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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기 노리코 선집 ㅣ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 조영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4월
평점 :
돌아가기 직전에 낸 시집 <말의 잎 3>(2002) 선까지 읽었다.
거기가 일본이건 한국이건 자유롭고 굳은 사람들은 있구나. 빛나는구나.
“걱정하지 마
죽는 데 실패한 자는 이제까지 한 명도 없었다
천년을 살며 유랑하는
그런 무서운 벌을 받은 자도 한 명도 없었다” 233
“무시무시한 홍수의 기억이 남아
노아의 방주 전설이 생겼을 터이지만
선량한 이들만 뽑아서 탄 배였을 텐데
자자손손의 몰골을 보면, 이 전설도 상당히 의심스럽다” 257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잘난 인간을 이렇게 간단히 비웃는다.
“전쟁책임을 묻자
그 사람은 말했다
그러한 언어의 기교에 대하여
문학 방면은 그다지 연구하지 않았으므로
대답하기 어렵습니다4)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와
거무칙칙한 웃음을 피 토하듯
내뿜다, 멈추고, 또 내뿜었다“
4)1975년 10월 31일 쇼와 천황의 발언이다. 182
이토록 통렬하게 전쟁 책임을 묻고 천황을 비웃는다.
“서울에서 버스에 탔을 때
시골에서 상경한 듯한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한복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쓰고
소년이 그대로 할아버지가 된 것처럼
인상이 매우 순수했다
일본인 몇 명이 선 채로 일본어로 조금 말했을 때
노인의 얼굴에 두려움과 혐오감이
휙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천 마디 말보다 강렬하게
일본이 한 짓을
거기에서 보았다” 231
그 바탕이 되는 마음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숙이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자와 호수처럼 깊고 푸른 호수를
감추어 지니고 있는 사람은
말해보면 알 수 있지, 두 마디, 세 마디로
/그것이야말로, 고요히 가라앉아
쉽사리 늘지도 줄지도 않는 저만의 호수
결코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마의 호수
/교양이나 학력 따위하고는 관계가 없는 듯하다
인간의 매력이란
아마도 그 호수 언저리에서
피어나는 안개다” 216
오리 넘어 십리 무중이다.
이바라기 노리코.
제 감수성 정도는
푸석푸석하게 말라가는 마음을 남탓으로 돌리지는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 하고서는
신경질적이 된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는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은 어느쪽인가
짜증나는 것을 피붙이 탓으로 돌리지는 마라 무엇에든 서툴렀던 것은 나
초심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는 마라 애시당초, 허약한 마음에 지나지 않았다
가망없는 일체를 시대 탓으로 돌리지는 마라 그나마 남은 존엄마저 버리는가
제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바보들이여 - P170
뒤처지거라 결과에 목매지 말고 뒤처지거라 눈부신 의지를 갖고 - P204
꽃보라 아래를, 슬슬 걸어가면 일순 고승처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보통 상태 삶은 애잔한 신기루 - P223
대답
할머니 할머니 이제까지 할머니가 제일 행복했던 것은 언제였어?
열네 살의 나는 갑자기 할머니에게 물었다 매우 쓸쓸하게 보였던 날에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찬찬히 두루두루 생각할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즉각 대답했다 "화로 둘레에 아이들을 앉혀놓고 떡을 구워주었을 때"
눈보라치는 저녁 눈의 요정이라도 나타날 듯한 밤 희미한 램프 아래에 대여섯 명 무릎을 모으고 화로 둘레에 앉아 있던 그 아이들 중에 우리 엄마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 오래 준비해왔던 것처럼 물어올 것을 기다리고 있떤 것처럼 너무도 구체적인 신속한 대답에 놀랐는데 그로부터 50년 사람들은 모두 감쪽같이 사라지고
내 가슴 속에서만 때때로 떠들썩한 환영처럼 떠오르는 가마쿠라의 단란했던 한 때
그 무렵의 할머니 나이조차 벌써 넘기고 지금 곰곰 음미한다 단 한 마디 말에 담겨 있던 얇디 얇은 떡조각의 짭짤한 맛을 - P225
기대지 않고
더 이상 맹목적인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맹목적인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맹목적인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는 않다 오래 살아서 진심으로 배운 것은 그뿐 제 눈과 귀 제 두 발만으로 서서 무슨 불편함이 있으랴
기댄다면 그것은 의자 등받이뿐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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