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갱어의 섬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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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는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 - 에도가와 란포

 

본명 히라이 타로(平井太郞)’, 필명 에도가와 란포의 이 좌우명은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간단명료한 문장이리라. 정신분석학, 분석심리학을 기저(基底)로 하여 과학과 예술의 결혼이라고 까지 한 란포 소설을 관통하는 정신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단편 두 작품과 중,장편 각 한 편씩 네 편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작품집은 인간의 내적 본질, 그 내부의 모순된 감정들,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를 걷는 불안함과 두려움의 음습한 기운이 전체를 지배하며 흐르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한다.

 

소위 범행의 빈틈을 발견하여 범인의 범죄사실을 입증한다는 탐정소설, 즉 미스터리의 형식이 근간이지만 이에 더해 기이하고 으스스한 란포 특유의 환상문학적 요소는 여타 추리문학 작품과는 다른 독특한 읽기를 선사한다. 아마 표제작인 중편 도플갱어의 섬 (원제목: 파노라마 섬의 奇談)이야말로 이러한 감정이 가장 강렬하게 구사된 작품일 것이다. “영혼을 파고드는 고혹적인 인외경(人外境)”이라는 인간계를 초월한 듯한 낯선 정경, 어떤 악마적 아름다움 그 자체인 인공적으로 축조된 섬의 분위기에 그야말로 생명력의 압박을 느낄 만큼 괴이한 느낌에 압도되게 하는 작품이다.

 

좌절한 삼류 시인인 이토미 히로스케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거부(巨富) ‘고모다 겐자부로의 죽음을 이용하여 사자(死者)가 살아나 귀향하여 꿈꾸던 낙원, 몽환적 미()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축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이 살아난 사자인양 행세하기까지의 여정도 그 범죄적 행위의 대담함과 함께 흥미진진한 요소이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죽은 자의 아내인 치요코에 의해 의심이 증폭되어 그녀를 살해하기 위해 자신이 축조한 특이한 예술공간인 섬으로 동행하여 서술되는 인공적 창조물인 섬 자체의 그로테스크한 묘사들과 카니발적 망상의 형상들에 대한 당혹감일 것이다.

 

이 작품을 미의 극한을 추구한 탐미주의 소설의 끝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서울 만큼 선명한 해저 별세계, 벌거벗은 여자(裸女)들의 연화좌(蓮臺)를 타고 당도하는 골짜기 밑바닥 탕에서 보는 육체의 급류, 원근법에 의한 착시효과를 이용한 파노라마 수법으로 자연을 왜곡하여 현실 세계를 마치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 같은 불가해한 악몽의 공간으로 바꿔놓은 세계는 섬뜩하고 괴이한 요소로 인해 혐오감으로 울렁거리게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감정은 현실세계가 파괴되면서 발밑이 아득해지는 충격과 섬뜩한 뭐라 말 할 수 없는 불협화음, 그 괴상한 아름다움의 매혹이랄 수 있다. 현실 세계에 발 딛을 곳 없던 인물이 욕구 충족을 위해 창조한 환상의 공간은 마치 이 세상을 벗어난 황천길의 정적, 혹은 극락의 환희를 연상케 한다. 사취한 아내, 치요코의 목을 죄며 뒤엉킨 두 남녀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죽음의 유희로 묘사되고 황홀한 쾌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락으로 그려지기까지 한다. 예술 지상의 탐미적 장면의 결정판은 자신의 신상이 발각되자 불꽃과 함께 산산조각이 되어 비처럼 떨어지는 선혈과 살덩어리일 것이다. 아마 그로테스크의 정의인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의 파괴, 초자연적이고 자기모순적인 세계에 대한 신랄한 조롱, 그것이 아니었을까?

