해 자식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인륜(人倫)인가?,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어야 하는 것이 인륜인가? 만일 이런 것이 인륜이라면 오히려 반()인륜을 택하는 것이 진정 좋은 삶을 만드는 진짜배기 인륜이란 말이 옳을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오늘날 더 이상 회자되어야 할 작품으로서 그 의미를 소진한 작품이 아닐까?

 

토끼전 - 속임수가 은폐한 것

 

책의 편저자들은 <토끼전> 힘 있는 자가 주린 자를 등쳐먹는 약육강식의 세상, 강자가 누리는 풍요는 무지와 부패와 병고(病苦)가 되어 스스로 옭아매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물론 이 해석은 이야기의 표면적 내용에서 도출되는 것이어서 하나의 해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평할 것도 정의로울 것도 이 풍진(風塵) 세상!”의 푸념이라고만 읽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히려 편저자들이 지나치듯 언급하는 말빨의 향연이라는 말에 주목하는 것이 이야기 속에 은폐된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말빨은 언제 느껴지는 것일까? 화려한 언변, 듣는 자의 귀를 솔깃하게 할 설득의 수사는 언제 구사할까? 이야기는 수중의 자라가 뭍에 사는 토끼를 잡아오는 이야기다, ()의 약()이 무용한 병을 앓는 용왕을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한 여정이고, 현혹당하여 수중에 끌려온 토끼가 다시 뭍으로 살아 돌아오는 일련의 술책 이야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속임수가 무한히 교환되는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토끼의 간이라는 것은 애초에 정당한 대가를 무용하게 만들어버리는 대상이다. 다시말해서 어떠한 증여도 교환도 불가능한 것이 문제가 지닌 근본적 난점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때 사용 가능한 방법은 오직 속이는 것 이외에는 없다. 토끼전 혹은 수궁가, 별주부전은 속임수 교환의 이야기이다. 속여야 한다는 것의 이면에 놓인 본질을 살펴야 하는 것인데, 토끼를 속여야 그의 간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생명, 재산의 강탈이 있는 것이다. 속임수는 이러한 강탈을 은폐하는 고도의 전략이다.

 

자라는 토끼를 토()선생(先生)이라 높여 부르며, 수궁에서의 고위관직이라는 속임수를 쓰고 토끼를 데려온다. 또한 용왕은 토끼에게 간을 아주 직설적으로 요구하는데, 이때 하는 말이 우리네 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만적 언어, 속임수인 위선의 말이다.

 

네 간을 내어 먹고 짐()의 병이 낫는다면 기특한 너의 공을 내가 어찌 잊을쏘냐. [...] 네 형용을 만들어서 사당 안에 앉힐 테고, 기린각 능운대에 네 이름을 새길 테니 살신성명(殺身成名) 그 아니냐.” -73쪽에서

 

소위 대의를 위해, 영광스러운, 혹은 성스럽고 고귀한 희생 운운하며 고귀한 자신을 위해 미천한 자의 자발적 증여, 자발적 복종을 압박하는 채색된 윤리의 기만적 언어이다. 토끼는 간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신선한 산바람 부는 곳에 꺼내 널어놨다며 진즉 말했다면 가져올 것이었다고 용왕을 속인다. 두 이질적 세계에 대한 앎이 없는 존재들이기에 이 거짓말이 먹혀든다.

 

뭍으로 돌아 온 토끼가 자라에게 한 마디 한다. 생명의 가치에 대소, 귀천이 어디 있느냐!”. 이 속임의 언어, 대의로 치장한 무수한 말들에서 강탈의 욕심을 배제하고 듣는다면 그것은 바로 가장 어리석은 행위가 될 것이다. 생명의 가치에 위계를 설정하려는 당대 지배계급의 태도와 유교적 질서를 비판하고, 그 통념적 윤리가 은폐하는 더러운 욕망을 질타하는 것이다. 아동용으로 재구성된 이야기책들을 보면 지혜()의 얘기로 윤색되어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을 요구하는 것 일색이다. 우리 민담이나 옛 소설, 판소리 등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달리 변신한 작품들의 출현을 기대하게 된다. 구태, 극복하여야 할 지배질서의 위선을 답습케하는 책들은 이제 그만 지양(止揚)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 차례의 다시 읽기도 역시 많은 왜곡된 해석이 만연하는 <흥부전><허생전>을 생각하고 있는데, 언제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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