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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하나
고정희 지음 / 푸른숲 / 1996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시집,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 신뢰, 소망, 기쁨, 고통, 노여움, 그리 고 사랑과 힘이 이 시집의 기록입니다. 시 편편 글자마다 나와 이 세계의 문으로 상징되는 당신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어느 한 편도 눈물 없이 쓰여질 수 없었던 이 시편들, 그러나 사랑의 화두에 불과한 이 연시편이 모든 이의 고통과 슬픔을 승화시키는 노래가 되기를, 그리고 내가 더 큰 사랑의 광야에 이르는 길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고정희
시인 생전에 마지막으로 펴낸 시집이다. 불특정한 ‘당신’을 불러 사랑하는 연시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시집은 그 연시의 모음이다. 그러나, 고정희의 연시집은 다르다. 그가 사랑하는 당신은 다채롭다. 우선, 실제 연인 혹은 썸 타는 이다.
“늦어서, 느져서 죄송합니다
안경알을 반짝이며 그가 들어섰을 때
서울시 주민등록증을 가진 그에게서
나는 딱 호랑이 냄새를 맡았다
죽은 것과 썩은 것
먹지 않는 호랑이
단식의 고통으로 빚을 뿜는 호랑이,”
- 44쪽 지상의 양식
호랑이 냄새 나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는 모르겠으나, 반한 순간은 구체적이다. 그 당신은 산이 되기도 하고,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뼈 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내 사랑의 눈물 받아
눈부신 철쭉꽃밭 열어주네, 산, 산, 산”
- 14쪽 서시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 108,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자유, 혁명도 된다.
“아아 이뻐라 눈이 내리네
님 만나러 가는 날 눈이 내리네
속삭이듯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기다림의 광야 저편
살아 있는 날의 가벼움으로
죽어 있는 날의 즐거움으로
마음을 비운 날의 무심함으로
우리를 지나온 생애를 덮어
만리에 울연한 백두 영혼,
사랑의 모닥불로 타오르라네”
- 사랑의 광야에 내리는 눈, 99
삶과 죽음을 아우르며 대륙을 넘나든다.
지루할 틈 없이 ‘괄게’ 탄다. 뜨겁다.
그럴 수 있나 싶게.
시인은 갔으나 활활 타고 있다.
그의 사랑이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P89
입추
회임할 수 없는 것들이여 이 세상의 고통에 닿지 못하리니 열매맺지 못하는 사과나무여 사랑의 도끼에 찍혀 불구덩에 던져지리니 - P52
장작불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아득한 길목의 실개천이 되었다가 눈부신 슬픔의 강물도 되었다가 저승 같은 추위가 온땅에 넘치는 날 얼음장 밑으로 흘러들어가 어둡고 외로운 당신 가슴에 한 삼백 년 꺼지지 않을 불꽃으로 피었다가 사랑의 사리로 죽었으면 하지요 - P33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꽃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 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 P18
사랑
월정사 부처님처럼 마음을 비우고 잠드는 밤에 마음 저켠 벌판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여리게 혹은 강하게 비가 내렸습니다 눈물보다 투명한 그 빗방울들은 삽시간에 하늘의 절반을 적시고 오대산 구상나무 숲을 적시고 우수수 우수수수수 부처님 발목 밑에 내려와 잠들지 못하는 새벽 풀잎 옆에 오랑캐꽃으로 피었습니다 은방울꽃으로 피었습니다 초롱꽃으로 피었습니다 바늘꽃, 두루미꽃으로 피었습니다 사랑꽃, 이슬꽃으로 피었습니다 아..... 신록으로 꽉 찬 오월 언덕에서 햇빛 묻은 미루나무 몇 그루 아름다운 이별처럼 손 흔들고 있었습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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