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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 ㅣ 가족특강 시리즈 2
이희경 지음 / 북튜브 / 2020년 9월
평점 :
이 책은 '가족 특강'시리즈 두 번째 권으로 『기생충과 가족』, 『안티 오이디푸스와 가족』에 이은 세 번째 읽기이다. 자본주의의 동력축으로 근대 이후 독특한 구조로 탄생한 핵가족(엄마-아버지-아이)이 '물적 토대'의 붕괴에 따라 해체, 분열되며 야기되는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성찰과 그 대안의 모색이라 하겠다. 저자는 '루쉰'의 소설 「광인 일기」를 비롯해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한국어 번역판 제목)』, 영화감독 김기영의 작품 《하녀》, 《육체의 약속》등을 통해 근대 이전의 가족 형태와 오늘의 핵가족의 차이를 설명하며, 나아가 '스위트 홈'이라는 환상에 가려진 가족주의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가 오마주 했다는 김기영의 《하녀》는 그야말로 원만한 가족, 행복한 가족이라는 판타지는 타자의 배제와 낭자한 피 위에 들어선 잔혹한 동화라고 말하고 있다. 핵가족 탄생과 관련된 이젠 고루해진 사설은 이쯤에서 그쳐야겠다. 문제는 21세기 오늘, 우리네 사회가 이러한 핵가족이 존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아마 1997년 외환위기로 해체가 시작된 이래 핵가족을 토대로 한 물적 기반이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까닭일 것이다.
경제적 기초 단위로 작동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소위 '정서적 연대'라는 핵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은 쉽게 허물어져 내린다. OECD 통계는 이혼율 1위 국가에 한국을 올리고, 1인 가족과 2인 가족의 증가와 같은 가족 형태와 주거 형태의 변화는 물론, "모성의 변화뿐 아니라 부부관계, 낭만적 연애에 기초한 내밀한 사랑이라는 신화도" 이제는 작동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들은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문제는 가부장제야!, 남자들이 문제야! ", 기존 가족 형태가 무너지기 시작된 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이렇게 지체된 사회적 담론은 퇴행적 진단으로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기만 한다.
물론 이 같은 가족 형태의 붕괴가 반드시 결핍의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그리고 관계의 독점과 배타적 이기주의와 같은 핵가족의 속성마저 바로 해체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양하는 남성, 아이를 양육하는 여성, 정서적 보살핌을 받으며 잘 자라는 아이"라는 삼각형 구도를 깨뜨리는 근인(根因)으로서 자본주의체제가 요구하는 물적 소비와의 균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루쉰의 「아Q정전」속 '정신승리법'을 삶의 신조로 하는 아Q란 인물이 마침내 이 좌우명, 삶의 습속을 의심하는 "성욕과 식욕 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 좌절"되는 순간을 겪는 장면은 '연애의 비극', '생계의 비극'이 어디에 토대를 둔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 인간 세계의 모든 습관, 체제의 성립은 물적 토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이다. 이 토대의 붕괴가 몰고 온 오늘의 가족주의 해체 현상은 어린아이는 물론 노인에 대한 돌봄 노동의 상실에 더해 급진적 기술사회로의 진입이 야기하는 유휴노동력의 양산, 초고령화 사회화로 인한 비용의 증가 등 사회적 문제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세계, 새롭게 요구되는 가치로의 '이행'을 위한 대안이 모색되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고 저자 이희경은 지적한다. 즉 변화된 질서를 따라가지 못하는 담론 지체로 인한 윤리적 공백의 발생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정서적, 경제적 안식처였던 핵가족의 붕괴는 폭행과 학대는 물론 버려지는 아이들, 방치되어 고독사로 발견된 노인들의 양산이라는 돌봄 노동 상실의 결과를 난폭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자기 파멸성을 내재한 핵가족으로 다시금 회귀하여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대안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해체되는 가족주의를 그저 보고만 있을 것인가?
항상 해결하기 힘든 난제를 마주하면 사람들은 과거의 향수를 되살려내려 한다. 아마 근래의 레트로 열풍, 1970년대 디스코를 소환하여 추억의 향기에 취하게 한 최근의 빌보드 차트 1위 곡이나, '응답하라 1988'과 같은 복고적 드라마를 통해 "정서적 위기와 돌봄 위기를 다시 가족 안으로 쑤셔 넣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부활시키는 시간 역행적 질서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 가족주의가 어떠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시계를 뒤로 돌릴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경우, 즉 속수무책으로 아무런 개인적, 사회적 대안도 없이 가족의 해체를 수용한다는 것은 버려지는 아이, 혐오의 대상으로서 노인, 에로스를 대체한 성폭력 ..., 한마디로 "공망의 세상이 될거"라 예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야만적 퇴행이 아닌 문명적 형태의 질서정연한 연착륙은 무엇일까? 결국은 우리가 배척하도록, 경쟁의 대상자로서, 밟아 뭉개버릴 대상으로 배운 타자와의 관계 회복, 새로운 관계망의 형성이 구축해야 할 새 질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동성결혼, 소울 메이트, 다자간 사랑(폴리 아모리)을 전제한 집단결혼과 공동 양육 및 재산공유체제인 일종의 집단가족제로서 '폴리 피텔리티' 등을 제시하고 있지만, 과연 이것이 가족을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크로 정착할 수 있는 것인지는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들이 잃어버린 타자와의 공생적 관계의 회복은 "자기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서, 연습"해야 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덕목일 것이다. 삐걱거리는 자본주의와 동행하던 가족주의의 붕괴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을 지금 종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대와 연대의 세계라는 그 구체적 이미지를 그리지 못하는 내가 남는다. 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은 진정 고집스레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 어쩌면 작은 관계들의 형성부터 시작하라는 저자의 조언이 변화의 출발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