 

이와는 달리 비교적 미스터리 탐정소설의 요소가 우위에 있는 작품은 첫 수록작인 단편 심리 시험지붕 속 산책자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작품 역시 당대에 부상하던 꿈과 무의식의 통찰인 인간 내면의 과학적 탐사인 정신분석의 심취를 엿보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착상을 고스란히 빌린 셈이라고 란포가 고백하였듯이 심리시험은 학비와 생활비로 쪼들리는 대학생이 큰돈을 지닌 노파를 살해한다는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만 라스콜리니코프와 달리 심리시험의 주인공 후키야 세이치로라는 인물은 윤리적 책임이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감정이 싹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돈을 갈취하기 위해 살인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 역시 단순한 절도보다 발각의 난이도에서 살해하는 것이 잔혹한 대신 깔끔하고 걱정이 없다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살해 행위에 있어서도 교살 후 잭나이프로 다시금 심장을 정확히 찔러 확실한 살해로 매듭짓는 것 또한 강박 신경증적인 범인의 심리를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범죄 심리적 서사의 세밀함에 더해 단어 연상시험을 통한 심리시험의 과학적 성과 소개가 이 소설의 의도로 이해되지만 란포의 이후 소설의 중심축으로 활약하게 되는 탐정 아케치 고고로의 캐릭터를 접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편 지붕 속 산책자는 단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이루어지는 사례의 한 인물을 만나고 있는 기분을 느낄 만큼 성적 상징물들로 그득하다. 어느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회의로 방황하는 염세적 인물이 새로 이사해 간 하숙집 반자널 위를 밤마다 살금살금 배회하는 이야기다. 벽장에 들어가면 안락하겠다는 유혹, 우연히 손을 뻗었다 열리는 반자널 위의 동굴 입구 같은 천장 구멍, 독액을 흘려 넣는 천장의 옹이구멍 등은 주인공의 억압된 욕망의 모습들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의 충족되지 못했던 사랑의 결핍, 혹은 부권에 의한 금지의 강제라는 트라우마가 성인이 된 남성에게 표출되는 정신병적 드러남의 본보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만 같다.

 

동굴같은 어둠에의 유혹, 해방된 욕망은 지붕 위를 거닌다. 제어되지 않은 무의식은 살인조차 흥미, 쾌락의 요소가 된다. 이내 실현되자 살인행위의 쾌감조차 별거 아닌 게 된다. 탐정 아케치 고고로의 활약이 완전범죄 같은 살해사건의 빈틈을 집어내어 미스터리 소설의 완성을 이뤄내지만 이보다는 이 작품의 문학사적 위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가 뒤섞여 유입된 20세기 당대 일본문학의 흐름을 살피는 데 일조하는 대표적 작품으로서 읽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을 듯싶다.

 

1925~1926년에 발표된 이들 세 작품과는 달리 란포가 중년(41)에 이른 1934년에 발표한 장편 검은 도마뱀은 란포 작품 중 손에 꼽는 수작중의 하나가 아닐까 여겨지는 본격 탐정소설이라 하겠다. 농염한 섹소폰 소리와 그에 따라 흔들리는 보석춤을 추는 나체의 여자, 그리고 그녀의 율동에 따라 꿈틀거리는 도마뱀 문신은 광기와 도취, 혐오와 환락의 기이한 조합으로 독자의 시선을 일거에 잡아들인다.

 

대표적인 탐미주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에 의해 각색되어 공연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여도둑과 사립 탐정의 공개적인 대결이라는 전통적 형식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 도입되는 도구들은 일견 세련되게 용해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종의 도플갱어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기 상()이라든가, 밀랍인형이 작품에 뒤섞이지 못하고 서걱되던 초기작과는 달리 내용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그 상징적 책임을 다해낸다는 점을 들고 싶다.

 

세상의 아름다운 건 모두 수집하려는 일명 검은 도마뱀을 통해 악마주의를, 미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한껏 드러난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표정과 자태만큼 아름다운 건 이 세상에 없을 거야.” 묶인 채 대형 수족관에 처넣어 호흡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인간을 즐기고, 그 사체를 박제화하여 아름다움을 모으는 마조히즘, 편집증적 광기는 여자 아르센 뤼팡과 탐정 아케치 고고로와의 치밀한 대결과 어울려 미스터리 문학의 위치를 한 단계 올려놓는다.

 

어쩌면 란포는 존재의 가장 신비로운 충동들을 내보이는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모순되고 불확실하게 흔들리며, 저 어두운 심연에 꿈틀대는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관심, 바로 그것을. 우리의 지각 인식체계를 지배하는 시간, 공간, 인과관계의 선험구조를 넘어 작동하는 그것, 그 환상의 세계와 추리, 과학논리 세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란포 소설의 세계는 기묘한 감각적 긴장과 이질감의 차원으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이질적이며 매혹적인, 으스스함에 가능성을 열어놓은 란포의 세계에 잠시 빠져들며 더운 열기를 떠나보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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