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선생 임춘시집 - 한시총서 5
김진영 외 지음 / 민속원 / 199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임춘은 이런 사람이다.

“풍파 안고 일찍 세상에 나와
오직 천금의 술병에 의지하네.” 38

“길이 전할 만한 업적은 없어도
단지 문장만은 일가를 이루었네.

좋은 세상에 한가함 나쁘진 않으나
내 신세 갈수록 어렵기만 하네.” 46

“치질 핥고 수레 얻은 것 천성에 어긋나고” 55

일찍이 문장으로 서울을 흔들었건만
천지에 한낱 늙은 서생일 뿐. 91

신세가 궁하면 이름은 더 나지만
몸이 마르니 도가 어이 살찌리. 96

통나무처럼 뻣뻣하여 굽힐 줄 몰랐더니 100

아, 나는 갈수록 곤궁하기만 하여
기상은 줄지 않아도 고개는 늘 처져있네. 124

지난 일은 모두 기러기 날아간 허공 같아
누각에 올라 말없이 석양 속에 섰어라. 397


불우했으나 불행했을지는 모르겠고,
불행했대도 이름과 시를 남겼으니
그가 시에 인용한, 도덕경의 ‘死而不亡者壽’(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장수)를 누리고 있다.
물론, 기뻐할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그는 다정한 사람이다. 아랫 구절에서 만났다.

구름 사이로 길 물으며 별 말 없어도
늘 만나면 말 걸고 싶은 사람이 되리라.
雲間問路無辭頻
長作相逢乞話人 - P2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름다운 사람 하나
고정희 지음 / 푸른숲 / 1996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시집,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 신뢰, 소망, 기쁨, 고통, 노여움, 그리 고 사랑과 힘이 이 시집의 기록입니다. 시 편편 글자마다 나와 이 세계의 문으로 상징되는 당신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어느 한 편도 눈물 없이 쓰여질 수 없었던 이 시편들, 그러나 사랑의 화두에 불과한 이 연시편이 모든 이의 고통과 슬픔을 승화시키는 노래가 되기를, 그리고 내가 더 큰 사랑의 광야에 이르는 길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고정희

시인 생전에 마지막으로 펴낸 시집이다. 불특정한 ‘당신’을 불러 사랑하는 연시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시집은 그 연시의 모음이다. 그러나, 고정희의 연시집은 다르다. 그가 사랑하는 당신은 다채롭다. 우선, 실제 연인 혹은 썸 타는 이다.

“늦어서, 느져서 죄송합니다
안경알을 반짝이며 그가 들어섰을 때
서울시 주민등록증을 가진 그에게서
나는 딱 호랑이 냄새를 맡았다
죽은 것과 썩은 것
먹지 않는 호랑이
단식의 고통으로 빚을 뿜는 호랑이,”
- 44쪽 지상의 양식

호랑이 냄새 나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는 모르겠으나, 반한 순간은 구체적이다. 그 당신은 산이 되기도 하고,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뼈 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내 사랑의 눈물 받아
눈부신 철쭉꽃밭 열어주네, 산, 산, 산”
- 14쪽 서시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 108,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자유, 혁명도 된다.

“아아 이뻐라 눈이 내리네
님 만나러 가는 날 눈이 내리네
속삭이듯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기다림의 광야 저편
살아 있는 날의 가벼움으로
죽어 있는 날의 즐거움으로
마음을 비운 날의 무심함으로
우리를 지나온 생애를 덮어
만리에 울연한 백두 영혼,
사랑의 모닥불로 타오르라네”
- 사랑의 광야에 내리는 눈, 99

삶과 죽음을 아우르며 대륙을 넘나든다.
지루할 틈 없이 ‘괄게’ 탄다. 뜨겁다.
그럴 수 있나 싶게.
시인은 갔으나 활활 타고 있다.
그의 사랑이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P89

입추

회임할 수 없는 것들이여 이 세상의 고통에 닿지 못하리니 열매맺지 못하는 사과나무여 사랑의 도끼에 찍혀 불구덩에 던져지리니 - P52

장작불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아득한 길목의 실개천이 되었다가
눈부신 슬픔의 강물도 되었다가
저승 같은 추위가 온땅에 넘치는 날
얼음장 밑으로 흘러들어가
어둡고 외로운 당신 가슴에
한 삼백 년 꺼지지 않을 불꽃으로 피었다가
사랑의 사리로 죽었으면 하지요 - P33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꽃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 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 P18

사랑


월정사 부처님처럼
마음을 비우고 잠드는 밤에
마음 저켠 벌판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여리게 혹은 강하게 비가 내렸습니다
눈물보다 투명한 그 빗방울들은
삽시간에 하늘의 절반을 적시고
오대산 구상나무 숲을 적시고
우수수 우수수수수
부처님 발목 밑에 내려와
잠들지 못하는 새벽 풀잎 옆에
오랑캐꽃으로 피었습니다
은방울꽃으로 피었습니다
초롱꽃으로 피었습니다
바늘꽃, 두루미꽃으로 피었습니다
사랑꽃, 이슬꽃으로 피었습니다
아.....
신록으로 꽉 찬 오월 언덕에서
햇빛 묻은 미루나무 몇 그루
아름다운 이별처럼 손 흔들고 있었습니다 - P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에게 길을 묻는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73
최두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삶의 찬가를 부르기보다
되새김질하고 삭힐 일 많아
머리에 새치가 늘어가는 한 사내’는
이제 ‘숲이 있어야 사는 곰’이 되었다.

