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는 식물들 - 아직 쓸모를 발견하지 못한 꽃과 풀에 대하여
존 카디너 지음, 강유리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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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민들레는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는 유년기의 욕구, 바람 속에 자유로이 날고 싶은 충동을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민들레는 성인의 진지함, 절제, 예의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것은 교외 지역에서 불문율처럼 통하는 성적 억압의 밑바탕이 되어, 빨래를 널어서 말리는 행위나 민들레꽃이 만발한 상황을 금기시한다. 불쾌한 민들레를 없애고 도를 넘는 현란함이 문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억눌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진입로에 세워둔 번쩍이는 대형 자동차, 남근처럼 다듬은 관목, 뒷마당에서 일광욕하는 10대의 팽팽한 몸에는 부와 여가의 과시이므로 용납된다. 그런 것들은교 의 거주자들이 꿈꾸는 생활이 어떠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가난하고 불경한 자들만 민들레꽃을 그냥 내버려둔다. - P58

잡초 가득한 잔디밭만큼 확실하게 세속적 지위의 하락을 보여주는 요소도 없다. 매수자, 매도자, 부동산 중개인, 감정인, 검사관 모두 민들레가 실제 자산 가치에 손실을 입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집단 사고는 그럴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주택담보대출을 한도 가까이 받은 미국인들은 민들레의 재난에서 자산을 지키기 위해 매년 잔디 제초제에 9억 달러 이상을 쏟아붓는다. - P59

어저귀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잡초다운 유전자, 적응성, 가변성을 유지했다. 누구의 규칙도 따르지 않는다. 생존과 지속적인 적응을 위해 어떤 회사나 국가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어저귀의 관점에서는 일종의 식물 주권을 달성한 셈이다. - P111

트랙터가 지나다니도록 한 가지 작물을 열 맞추어 심어놓고 잡초에 약을 친 다음 작물을 죽이거나 우물에 흘러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 이곳 교수들은 서구의 기술 전도자들이 설파하는 이 접근법이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가? 자스가 보여준 것처럼 아프리카식 농법은 재치 있고 풍성했다. 그는 시장 공급에 앞서 가족이 먹을 작물을 길렀다. 이윤을 추구하기보다 호혜주의에 근거해 시간, 노동, 물자를 서로 주고받았다. 그의 노동에는 존엄성과 공동체 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수입 제초제, 유전자변형 종자, 디젤과 석유로 작동하는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 또 다른 식민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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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의 바다 문예중앙시선 20
문정희 지음 / 문예중앙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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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 2012년에 나왔는데, 한 해 전에 시인은 베네치아 카 포스테리아 대학에 초청을 받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쓴 시들을 모은 시집이다.
물, 바다, 베네치아, 시간이 넘실댄다.
억지로 쥐어짜지 않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통역


깃털 하나가 허공에서 내려와
어깨를 툭! 건드린다
내 몸에서 감탄이 깨어난다

별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오래된 기억을 건드린다
물살을 슬쩍! 일으킨다

깃털과 별과
나 사이
통역이 필요 없다

그 의미를 묻지 않아도
서로 다 알아들었으니까 - P140

미친 약속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 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P31

추락은 예비되어 있고
상처는 훈장처럼 늘어가지만
이쪽에는 내가 앉고 저쪽에는 어둠이 앉는다 - P17

누구도 왕복표는 가질 수 없어
편도뿐이야

침묵을 저어 저어
시를 쓰고
고통을 저어 저어
촛불을 켜고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알 수 없는 시간의 수갑을 차고 - P60

비명을 삼키며
밤낮으로 걷고 있는 신발들아
언제나 시작이고 또 시작일 뿐인 구름들아
이곳은 어디인가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람처럼 가벼운 질문뿐인가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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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선생 임춘시집 - 한시총서 5
김진영 외 지음 / 민속원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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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임춘은 이런 사람이다.

“풍파 안고 일찍 세상에 나와
오직 천금의 술병에 의지하네.” 38

“길이 전할 만한 업적은 없어도
단지 문장만은 일가를 이루었네.

