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리산의 봄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64
고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9월
평점 :
시집의 시작이 자못 비장하며 굳세다.
“땅의 사람들 1
-서시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서 지금 돌아온 사라믈은
폭설주의보가 매달린 겨울 숲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움을 녹이며
조금씩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자기 몫의 봄소식에 못질을 하고 있다
물푸레나무 숲을 흔드는
이 지상의 추위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가까이 오라, 죽음이여
동구 밖에 당도하는 새벽 기차를 위하여
힘이 끝난 폐차처럼 누워 있는 아득한 철길 위에
새로운 각목으로 누워야 하리
거친 바람 속에서 밤이 깊었고
겨울 숲에는 누이 내리고 있다
모닥불이 어둠을 둥글게 자른 뒤
원으로 깍지낀 사람들의 등뒤에서
무수한 설화가
살아 남은 자의 슬픔으로 서걱거린다”
1부 땅의 사람들 연작, 2부 지리산의 봄 연작은 분단 조국의 사람과 산하를 읊는다. 3부 천둥벌거숭이 노래 연작에서는 세상을 염세적으로 풍자한다.
“동서남북에서
/하느님 우시는구나
/허리 위어지는 빚잔치
/기둥뿌리 무너지는 꽃잔치
/만조백성 허수아피 잔치에
/입 없는 하느님 우시는구나
/적막강산 줄줄 우시는구나” 72
4부 여성사 연구 연작은 여성해방을 다룬다.
“우리의 간절한 진실은 하나이니
여성 해방 만세,
그리운 민주 세상 만세,” 92
5부 편지 연작은 사랑을 다룬다. 시인은 연애를 했거나, 실연을 당한 듯하다. 다양한 그리움과 상처가 드러나 있다.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 만리까지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들었다” 108
6부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나온다. 격렬하게 슬프고,
“슬픔의 번갯불에 감전된 나무들이
뿌리를 하늘로 쳐들고 울었습니다
슬픔의 강물에 어리는 산천들이
제 그림자 흔들며 울었습니다” 123
간신히 견디고 있다.
“제발 가슴속의 봉분을 버려라
찾아오면 떠나갈 때가 있고
머물렀으면 일어설 때가 있나니
사람은 순서가 다를 뿐이다“ 130
고정희의 모든 면모가 담겨 있다. 다채롭다.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 P23
어두운 날들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조금 마신 후에 바라보는 산 아주 가까우면서도 먼 산 하나 그 산에 나는 아직 오르지 못했습니다 길다면 긴 서른아홉 해 동안 나는 산으로 가는 길을 죄다 더듬었지만 미지로 열린 그 오솔길들은 원으로 원으로 원으로 떠났던 문에 닿아 있을 뿐, 운무 자욱한 어여쁜 산봉우리 저무는 강둑에 고요히 서 있습니다 - P25
여느 지붕마다 겨울은 깊어 북한산 능선마다 함박눈 소복하니 이제는 설산으로 마주앉는 그대여, 그렇구나 서울땅 덮고 남을 저 눈이 그대 여생 덮고 남을 내 그리움 그대 하늘 덮고 남을 내 상처라 해도 우리 둘의 융기로 떠받치는 세상 나는 이미 닻줄을 풀었구나 - P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