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의 바다 문예중앙시선 20
문정희 지음 / 문예중앙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시집이 2012년에 나왔는데, 한 해 전에 시인은 베네치아 카 포스테리아 대학에 초청을 받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쓴 시들을 모은 시집이다.
물, 바다, 베네치아, 시간이 넘실댄다.
억지로 쥐어짜지 않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통역


깃털 하나가 허공에서 내려와
어깨를 툭! 건드린다
내 몸에서 감탄이 깨어난다

별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오래된 기억을 건드린다
물살을 슬쩍! 일으킨다

깃털과 별과
나 사이
통역이 필요 없다

그 의미를 묻지 않아도
서로 다 알아들었으니까 - P140

미친 약속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 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P31

추락은 예비되어 있고
상처는 훈장처럼 늘어가지만
이쪽에는 내가 앉고 저쪽에는 어둠이 앉는다 - P17

누구도 왕복표는 가질 수 없어
편도뿐이야

침묵을 저어 저어
시를 쓰고
고통을 저어 저어
촛불을 켜고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알 수 없는 시간의 수갑을 차고 - P60

비명을 삼키며
밤낮으로 걷고 있는 신발들아
언제나 시작이고 또 시작일 뿐인 구름들아
이곳은 어디인가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람처럼 가벼운 질문뿐인가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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