좋은 세상에 한가함 나쁘진 않으나
내 신세 갈수록 어렵기만 하네.” 46

“치질 핥고 수레 얻은 것 천성에 어긋나고” 55

일찍이 문장으로 서울을 흔들었건만
천지에 한낱 늙은 서생일 뿐. 91

신세가 궁하면 이름은 더 나지만
몸이 마르니 도가 어이 살찌리. 96

통나무처럼 뻣뻣하여 굽힐 줄 몰랐더니 100

아, 나는 갈수록 곤궁하기만 하여
기상은 줄지 않아도 고개는 늘 처져있네. 124

지난 일은 모두 기러기 날아간 허공 같아
누각에 올라 말없이 석양 속에 섰어라. 397


불우했으나 불행했을지는 모르겠고,
불행했대도 이름과 시를 남겼으니
그가 시에 인용한, 도덕경의 ‘死而不亡者壽’(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장수)를 누리고 있다.
물론, 기뻐할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그는 다정한 사람이다. 아랫 구절에서 만났다.

구름 사이로 길 물으며 별 말 없어도
늘 만나면 말 걸고 싶은 사람이 되리라.
雲間問路無辭頻
長作相逢乞話人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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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하나
고정희 지음 / 푸른숲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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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 신뢰, 소망, 기쁨, 고통, 노여움, 그리 고 사랑과 힘이 이 시집의 기록입니다. 시 편편 글자마다 나와 이 세계의 문으로 상징되는 당신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어느 한 편도 눈물 없이 쓰여질 수 없었던 이 시편들, 그러나 사랑의 화두에 불과한 이 연시편이 모든 이의 고통과 슬픔을 승화시키는 노래가 되기를, 그리고 내가 더 큰 사랑의 광야에 이르는 길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고정희

시인 생전에 마지막으로 펴낸 시집이다. 불특정한 ‘당신’을 불러 사랑하는 연시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시집은 그 연시의 모음이다. 그러나, 고정희의 연시집은 다르다. 그가 사랑하는 당신은 다채롭다. 우선, 실제 연인 혹은 썸 타는 이다.

“늦어서, 느져서 죄송합니다
안경알을 반짝이며 그가 들어섰을 때
서울시 주민등록증을 가진 그에게서
나는 딱 호랑이 냄새를 맡았다
죽은 것과 썩은 것
먹지 않는 호랑이
단식의 고통으로 빚을 뿜는 호랑이,”
- 44쪽 지상의 양식

호랑이 냄새 나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는 모르겠으나, 반한 순간은 구체적이다. 그 당신은 산이 되기도 하고,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뼈 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내 사랑의 눈물 받아
눈부신 철쭉꽃밭 열어주네, 산, 산, 산”
- 14쪽 서시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 108,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자유, 혁명도 된다.

“아아 이뻐라 눈이 내리네
님 만나러 가는 날 눈이 내리네
속삭이듯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기다림의 광야 저편
살아 있는 날의 가벼움으로
죽어 있는 날의 즐거움으로
마음을 비운 날의 무심함으로
우리를 지나온 생애를 덮어
만리에 울연한 백두 영혼,
사랑의 모닥불로 타오르라네”
- 사랑의 광야에 내리는 눈, 99

삶과 죽음을 아우르며 대륙을 넘나든다.
지루할 틈 없이 ‘괄게’ 탄다. 뜨겁다.
그럴 수 있나 싶게.
시인은 갔으나 활활 타고 있다.
그의 사랑이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P89

입추

회임할 수 없는 것들이여 이 세상의 고통에 닿지 못하리니 열매맺지 못하는 사과나무여 사랑의 도끼에 찍혀 불구덩에 던져지리니 - P52

장작불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아득한 길목의 실개천이 되었다가
눈부신 슬픔의 강물도 되었다가
저승 같은 추위가 온땅에 넘치는 날
얼음장 밑으로 흘러들어가
어둡고 외로운 당신 가슴에
한 삼백 년 꺼지지 않을 불꽃으로 피었다가
사랑의 사리로 죽었으면 하지요 - P33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꽃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 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 P18

