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잡기록은 지난 방법서설 제1부에서 제3부에 이르는 감상글에 이은
제4부에서 제6부까지에 대한 정리 및 소회이다.
“정신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이 있다. ...지성에 의해 지각했던 것들까지 똑같이 의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발견하려 했던 것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확실히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오로지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것은 어떤 근거들에 의해서도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3부 까지가 철학 제 1원리를 도출하기까지의 방법에 대한 서술이었다면, 제 4부는 책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최초 사색의 결과와 그로부터 파생된 일반 규칙의 도출에 대한 사유의 진술이며, 제 5부에서는 인간 신체와 정신의 분리에 따른 이성이라는 보편적 도구의 인간 고유성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제 6부는 그의 자연학 저술들의 출판에 대해 가해질 교황청 비난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 그 불안 심리 및 『방법서설』을 포함한 자신의 자연학 저술들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저술한 이유를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방법서설』의 철학적 고유성은 정신 작업 전체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전통적인 고전 논리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논리 방법을 고안하고자 하였던 제 1~3부에 걸친 격률과 도덕 규칙이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에서부터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로 이어지는 근대철학 전체의 문제였던 고전 논리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 정신의 방법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절실했다고 할 수 있다.
제 4부
데카르트의 방법은 다름 아닌 반성적 인식, 관념에 대한 관념이라 할 수 있다. 즉 가장 완전한 방법이란 정신에 주어져 있는 가장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에 따라 어떻게 인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방법은 지성의 자기 탐구요, 자기반성이다. 지성은 이로써 인식을 확장해 나아간다. 그는 이를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절대로 그른 것으로 내던져 버리고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무엇을 찾는 것이다.
“참된 원리는 모든 의심의 위협 밖에 놓여 있으며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을 만큼 명백하고 확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의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버렸을 때 그의 신념 속에 대체 무엇이 남았는가를 깨닫는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동안에도 자신은 의심하는 무엇이며 따라서 자신은 실존한다는 진리, 제 1의 철학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Je Pense, done je suos/ cogito, ergo sum)” *註1 참조
그런데 여기에는 관념 기원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만일 관념이 생각의 주체인 ‘사유하는 나(Cogito)'보다 많은 능력을 지닌 것으로부터 왔다면 이것은 코기토의 능력 밖이다. 결국 관념이 코기토의 소관이 되려면 능력이 더 작은 것으로부터 와야만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관념 기원의 문제는 자신 속에서 연역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신의 실존 문제를 통해 사유하는 나의 관념 속에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여 제1원리의 참됨을 의존한다. 이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순환논증인데, 증명되어야 할 것이 이미 그 증명에 전제 되어 있는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논증인 까닭이다.
신의 실존은 나의 생각으로부터 증명된 것이고, 나의 생각은 신의 실존에 의해 보장받는다는 논리는 논증규칙의 위반이고 사실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의존해야 할 논리가 이렇게 무너지면 그의 제 1 철학 원리도 의심을 극복한 명증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많은 비판적 사유들로 그의 코기토에 의심이 짙게 드리워지긴 했으나, 모든 의견에 대해 의심의 근거를 요구하는 ‘방법적 회의’는 참된 원리를 찾으려는 인간 사유에 귀중한 방향을 제시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제 1원리에 이르는 4가지 논리규칙으로부터 “극히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모두 진실이다.”라는 일반규칙은 인간 관념의 실재성을 이해하는 귀중한 지표로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제 5부 ~ 제 6부
제 1 원리로부터 연역한 진리의 연쇄를 개괄적으로 제사하고 있는 제 5부는 데카르트의 이원론(二元論)과 신체에 대한 기계주의적 주장이 특별히 관철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4부에서 이미 “나는 하나의 실체로서 그 본질, 혹은 본성은 다만 생각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존재하기 위한 어떤 장소도 필요하지 않으며, 어떠한 물질적 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며, “나를 존재하도록 하고 있는 바의 ‘정신’은 물체(신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며, 정신은 정신으로서 존재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정신과 신체의 분리를 확언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에 있어 제 1의 근본적 운동인 심장과 동맥의 운동은 신체와 분리된 정신의 조력을 받지 않는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시계추나 톱니바퀴의 힘, 위치 및 모양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운동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기관의 배치와 그 성질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기계적 운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신체의 모든 부분에 운동을 주는 동물의 정기(精氣) 또한 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훌륭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계적 성능에 불과하다고 확언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인간이 이러한 기계적인 동물과 다른 것은 말(言)과 기호의 조립 사용이라는 ‘이성이라는 보편적 도구’를 지녔다는 점에 있다고 역설한다. 이는 동물이 신체를 구성하는 기관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이성이라는 인식 능력, 즉 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이성적 정신은 물질의 힘으로부터 추출할 수 없음의 증거, 정신과 신체는 분리되었음의 명확하고 판명 가능한 참된 진리라는 것이다. 아마 오늘날 유일신을 신봉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이미 무너진 믿음일 것이다.
