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의 즐거움 문학동네포에지 59
김명리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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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낡거나 늙었다.

“사위는 고요해, 마른기침 소리
당신은 비 그친 다락에서
나는 또 풀섶에서
낭창한 달빛 계면으로 흐르는 젓대 소리” 68

시인의 세 번째 시집으로 고작 마흔(‘내 이틀을 청하여 묵은 마흔 동갑내기 재철씨 집’ 64)에 아주 늙었다. 시어도 심상도 전개도. 청록파 중 조지훈이 연상될 만큼.

왜 그런가 했더니, 열세 살 무렵에 동자승 생활을 했다고 한다. 56쪽에 있다. ‘멀리 계신 엄마 생각’을 하고 있는 ‘천수경 한글본을 따라 외’우는 아이.

시인들이 대개 그렇듯, 빌드업 없이 정서가 ‘잉걸’로 불탄다.
“목젖을 비집고 올라오는 쓰라림” 66
“핏빛 제 부리로 찍어누르는 발목 붙들린 지친 울음소리” 73

고아하다고 좋아할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고풍스럽거나 예스러운 말투는 시집 내내 변함이 없다.
“허공에 붙박인 저 낡은 경첩들” 65
처럼 산뜻하지 않고 지겨울 수도 있다.

어려서 노안인 녀석들을 나이 들어 만나면 오호 이 녀석 안 늙었네 싶은 때가 있을 것이다.

적멸의 즐거움



오대산 중대에 이르러서도 보지 못한 적멸보궁을 여기 와서 본다

위도 아래도 훌러덩 벗어 던지고
삐걱대는 맨 뼉다귀에 바람소리나 들이고 있는 저 적멸

생각나면 들러서 성심을 다하여 목청껏 진설하는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저 소리의 고요한 일가친척들

세상에 남루만큼 따뜻한 이웃 다시 없어라
몰골이 말이 아닌 두 탑신이
낮이나 밤이나 대종천 물소리에 귀를 씻는데

텅 빈 불상좌대 위,
저 가득가득 옮겨앉는
햇빛부처, 바람부처, 빗물부처
오체투지로 기어오르는 갈대잎 덤불

밤 내린 장항리,
폐사지 자욱한 달빛 진신사리여!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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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11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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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도 아는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시가 누군가의 입맛을 잃게 해서.” 77

자기가 지독하게 어둡고 무거운 것을.

“생은 선택된 적이 없다. .. 엉겁결에 생에 들어서고, 생의 한가운데 놓인다. 생은 시달리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다. 깨달음이 있는 것 같지만 생판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지금 이 생이 무덤이다. 생은 우리들의 무덤이다. 생무덤이다.” 76

세상이 생무덤이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이렇게 되어버린 인생은 원래 이렇게 되게끔 정해져 있었다는 듯.” 25
그 절망은 숙명인 것이고. 시집 곳곳에 낭자하다.

하지만,
“인생에는 지리멸렬한 요소가 있다. 깔끔하게 털지 못하는 그 무엇. 질척거리는 헛소리 같은 게 있다. 가늘고 긴 인생들에게 불꽃 몇 개가 날아든다. 찬 하늘에선 눈이 내렸다. 헛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80
이 정도의 냉소면 충분하지 않나. 허망해도 계속되는 ‘헛소리’ 나불대는 것. 함께면 더 좋고.
터덜터덜 가는 것.
이렇게

시정잡배의 사랑


시정잡배에겐 분노가 많으니 용서도 많다.
서늘한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녹슨 철제계단 같은 놈들.

제대로 매달리지도,
끊어져 떨어지지도 못하는 그런 사랑이나 하는 놈들.
사연 많은 놈들은 또 왜들 그런지.