사랑


월정사 부처님처럼
마음을 비우고 잠드는 밤에
마음 저켠 벌판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여리게 혹은 강하게 비가 내렸습니다
눈물보다 투명한 그 빗방울들은
삽시간에 하늘의 절반을 적시고
오대산 구상나무 숲을 적시고
우수수 우수수수수
부처님 발목 밑에 내려와
잠들지 못하는 새벽 풀잎 옆에
오랑캐꽃으로 피었습니다
은방울꽃으로 피었습니다
초롱꽃으로 피었습니다
바늘꽃, 두루미꽃으로 피었습니다
사랑꽃, 이슬꽃으로 피었습니다
아.....
신록으로 꽉 찬 오월 언덕에서
햇빛 묻은 미루나무 몇 그루
아름다운 이별처럼 손 흔들고 있었습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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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게 길을 묻는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73
최두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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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찬가를 부르기보다
되새김질하고 삭힐 일 많아
머리에 새치가 늘어가는 한 사내’는
이제 ‘숲이 있어야 사는 곰’이 되었다.

“후드득 통째로 떨어져
땅바닥에 뒹구는 꽃송이 보며
속절없는 연애의 추억에 가슴을 앓기 보다는

이마에 노랗게 꽃가루 묻힌 채
새로이 벙글어 반기는
진홍의 꽃송이 찾아가
사랑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50쪽 동박새

인간 아닌 생을 원하는 듯 숱한 자연을 자연 속에서 자연의 눈으로 읊는다.
세상 걱정도 시집 제목처럼 식물에게 묻는다.

“은행알아
농부가 살지 않는 도시의
가로수가 낳아
냄새 나는 포대기에 싸서 떨군
천덕꾸러기 은행알아
너 어디로 굴러가니
보도블록 위에 떨어져
오가는 발길에 채여
이리저리 구르다가 순식간에
구둣발에 으스러지기도 하는 은행알아
바쁘고 무심한 행인들의
구둣발에 밟힐까 걱정인
어떤 가난한 시인이 주워다가
술안주로 구위 먹는 은행알아
씨앗이자 양식인 너를
함부로 걷어차는 세상은
어디로 굴러가니?” 69쪽 은행을 먹으며

‘독산성에 올라’ ‘성을 쌓고 지키던 장정의 이마에 맺힌 땀냄새를 맡’기도 하고, 노고산 지킴이 ‘함태식’, 백룡동굴 지킴이 ‘정무룡’, 빈곤 사진가 ‘최민식’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담는 등 사람 이야기도 좋은데, 그렇게 고작 몇 편만 실렸다.
발길을 이미 돌렸나 보다. ‘재앙스런 원숭이’이긴 하지만, 사람도 자연에 속한 것을.

장승


동구에 서서 품은 소망이 간절하다는 뜻이다
퉁방울눈 굴리며 풀어나갈 일이 많다는 다짐이다
눈비 맞으며 지켜내야 할 숨결이 소중하다는 믿음이다. - P79

노고단의 봄은 소리로부텀 와. 시안내 억누르고 있던 숨얼 몰아쉬듯 새 움얼 틔우제. 그때쯤이면 산새덜 울음 소리도 한결 여유로워. 먼점 진달래가 입술얼 내밀고 다시 철쭉이 꽃등얼 쓰제. 수줍게 원추리가 피면 여름이여. 어둠얼 적시면서 이슬 내리는 소리, 이슬얼 받어 목 식히는 온갖 꽃잎의 숨소리, 참말로 기맥힌 음악이제 - P88

내는 사진 작업 할라꼬 현실적 고통을 차라리 즐깄거덩. 어떤 어렵음도 사진의 거름이 된다꼬 여깄으니까. 어떤 불행도 쾌감으로 수용할 수 있다 카는 오기로 넘몰래 미소짓곤 했지. 쌀 사놓으믄 연탄 떨어지고 연탄 들라노면 쌀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기라. 아픔맹키로 우리를 깊게 하는 기 없고 가난한 자의 행복만큼 진실한 거는 없어. 내 생애는 젤로 낮고 더럽은 땅을 입맞추믄서 흐르는 물로 남을 기야. - P92

공룡능선


저잣거리 벗어나
구구한 일 잊고
암봉을 타네
푸른 하늘 우러르고
산과 바다 굽어보며
동서남북 전후좌우
거칠 것 없이 부는 바람을 맞아야 벙그는
가슴에 맺힌 꽃 한 송이 피우려
설악의 산기운 힘차게 뻗어가는
등줄기를 타네
잠시 피고 나면 바람에 날아갈
꽃한송이를 위하여
길이면서 길이 아닌
길이 아니면서 길인
능선을 타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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