“후드득 통째로 떨어져
땅바닥에 뒹구는 꽃송이 보며
속절없는 연애의 추억에 가슴을 앓기 보다는

이마에 노랗게 꽃가루 묻힌 채
새로이 벙글어 반기는
진홍의 꽃송이 찾아가
사랑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50쪽 동박새

인간 아닌 생을 원하는 듯 숱한 자연을 자연 속에서 자연의 눈으로 읊는다.
세상 걱정도 시집 제목처럼 식물에게 묻는다.

“은행알아
농부가 살지 않는 도시의
가로수가 낳아
냄새 나는 포대기에 싸서 떨군
천덕꾸러기 은행알아
너 어디로 굴러가니
보도블록 위에 떨어져
오가는 발길에 채여
이리저리 구르다가 순식간에
구둣발에 으스러지기도 하는 은행알아
바쁘고 무심한 행인들의
구둣발에 밟힐까 걱정인
어떤 가난한 시인이 주워다가
술안주로 구위 먹는 은행알아
씨앗이자 양식인 너를
함부로 걷어차는 세상은
어디로 굴러가니?” 69쪽 은행을 먹으며

‘독산성에 올라’ ‘성을 쌓고 지키던 장정의 이마에 맺힌 땀냄새를 맡’기도 하고, 노고산 지킴이 ‘함태식’, 백룡동굴 지킴이 ‘정무룡’, 빈곤 사진가 ‘최민식’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담는 등 사람 이야기도 좋은데, 그렇게 고작 몇 편만 실렸다.
발길을 이미 돌렸나 보다. ‘재앙스런 원숭이’이긴 하지만, 사람도 자연에 속한 것을.

장승


동구에 서서 품은 소망이 간절하다는 뜻이다
퉁방울눈 굴리며 풀어나갈 일이 많다는 다짐이다
눈비 맞으며 지켜내야 할 숨결이 소중하다는 믿음이다. - P79

노고단의 봄은 소리로부텀 와. 시안내 억누르고 있던 숨얼 몰아쉬듯 새 움얼 틔우제. 그때쯤이면 산새덜 울음 소리도 한결 여유로워. 먼점 진달래가 입술얼 내밀고 다시 철쭉이 꽃등얼 쓰제. 수줍게 원추리가 피면 여름이여. 어둠얼 적시면서 이슬 내리는 소리, 이슬얼 받어 목 식히는 온갖 꽃잎의 숨소리, 참말로 기맥힌 음악이제 - P88

내는 사진 작업 할라꼬 현실적 고통을 차라리 즐깄거덩. 어떤 어렵음도 사진의 거름이 된다꼬 여깄으니까. 어떤 불행도 쾌감으로 수용할 수 있다 카는 오기로 넘몰래 미소짓곤 했지. 쌀 사놓으믄 연탄 떨어지고 연탄 들라노면 쌀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기라. 아픔맹키로 우리를 깊게 하는 기 없고 가난한 자의 행복만큼 진실한 거는 없어. 내 생애는 젤로 낮고 더럽은 땅을 입맞추믄서 흐르는 물로 남을 기야. - P92

공룡능선


저잣거리 벗어나
구구한 일 잊고
암봉을 타네
푸른 하늘 우러르고
산과 바다 굽어보며
동서남북 전후좌우
거칠 것 없이 부는 바람을 맞아야 벙그는
가슴에 맺힌 꽃 한 송이 피우려
설악의 산기운 힘차게 뻗어가는
등줄기를 타네
잠시 피고 나면 바람에 날아갈
꽃한송이를 위하여
길이면서 길이 아닌
길이 아니면서 길인
능선을 타네. - P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투구꽃 창비시선 307
최두석 지음 / 창비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시인이 붙들었던 이야기가 사라졌다.
인간들의 이야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우람한 역사의 줄기를 살찌우고
우수수 낙엽이 되어 종적 없이 사라질
초록 이파리같이 빛나는 이야기들 보시게
/느티나무가 자라 옹이투성이 거목이 될 때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라다 부러진
까치집 삭정이 같은 이야기들 보시게.“ 85쪽 느티나무

소리 없는, 자연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이 시집은 그렇게 이땅의 온갖 나무와 장소들을 읊는 일종의 도감 또는 기행문에 가깝다.

