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갑자 복사빛 민음의 시 126
정끝별 지음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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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면이다 정끝별.
본명이라니 특이한 이름이고
평론가와 겸한다니 또 색다르다.

어머니, 아버지, 딸, 당신, 고향과 많은 식물들이 다채롭게 시의 대상으로 나온다.
조금 부자연스러운 결말이 잦아 쿨럭거릴 뿐
지나친 비약과 모호 없이 문장이 졸졸졸 흐른다.

유명한 <가지가 담을 넘을 때>가 실려 있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64

식물 중 능소화를 특별히 좋아하나 보다. 두 편 읊었고, 그 시들이 다 좋다.
“꽃의 눈이 감기는 것과
꽃의 손이 덩굴지는 것과
꽃의 입이 다급히 열리는 것과
꽃의 허리가 한껏 휘어지는 것이
/벼랑이 벼랑 끝에 발을 묻듯
허공이 허공의 가슴에 달라붙듯
벼랑에서 벼랑을
허공에서 허공을 돌파하며
/홍수가 휩쓸고 간 뒤에도
더운 목젖을 돋우며
/오뉴월 불 든 사랑을
저리 천연스레 완성하고 있다니!“ 69 여름 능소화

”눈멀었어라 솟은 길
바람 타고 기어 올라가
입이며 식도며 대장이며 항문이며
넝쿨진 구멍으로 단숨에 빨아들인
매혹이며 황홀이며 기억이며 상처며
기다란 기다림 끝에 피워 올린
핏발 선 빨대꽃
/맨몸으로 빨아올리겠다고?
길길이 뛰는 이 맘을!“ 94

제목은 ’바람을 기다리는 일‘인데 바람이 시를 가리키는 것 같다. 특히 시를 만나는 일. 쓰기 위해 기다리거나, 가슴 치는 시를 찾아 읽어 헤매거나 하는. 그렇게 매혹당한 자의 고백. 어떤 ’중독‘의 모습을 보여줄지 탐독해야겠다.
“눈이 머는 일
마음이 먼저 먹히는 일
먹먹한 물이 되는 일
갯버들 가지에 치마를 걸어놓고
오지 않는 바람을 기다리는 일
고여 있으되 오래 썩지 않는 일
/여기 중독된 불멸”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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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화질] 교토 담배가게 요리코 7 (완결) 교토 담배가게 요리코 7
아사노 유키코 /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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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 결말
담배 가게가 장사가 되지 않아 위기가 오지만
어떻게든 그 니시혼간지에서 걸어서 2분 그곳을 지키기로.
어딘가에서 그렇게 ‘희번뜩’하며 교토를 지키고 안내해 주고 있을 것만 같다.
좀더 길고 현지인만의 정보나 맛이 담겼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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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형평운동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306
박구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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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셨다.
3월에. 향년 66세.

일지를 찾아보니 3년 전에 시인의 3번째 시집 <국수를 닮은 이야기>를 읽고 이렇게 적었다.
“절창을 노리지 않는, 서정과 추억과 현실이 모두 살아 있는 간만에 훌륭한 시집을 만남.”
그러고는 잊고 지내다 문득 며칠 전에 신작이 있나 찾아보다 유작을 읽게 되었다.

시가 다룰 수 없는 것은 당연히 없으나
시가 아니라도 서사는 소설이, 역사는 비문학이 잘 다룬다.
물론, 서사시가 없는 것 아니고 한시에도 영사시가 있지만, 아무래도 역사를 담는 그릇으로 시가 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진주 사람 박구경은 진주에서 벌어진 ‘진주형평운동’을 시집에 온통 담는다.
조선조가 철저한 신분제로 노비 수탈 없이는 굴러갈 수 없는 체제였는데, 노비보다 더 하층 계급으로 백정이 있었다. 백정은 심지어 갑오경장이고 망국이고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까지 호적도 없이 차별받았다고 한다. 그 압제에 분연히 일어난 것이 진주형평운동이다.

“왕실과 귀족 양반들의 입에서는
한 철도 고기반찬이 떠나지 않았더라
/농사지을 소를 보존하기 위하여
일소들의 도축을 금하였어도
먹을 놈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눌 놈들은 나눌 만큼 나누었더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백정이 아는 사실이었더라
/흉년이 들었던 극심한 해에는
일반 백성에게는
일소의 도축 단속령을 내려놓고는
뒤편에서는
고기를 찾았던 세도가 양반들의 입” 86

교회에서도 백정들을 한사코 거부했고, 백정의 자식들은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1920년대까지도.
강상호, 이학찬, 장재필 등의 투쟁과 희생이 시집에 담겼다.
진주 사람들에 대한 자부심도 아주 강하게 있다.

서사시인가
행갈이 한 논문인가
판단은 읽는 사람의 것.

칠천인七賤人



조선 시대에 일곱 천민들이 있었더라
최하층인 그들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는데
노비 백정 기생 갖바치 상여꾼 광대 무당이 그들이었더라

자식들까지 연좌제를 적용하였으며
백정은 백정질 말곤 다른 할 일이 없었는데
인구조사에 포함되지 않고 호적부도 발급되지 않았더라

장가를 가도 상투를 틀지 못하였고
사는 곳도 제한되어 있었으며
거지보다 낮은 계층으로 평생을 보내야 하였더라

봉건제도가 무너진 구한말까지
신분과 남녀 차별은 여전하였고
매물로 사고팔던 노비체의 악습이 횡행하였더라

갑오개혁 이후에도
법보다 무섭고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관습의 틀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더라

그러니 인권혁명의 중심인 진주에서 봉기한
형평사 운동은 쇠심줄보다 질긴
칠천인의 청산에 바쳐진 숭고한 운동이었더라

형평의 완성을 위해
수많은 목숨들이 지나갔으며
형평의 깃발 아래 수많은 희생들이 쌓였더라 - P84

진주 사람들 2


낡고 부패한 늙은 왕조를 돌아보게 하였던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조선의 반상 논리가 빛을 잃기 시작하였어도

백정을 향한 멸시와 천대는
쇠심줄처럼 질기게 남아 이어지고
고리처럼 엮여 있었더라

백정들이 앞으로 나서 자신들의 사재를 털고 선각들과 청년들이 앞다투어
일으킨 인권운동의 출발이 있었으니

저울衡처럼 공평平한 세상에 이르는
형평운동은 그 시대의 혁명이었더라
진주 민심의 역사였더라

전국 최초로 이 일을 주도해 나갔던 사람들이
바로 경상 땅 진주에서 살아온
진주, 진주 사람들이었더라

인권해방의 붉은 불길이었더라
불꽃은 순식간에 타올라
전국의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가는 들불이 되었더라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공평은 인권의 첫장이라고 만방에 외쳤더라

백정도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늘과 땅과 세상에 고하였더라

진주의 하늘 아래
진주의 땅 위에서
진주, 진주 사람들이
맨 처음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더라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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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철도 - 최영미 시집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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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상쾌한’23

느낌의 문장이다. 늘 그렇듯 ‘난해의 병풍 뒤에 숨지 않고’60 거침없다.
코로나의 답답함
편찮으신 모친을 바라보는 아픔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이라는 씁쓸한 현재. 77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은

“더 슬픈 기억은 따로 있다만, 쓰지 못한다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망가뜨릴 것이다” 85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진실을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94

아직도 말 못할 상처의 심연이 있구나.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것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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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서유기 - 철들고 다시 읽는, 원숭이 부처 되는 기똥찬 이야기
성태용 지음 / 정신세계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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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필력이다.
입말이라 친근한데 귀 기울일 얘기가 많고
우선 너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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