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에서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3
천상병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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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같은 일이지
군부독재와 공안정치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의기가 있는 사람에게.
못 참고 정에 맞아 떨어져 나가기 십상이었거든.
천상병은 똑똑했고 두주불사였을 뿐 두드러지게 의로운 사람도 아니었는데 1967년 박정희 정권의 대규모 간첩 조작사건인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패가망신하고 말아.
고작 6개월간 갇혀 있었는데.
얼마 전에 천수를 누리고 피해자들에게 사죄도 하지 않고 뒈진 고문 기술자 같은 것들에게 숱한 고문을 당하고
생식 기능을 잃고 정신도 온전치 못할 정도로 후유증을 앓지. 1970년에 행불이 돼.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당하지. 친구들이 그가 죽은 줄 알고 그의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내지.
기적 같은 일이지. 그뒤로도 여러 한국인들은 여러 모습으로 살아 남았지. 잘 살지.

그래서 천상병의 이 목소리는 참으로 아름다워. 처절한 고통과 가난 속에서 피어났으니.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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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꿈을 꾸다 b판시선 25
이권 지음 / 비(도서출판b)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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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꿈을 꾼다니
얼마나 많은 꽃이 나올까
했는데, 달맞이, 수련 등 몇 송이 나오지 않는다.
철도 노동자로 은퇴한 분이라는데
2018년 무렵 현실이 훨씬 많이 나온다.
세월호도 자주, 당시 촛불도 여러 번

“하느님과 부처님과 천지신명이 계시다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또 일어난 것이다
신의 귀싸대기라도 실컷 후려쳐 주고 싶다

진도 앞바다 세월호에서 시리아 칸셰이쿤 마을에서
아이들을 외면한 신들을
더 이상 섬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늘 그동안 마음속에 고이 모셔온 경전들을
모두 불태워버렸고 내 안에 깃들어 살던
모든 신들을 내쫓아버렸다“

하늘을 찌르는 분노가 담담한 언어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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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걷는 길 창비시선 521
황규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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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은 여전히 가난하다.
가난은 그의 시의 원천이고, 삶이고, 현재다.
지긋지긋한 그것을 여전히 붙들고 있으며 매여 있다.
벗어날 수 없는 노동자다.

그러나 구질구질하지 않다.
당당하다.
“가난이 적의 심장을 관통하듯
말이 되지 못한 그리움이 동을 틔우기 때문”

동학을 읊은 연작시가 유난히 좋았다.
단단하고 씩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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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살아주고 있어 창비시선 527
백무산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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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도끼를 처음 만든 사람은 

자신이 한 일에 스스로 놀라워 

마음 끌리던 사람에게 먼저 달려가 선물을 주고 

처음으로 입을 열어 사랑을 고백했을 것이다

처음 돌도끼는 시였다가

훗날에 가서야 연장이 되었을 것이다"

- 기원에 대하여


사랑의 고백이고,



"나는 그 사내에게 시의 행방을 묻네 

쌓아둔 지식도 전답 같은 권력도 

남의 노동으로 얻은 낭만도 고래등 같은 자아도 

족보 같은 자의식도 비단 같은 기교도 버리고 

집을 버리고 나오지 않겠느냐고 

맨발로 훌훌 걸어 나오지 않겠느냐고"

- 집을 버리고


지식, 권력, 낭만, 자아, 자의식, 기교 따위는 당연히 버려야 하는 것이고, 집마저 버리고 맨발로 훌훌 걸어 나와야 얻는 것이다. 자본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알량한 문학 권력을 추구하는 자의식과 기교들을 비판한다. 19세기 요절 시인 이언진이 떠오른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려거든 밥그릇을 걷어차고 남들이 간 길을 가지 말라던.



"누구였을까 물결 위에 피었다 바람에 지는 꿈들을

처음 바위에 새기려던 자들은 

돌아서면 다시 고쳐 써야 하고 

자고 나면 박박 지워버리고 싶던 말들 누가 처음 바위에 붙들어놓으려고 했을까 

바위를 향해 이건 '나'라고 처음 외친 자는 누구였을까 

자아에도 기원이 있다면 

풀잎처럼 피어나는 시의 마음이었으리"

- 기원의 역사 반구천 암각화 앞에서


풀잎처럼 피어나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아의 기원이다. 나를 나라고 외치는 것이 시다.


 

"내 고향에는 오래된 시 무덤이 하나 있지

임진왜란 때 싸우다 죽은 의병장 

적진에 있는 그의 시신을 찾아올 수 없어 

그가 쓴 시와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쓴 시를 묻어

봉분을 만든 것인데

시 아닌 그 무엇도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없었다는 것인데"

- 주인 잃은 저들이 비바람 속에서


사람이라는 한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백무산은 시인이다.

그의 직업은 "슬픔을 노래할 의무가 있어 사라진 것들을 애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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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 걷는사람 시인선 130
허유미 지음 / 걷는사람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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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섬, 제주, 해녀, 4•3, 이주노동자
가 시의 내용이다.
그런데 꼭 ‘새로운 언어’를 써야 하는 것일까?
해녀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시가 아닌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시적 대상과 멀어지는 언어다.
정방폭포 앞에서 무조음악을 연주하는 꼴이다.
물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담백한 언어로 다룰 수 있을 대상이라 아쉽다. 그저 내 취향의 고백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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