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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ㅣ 창비시선 211
이면우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평점 :
그는 계약직 보일러공
막 쉰이 된 나이.
짐작할 수 있으되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삶의 고단함과 서러움.
“생을 축음기에 얹어 되돌린다면
바늘이 가볍게 긁어내는 슬픔이 강처럼 흘러올 것이다.” 38
“
“개활지엔 덤프트럭 먼지구름 피워올리며 오가고
자주 빈약한 가로수 뒤로 숨어야 했다 삶은 늘 그랬다
먼지 걷히길 기다려 다시 길 위에 서나
어디에도 정처는 없다 그땐 아직 몰랐다
두려움이 한 생을 벌레처럼 파먹어버리라는 것” 44
“슈퍼엔 통조림이 많다 정어리 통조림은 싸다
배움이 짧아 고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정어리 통조림을 꾸준히 선택한다 누구도 이의를
달진 않지만 때로는 저녁 식탁의 젓갈질이 늘어지는 걸 본다” 74
그러나, 삶이 신산하기만 하겠는가.
“열일곱, 처음 손공구를 틀어쥐었다 차고 묵직하고 세상처럼 낯설었다 스물일곱, 서른일곱, 속맘으로 수없이 내팽개치며 따뜻한 밥을 찾아 손공구와 함께 떠돌았다 나는... 천품은 못되었다 삶과 일이 모두 서툴렀다 그렇다 그렇다 삶과 일과 그리고 유희가 한몸뚱이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나는 머리칼이 잔뜩 센 나이 마흔일곱에야 겨우 짐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주 오래 움켜쥐고 있으면 쇠도 손바닥처럼 따스해지고야 마는 듯” 57
익어가는 것이고, 따뜻해지는 것이다.
사랑 또한.
“밤낮없이 북대길 때 아내 얼굴 아슴푸레하더니 각방 쓰기 잦아지며 선연히 떠오른다 그래, 너로 하여 세상이 오래 뜨거웠구나 돌멩이마저 구르게 하는 힘이여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죄다 미인이다, 이 한구절을 쓰는 데 나는 꼬박 사십년이 더 걸렸다.” 39
노동의 가치와 필요성을 또 이렇게 자연과 잘 버무려 강조한다.
“목련꽃 피면 겨울 하나 또 갔다,가 아니라
남자가 일할 수 없다면 목련꽃 펴도 봄은 온 게 아니라는 거다
세상은 꽃과 일이 함께 있어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법“
아래와 같이
시인이 닳도록 읽었다는, 박용래 시인에 대한 오마주이자
건강하고 따뜻한 삶이 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배추 무 씨는 늦여름 꿈의 부피처럼 쬐그맣다 텃밭 풀 뽑고 괭이로 쪼슬러 두둑 세워 심었다 나는 가으내 돈 벌러 떠돌고 아내 혼자 거름 주고 벌레 잡아 힘껏 키워냈던가 김장독 삿갓 씌우고 움 파 무 거꾸로 세워 묻고 시래기 엮어 추녀 끝에 내걸으니 문득 앞산 희끗한 아침, 대접 속 무청이 새파랗다 배추김치 새빨갛다 그 아리고 서늘함 무슨 천년 묵은 밀지이듯 곰곰 씹어보다 눈두덩이 공연히 따듯해지다 햇살 동쪽 창호에 붉은 날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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