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하게 비뚤어진 밑둥치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빈 구멍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나무 외과수술’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발포성 수지를 사용하여 숨도 쉴 수 없이 아예 틀어막아 버렸다. 이 구멍은 원래 도깨비들의 살림집. 한여름 밤의 이야깃거리로 남아 있어야 할 도깨비들은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 많던 도깨비들이 터전을 잃으면서 우리들의 낭만 시대도 먼 옛날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211-212 김제 봉남면 왕버들나무 박사의 지식과 더불어달빛 가득한 마음.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5년 만에 다시 읽는데 더욱 좋다.
<야구장>에서 서술자는 소설 습작을 보낸 이의 글을 평하며“소설로서의 긴장”이 전혀 없다고 한다.”소설 안에 단 한 곳이라도 좋으니 돌출되어 빼어난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포인트로 삼아 소설의 수준을 끌어 올릴 수 맀는 것은-원리적으로는-가능하다“라고.이 소설집의 실린 여러 단편들이 저 서술자의 평을 다 만족하지는 않는다. 에계 하루키가 요것밖에 안 돼! 싶은 것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어떤 매력들이 있다.그것은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구토 1979>에 나오는 골동 레코드 교환회 따위를 열어 한잔 하며 얘기해야 할 일이다.
밀교 교리와 역사 설명이 9할이 넘는다. 관련 문화 유적은 쥐꼬리만큼 살짝 언급할 뿐이다. 후자에 대한 조예는 전혀 없는데, 다만 목록을 정리해 사진과 함께 짧은, 현지 안내문보다 소략한 내용을 수록했고, 제목에 미끼로 던져 둔 책이다.불교 교리니 어렵다는 말씀.도서관에 볕은 잘 들고 아주 푹 잘 뻔했다.그래도 146쪽까지 읽다니.일본에 가면 구카이가 아주 석가모니보다 더 귀하게 흔히 숭앙되는데 그가 밀교승이다. 라이벌 사이초 역시. 의례가 중심인 밀교와 일본이 잘 맞았단 얘기반면, 중국은 당나라 때 잠깐, 우리는 고려대 성행. 그리고 사라짐. 어디로? 만다라 등의 주문과 의례로. 언제? 조선 태종과 세종 때 교파 통합 당하면서.삼국유사에도 나오는 문두루비법이 밀교인데, 일본에 흔한 명왕 등의 밀교 도상이 우리에겐 단 한 점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다. 장기 미완독으로 남을 듯하다.
얼마 전 둘째 중학교 졸업여행차 다녀온 교토숙소를 교토역보다도 남쪽 10조에 잡았는데가모강까지 걸어가는 길에 보이는허름하고 땅콩집처럼 올망졸망 붙은 집들을 보면서모녀는 저게 딱 하루키의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에 나오는 삼각형 집 같다며 즐거이 재잘댔다.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 둘째의평소엔 닫혀 있던 방에 청소기를 돌리러 들어갔다가책상에 놓인 것을 보고 덥석 집어 읽는다.파피루스라는 생소한 출판사에서 낸, 1993년 초판. 아내가 처음 산, 하루키 책이라고 한다.파스타 면의 원료인 듀럼을 ‘듀라므’라고 번역해 놓기도 해 구수하다.오뉴월 바람처럼끈적이며 시원하게지나간다.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이고 있’는 다양한 고독을 지켜본다.
난삽한 언어보다는 평이한 언어를 좋아한다.그러나, 시가 평이한 언어라는 형식에 지나치게 심상한 내용을 담을 때“안식년 때 잠시 노모와 누이가 있는 지리산 속에서 지내며 산시를 쓴 적은 있지만 나는 숲해설가도 아니고 초목의 종류나 쓰임이나 생태도 모르지만 내가 이렇게 숲을 좋아할 줄 몰랐다.“ 91당황스럽다. 이것이 시인가? 행갈이만 한 일상어. 그것도 시겠지.그러나, 단 한 구석의 감탄과 감동과 놀람과 설렘, 격정과 슬픔 등의 온갖 정서가 없다면굳이 시를 왜 읽겠는가. 재미있는 쇼츠나 보지.놀랍게도 이 시집엔 눈길이 머무는 구석이 단 한 곳도 없다.의아한 몇 구절이 있을 뿐이다.”평소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꿈에도 그리던 바다의 품을 향해 혼신을 다해 내달린 흙더미가 아름다운 해안도로 위로 질주할 때의 활시위 같은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도로와 함께 온몸을 던져 바다로 향할 때 그 절벽의 높이만큼 치솟았을 짜릿한 전율/도로와 바다의 경계를 짓는 높은 절벽의 교만함도 허물어버린 치열한 흙의 정신이 내 시의 정신을 닮았다.“ 13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팽팽하고 짜릿하고 치열한 정신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담백하다 못해 아예 맹물 한 사발 내놓고 치열한 요리혼이 담긴 요리라고 우기는 꼴이다. 이런 시집이 스무 번째라고 한다. 세상은 요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