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한강 1 : 해방
김세영 지음, 허영만 그림 / 가디언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해방이 되고
마님의 딸 아씨를 혜린씨라 부르게 되었고
그는 평양으로 향한다.
다 말하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한 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세기 타이밍 애지시선 113
이송우 지음 / 애지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특이하다.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노동시.
투쟁을 외치지 않는. 추상적인 것으로 숭고하게 존재하는 그 노동이 아닌. 어떤 노동의 구체.
삼성전자 프린터 부분 상품기획 쪽 일을 하다가 프린터 사업부 전체가 HP로 넘어가고, 그예 ‘강제휴업명령’ 당한 이야기가 담겼다.

‘오토모티브 섹션장’, ‘컨조인트 효용 조합’, ‘상관계수 0.3’, ‘T2O 프로젝트’, ‘크론바흐 알파값’ 등등 낯선, 화자의 직장 생활에서는 익숙할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암 진단 후
곧 돌아오겠다고 웃던
개발팀 김수석은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병석에서도 걱정이 많더니
한 달 만에 눈을 감았네요

매출 확대를 위해
해외 거래선을 개척하고 오겠다던
걸걸한 목소리의 영업팀 이부장은
자신을 탓하다가
귀국편 비행기 안에서 목을 맸다지요“ 54

”역량개선 프로그램에 내 이름을 울린 친구야
노병은 죽지 않는다고
함께 산행하던 네가 부디 슬프지 않았으면“. 88

”삼십 년 개발자들
봄날 벚꽃처럼 날려가는 날“ 90

”어제는
명예퇴직한 동료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모금을 하자는 이메일을 보았다
청춘을 보낸 회사에서 자발적으로 밀려 나온 뒤
자택에서 맞은
아무도 지켜보지 못한 죽음“ 92

등 비정한 자본에 희생당하는 부속품으로서의 고난이 흩뿌려져 있다.

”딸내미가 손목을 그은 후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렸고“ 96
”백신을 맞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앓는 사람처럼
뿔뿔이 흩어지라는 말이다
이곳에서 사라지라는 말이다“ 93
”백 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 섰다고
떨고 있는 나에게
두 손 놓아도 괜찮다고
여기 절벽은 없다고“ 99

이후가 궁금하다. 신경 쓰인다.

진부령 종산제


봄비처럼
사랑하는 이는 쉽게 떠나고

가을 서리처럼
새로운 이는 익숙해지기 어렵다지만

길이 끝나고
길이 시작되는

당신과 나를 기억하겠습니다 - P107

모세의 기적


선배님들 제발 나가주세요
저희도 좀 삽시다

애들 학자금 걱정되신다고요
오래 다니셨네요
저희도 일 좀 해봅시다

GM대우에서 왔다는
신임 인사팀장은 모세다

한솥밥 먹던 사람들, 노소로
단번에 갈라놓았다
그 정리해고 전문가는 안다

흩어지면 죽는다
흩어지면 죽는다 - P87

궁극의 미래는 낙화,
터질 듯 부푼 목련이나
흩날리는 벚꽃이나
모든 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 P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시선 211
이면우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계약직 보일러공
막 쉰이 된 나이.
짐작할 수 있으되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삶의 고단함과 서러움.

“생을 축음기에 얹어 되돌린다면
바늘이 가볍게 긁어내는 슬픔이 강처럼 흘러올 것이다.” 38


“개활지엔 덤프트럭 먼지구름 피워올리며 오가고
자주 빈약한 가로수 뒤로 숨어야 했다 삶은 늘 그랬다
먼지 걷히길 기다려 다시 길 위에 서나
어디에도 정처는 없다 그땐 아직 몰랐다
두려움이 한 생을 벌레처럼 파먹어버리라는 것” 44

“슈퍼엔 통조림이 많다 정어리 통조림은 싸다
배움이 짧아 고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정어리 통조림을 꾸준히 선택한다 누구도 이의를
달진 않지만 때로는 저녁 식탁의 젓갈질이 늘어지는 걸 본다” 74

그러나, 삶이 신산하기만 하겠는가.

