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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게 길을 묻는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73
최두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삶의 찬가를 부르기보다
되새김질하고 삭힐 일 많아
머리에 새치가 늘어가는 한 사내’는
이제 ‘숲이 있어야 사는 곰’이 되었다.
“후드득 통째로 떨어져
땅바닥에 뒹구는 꽃송이 보며
속절없는 연애의 추억에 가슴을 앓기 보다는
이마에 노랗게 꽃가루 묻힌 채
새로이 벙글어 반기는
진홍의 꽃송이 찾아가
사랑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50쪽 동박새
인간 아닌 생을 원하는 듯 숱한 자연을 자연 속에서 자연의 눈으로 읊는다.
세상 걱정도 시집 제목처럼 식물에게 묻는다.
“은행알아
농부가 살지 않는 도시의
가로수가 낳아
냄새 나는 포대기에 싸서 떨군
천덕꾸러기 은행알아
너 어디로 굴러가니
보도블록 위에 떨어져
오가는 발길에 채여
이리저리 구르다가 순식간에
구둣발에 으스러지기도 하는 은행알아
바쁘고 무심한 행인들의
구둣발에 밟힐까 걱정인
어떤 가난한 시인이 주워다가
술안주로 구위 먹는 은행알아
씨앗이자 양식인 너를
함부로 걷어차는 세상은
어디로 굴러가니?” 69쪽 은행을 먹으며
‘독산성에 올라’ ‘성을 쌓고 지키던 장정의 이마에 맺힌 땀냄새를 맡’기도 하고, 노고산 지킴이 ‘함태식’, 백룡동굴 지킴이 ‘정무룡’, 빈곤 사진가 ‘최민식’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담는 등 사람 이야기도 좋은데, 그렇게 고작 몇 편만 실렸다.
발길을 이미 돌렸나 보다. ‘재앙스런 원숭이’이긴 하지만, 사람도 자연에 속한 것을.
장승
동구에 서서 품은 소망이 간절하다는 뜻이다 퉁방울눈 굴리며 풀어나갈 일이 많다는 다짐이다 눈비 맞으며 지켜내야 할 숨결이 소중하다는 믿음이다. - P79
노고단의 봄은 소리로부텀 와. 시안내 억누르고 있던 숨얼 몰아쉬듯 새 움얼 틔우제. 그때쯤이면 산새덜 울음 소리도 한결 여유로워. 먼점 진달래가 입술얼 내밀고 다시 철쭉이 꽃등얼 쓰제. 수줍게 원추리가 피면 여름이여. 어둠얼 적시면서 이슬 내리는 소리, 이슬얼 받어 목 식히는 온갖 꽃잎의 숨소리, 참말로 기맥힌 음악이제 - P88
내는 사진 작업 할라꼬 현실적 고통을 차라리 즐깄거덩. 어떤 어렵음도 사진의 거름이 된다꼬 여깄으니까. 어떤 불행도 쾌감으로 수용할 수 있다 카는 오기로 넘몰래 미소짓곤 했지. 쌀 사놓으믄 연탄 떨어지고 연탄 들라노면 쌀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기라. 아픔맹키로 우리를 깊게 하는 기 없고 가난한 자의 행복만큼 진실한 거는 없어. 내 생애는 젤로 낮고 더럽은 땅을 입맞추믄서 흐르는 물로 남을 기야. - P92
공룡능선
저잣거리 벗어나 구구한 일 잊고 암봉을 타네 푸른 하늘 우러르고 산과 바다 굽어보며 동서남북 전후좌우 거칠 것 없이 부는 바람을 맞아야 벙그는 가슴에 맺힌 꽃 한 송이 피우려 설악의 산기운 힘차게 뻗어가는 등줄기를 타네 잠시 피고 나면 바람에 날아갈 꽃한송이를 위하여 길이면서 길이 아닌 길이 아니면서 길인 능선을 타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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