소주 몇 병에 비 오는 날 육교 밑에 주저앉는 놈들.
그렁그렁한 눈물 한 번 비추고 돌아서서 침 뱉는 놈들.
그러고도 실실 웃을 수 있는 놈들.
그들만의 깨달음이 있다.
시정잡배의 깨달음.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딱 한 번만 부르고 죽자.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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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물, 역사를 바꾸다 - 인류 문화의 흐름을 바꾼 50가지 광물 이야기 역사를 바꾸다
에릭 샬린 지음, 서종기 옮김 / 예경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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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석탄과 석유 냄새에 취해 기계적인 아름다움만 바라보며 일하고 죽어가는 우리 인간은 바람과 하늘, 곡식이 영그는 들판을 잊은 채 이 벽돌 건물들 사이에서 얼마나 번영할 수 있을까? -찰스 린드버그 (1902-1974)

책의 시작이 얼마나 뼈아프게 절실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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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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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위로
잔잔하나 단단한 마음 챙김.
누구에게 줄까 가만히 생각해 보는
아름다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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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 시인선 64
고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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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시작이 자못 비장하며 굳세다.

“땅의 사람들 1
-서시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서 지금 돌아온 사라믈은
폭설주의보가 매달린 겨울 숲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움을 녹이며
조금씩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자기 몫의 봄소식에 못질을 하고 있다
물푸레나무 숲을 흔드는
이 지상의 추위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가까이 오라, 죽음이여
동구 밖에 당도하는 새벽 기차를 위하여
힘이 끝난 폐차처럼 누워 있는 아득한 철길 위에
새로운 각목으로 누워야 하리
거친 바람 속에서 밤이 깊었고
겨울 숲에는 누이 내리고 있다
모닥불이 어둠을 둥글게 자른 뒤
원으로 깍지낀 사람들의 등뒤에서
무수한 설화가
살아 남은 자의 슬픔으로 서걱거린다”

1부 땅의 사람들 연작, 2부 지리산의 봄 연작은 분단 조국의 사람과 산하를 읊는다. 3부 천둥벌거숭이 노래 연작에서는 세상을 염세적으로 풍자한다.
“동서남북에서
/하느님 우시는구나
/허리 위어지는 빚잔치
/기둥뿌리 무너지는 꽃잔치
/만조백성 허수아피 잔치에
/입 없는 하느님 우시는구나
/적막강산 줄줄 우시는구나” 72

4부 여성사 연구 연작은 여성해방을 다룬다.
“우리의 간절한 진실은 하나이니
여성 해방 만세,
그리운 민주 세상 만세,” 92

5부 편지 연작은 사랑을 다룬다. 시인은 연애를 했거나, 실연을 당한 듯하다. 다양한 그리움과 상처가 드러나 있다.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 만리까지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들었다” 108

6부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나온다. 격렬하게 슬프고,
“슬픔의 번갯불에 감전된 나무들이
뿌리를 하늘로 쳐들고 울었습니다
슬픔의 강물에 어리는 산천들이
제 그림자 흔들며 울었습니다” 123

간신히 견디고 있다.
“제발 가슴속의 봉분을 버려라
찾아오면 떠나갈 때가 있고
머물렀으면 일어설 때가 있나니
사람은 순서가 다를 뿐이다“ 130

고정희의 모든 면모가 담겨 있다. 다채롭다.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 P23

어두운 날들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조금 마신 후에 바라보는 산
아주 가까우면서도 먼 산 하나
그 산에 나는 아직 오르지 못했습니다
길다면 긴 서른아홉 해 동안 나는
산으로 가는 길을 죄다 더듬었지만
미지로 열린 그 오솔길들은
원으로 원으로 원으로
떠났던 문에 닿아 있을 뿐,
운무 자욱한 어여쁜 산봉우리
저무는 강둑에 고요히 서 있습니다 - P25

여느 지붕마다 겨울은 깊어
북한산 능선마다 함박눈 소복하니
이제는 설산으로 마주앉는 그대여,
그렇구나
서울땅 덮고 남을 저 눈이
그대 여생 덮고 남을 내 그리움
그대 하늘 덮고 남을 내 상처라 해도
우리 둘의 융기로 떠받치는 세상
나는 이미 닻줄을 풀었구나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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