‘나날이 새로워지고 싶으나
나날이 낡아가는 … 덜컥 지천명을 맞게 된 자’로서 ‘가슴에 사막이 펼쳐질 때
어떻게 견디면서 살아야 하나’하는 고민에 빠져 자연에서 그 답을 묻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거위벌레도 엄연히
행복하게 살 권리를 지니고
이땅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13

“사람들이 잡초라 하는
바랭이나 강아지풀의 씨앗이
부비새에게는 귀한 양식이 되는
자연의 배려” 27

‘미추를 초월한 먹고사는 일의 엄연함’ 22

‘양성의 심장과
진정한 자유의 관계를 묻는 이여
둥지를 부수고
끊임없이 날아오르기를 꿈꾸는 영혼이여
황조롱이가 어찌하여 고층아파트에 살며
어떻게 먹이를 구하는지 보라.’ 25

‘지상에서 먹이를 구해
사랑을 나누고
새끼를 기르는
원초의 모습’ 31

“온갖 생명을 살아 숨쉬게 하는 노랫소리에 빠져든다.” 51

인간의 시선을 부정한다. 앞으로 자연의 소리를 얼마나 절절히 들려줄 수 있는지가 관건일 것이다.

김굉필 은행나무



서원에서 글 읽는 소리
오래 듣다보니 예를 알아
몸을 깊숙이 구부리고 있다는 은행나무

고개를 숙여야 드나들 수 있는
문을 중심으로 엄격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도동서원 은행나무

소학 속의 동자처럼
기본적 법도에 충실하다 사화로 희생된
김굉필을 기려 심은 은행나무

하지만 어찌 나무가 예를 알랴
아니 사람의 도덕에 구속되랴
척박한 땅의 윤리주의자들이여

나무는 다만 깊이 뿌리내릴 수 없어
위로 마음껏 벋어오르지 못할 뿐
암반에 막혀 뒤틀린 뿌리의 고통을 보라. - P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문학과지성 시인선 207
최두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평점 :
품절


<성에꽃> 다음 시집이다.
시인은 이 시집을 낼 때 마흔셋이 되었다.

‘도둑처럼 다가온 불혹의 나이를 심히 부끄러워하’며, ‘숨죽인 채 눈물 삼’키고 있고, ‘허무의 공터’에 있다.

그 까닭은 어린 아들이 뭉툭한 플라타너스를 보게 하고 싶지 않은 아비의 당연한, 순한 마음과 어찌 할 수 없는 무력함 때문이다.

“플라타나스를
가로수로 심지 말아요
가지분만 아니라 우듬지까지
마구잡이로 톱질을 하려거든

눈이 아프게
뭉툭한 플라타나스로 하여금
아이의 학교길에
통행하게 하지 말아요.” 13쪽 플라타너스

그러나, 아직 ‘난시’다. 분단 조국의 왜곡된 현실을 꼬나보고 있다.

“오욕의 땅
비탈에 뿌리박고 늘어져
따사로이 환한
새 세상 보이려는 듯
온몸의 숨구멍마다 꽃을 피우는
개나리 꽃잎엔 최루탄 가루가 묻어 있다
아니 화약 냄새가 스며 있다
다투어 피어나는 꽃송이마다
자신의 타는 가슴 문지르며
묵묵히 걸어들어가는 청춘 보인다.” 56쪽 개나리

이야기시도 여전하고, ‘항심’도 변함없다.

“울창한 참나무숲이었다
건조주의보를 아랑곳하지 않고 실시된
미군 사격훈련의 불똥은
겨우내 마르고 쌓인 가랑잎으로 튀어
단숨에 쇠목산을 덮쳤다
곳곳에 푸르던 소나무는 누렇게 뜨고
바야흐로 꽃술을 내밀던
진달래는 꽃잎째 탔다
재 위에는 숯이 된 도토리가 뒹굴고
불을 끄러 왔던 산림계장과 여섯 청년은
졸지에 영안실에 누워 절을 받고 있다
군사훈련 때마다 동네 앞길을 폐쇄당하는
쇠목마을 사람들 경운기 몰고 나와
미군 사격장 확장 반대를 외치는데
한국의 전투경찰이 방패를 들어 막고 있다
둥지를 태우고도 여전히
맑은 목청으로 우는 멧새야 오목눈이야
새로 지은 둥지에서는 아무쪼록
뻐꾸기 새끼를 기르지 마라.” 96쪽 동두천 산불

한강 하구에서

섣불리 북 치지 마라
엉겁결에 장구 치지 마라
기분에 취해 깃발 올리지 마라
밀물 썰물 오르내리는 한강 하구에서
금강산 폭포를 보고 오대산 여울을 보라
진심으로 깃발 올렸거든 항심으로 몸을 던지라. - P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