6부는 그의 자연학 저술에 대한 방법론의 진술과 일반적 원리 획득을 위한 온갖 특수문제의 실험을 통한 제 1원리의 발견과 그 연역의 가능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더욱 시선을 끄는 것은 갈릴레이에 대한 교황청의 심판이 가져온 불안 심리로 발표 예정이었던 그의 자연학 저술들에 혹여 잠재할지 모를 위험성이 가져올 두려움에 대한 변명과 그럼에도 자신의 학문은 참된 진리이기에 발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들의 구구절절한 정당화 논리들의 술회이다.
출간을 미룰수록 그의 저술에 대한 세간의 의혹이 증폭되어 자칫 교황청의 도덕적 잣대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신의 내용이 있음을 자인하는 모양새를 회피하기 위해 부득이 출간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을 떨쳐내는 데는 미흡하였던지, 자신의 저술들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저술하였음을 부연 설명한다. 대중이 사용하는 통속어인 프랑스어가 자연적 이성만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더 올바르게 이해주리라는 생각과, 이들을 재판관으로 가지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로마 교황청의 특정인들과 일부 극단적 도덕주의자들의 비난을 피하고 대다수 시민의 지지를 통해 칼날을 피하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결 어
데카르트 자신은 신의 실존 증명과 코기토가 참임을 증명하는 데 순환논리를 사용함으로써(비록 데카르트 자신은 순환논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존재 증명에 실패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에 이르러 ‘가장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을 ‘인간 자신으로부터’라는 ‘자기 완결적 관념 형성 모델’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어주었다. 즉 참된 관념의 형상이 어떤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본성 자체에 의존해 있다는 주장으로서, 관념에서 모든 외부적 원인을 배제하고 신의 관념을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지성이 제 능력 안에서 길어낼 수 있는 관념들 가운데 가장 완전한 관념으로서 설명해 내는 초석이 된다.
과학과 이성을 기초로하는 『방법서설』 속 많은 사유가 오늘에 이르러 그 확신이 부정되거나 흔들리고 있지만, 그가 사유의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이성의 윤리 규칙, 진리 추구 방법론은 여전히 인간 사고의 진보를 위해, 앎이라는 지혜의 발견을 위한 필요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인류 정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고귀한 인간 사유의 도전을 보는 것은 어떤 충만감과 함께 겸허함의 필요를 느끼게 한다. 오늘 우리들의 사회에는 정보가 난무한다. 진정한 앎, 참된 것이란 극한적 회의를 수반하는 사유의 처절함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지금의 사회에는 사유하는 존재들이 점점 쪼그라드는 것만 같다. 거짓이 횡행하는 사회는 이같은 처절한 사유 없음에서 자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註 1) 이 제1철학 원리 명제는 프랑스어로 저술되어 발표되었다. 따라서 코기토(Cogito)를 비롯한 라틴어 번역문장은 데카르트의 완전한 진술을 의미하지 못한다. 특히 그가 선언하듯 새로운 논리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삼단논법식의 해석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식의 해석은 오류라는 학계의 비판이 존재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동시적인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