“열일곱, 처음 손공구를 틀어쥐었다 차고 묵직하고 세상처럼 낯설었다 스물일곱, 서른일곱, 속맘으로 수없이 내팽개치며 따뜻한 밥을 찾아 손공구와 함께 떠돌았다 나는... 천품은 못되었다 삶과 일이 모두 서툴렀다 그렇다 그렇다 삶과 일과 그리고 유희가 한몸뚱이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나는 머리칼이 잔뜩 센 나이 마흔일곱에야 겨우 짐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주 오래 움켜쥐고 있으면 쇠도 손바닥처럼 따스해지고야 마는 듯” 57

익어가는 것이고, 따뜻해지는 것이다.
사랑 또한.

“밤낮없이 북대길 때 아내 얼굴 아슴푸레하더니 각방 쓰기 잦아지며 선연히 떠오른다 그래, 너로 하여 세상이 오래 뜨거웠구나 돌멩이마저 구르게 하는 힘이여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죄다 미인이다, 이 한구절을 쓰는 데 나는 꼬박 사십년이 더 걸렸다.” 39

노동의 가치와 필요성을 또 이렇게 자연과 잘 버무려 강조한다.

“목련꽃 피면 겨울 하나 또 갔다,가 아니라
남자가 일할 수 없다면 목련꽃 펴도 봄은 온 게 아니라는 거다
세상은 꽃과 일이 함께 있어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법“

아래와 같이
시인이 닳도록 읽었다는, 박용래 시인에 대한 오마주이자
건강하고 따뜻한 삶이 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배추 무 씨는 늦여름 꿈의 부피처럼 쬐그맣다 텃밭 풀 뽑고 괭이로 쪼슬러 두둑 세워 심었다 나는 가으내 돈 벌러 떠돌고 아내 혼자 거름 주고 벌레 잡아 힘껏 키워냈던가 김장독 삿갓 씌우고 움 파 무 거꾸로 세워 묻고 시래기 엮어 추녀 끝에 내걸으니 문득 앞산 희끗한 아침, 대접 속 무청이 새파랗다 배추김치 새빨갛다 그 아리고 서늘함 무슨 천년 묵은 밀지이듯 곰곰 씹어보다 눈두덩이 공연히 따듯해지다 햇살 동쪽 창호에 붉은 날 - P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적멸의 즐거움 문학동네포에지 59
김명리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나치게 낡거나 늙었다.

“사위는 고요해, 마른기침 소리
당신은 비 그친 다락에서
나는 또 풀섶에서
낭창한 달빛 계면으로 흐르는 젓대 소리” 68

시인의 세 번째 시집으로 고작 마흔(‘내 이틀을 청하여 묵은 마흔 동갑내기 재철씨 집’ 64)에 아주 늙었다. 시어도 심상도 전개도. 청록파 중 조지훈이 연상될 만큼.

왜 그런가 했더니, 열세 살 무렵에 동자승 생활을 했다고 한다. 56쪽에 있다. ‘멀리 계신 엄마 생각’을 하고 있는 ‘천수경 한글본을 따라 외’우는 아이.

시인들이 대개 그렇듯, 빌드업 없이 정서가 ‘잉걸’로 불탄다.
“목젖을 비집고 올라오는 쓰라림” 66
“핏빛 제 부리로 찍어누르는 발목 붙들린 지친 울음소리” 73

고아하다고 좋아할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고풍스럽거나 예스러운 말투는 시집 내내 변함이 없다.
“허공에 붙박인 저 낡은 경첩들” 65
처럼 산뜻하지 않고 지겨울 수도 있다.

어려서 노안인 녀석들을 나이 들어 만나면 오호 이 녀석 안 늙었네 싶은 때가 있을 것이다.

적멸의 즐거움



오대산 중대에 이르러서도 보지 못한 적멸보궁을 여기 와서 본다

위도 아래도 훌러덩 벗어 던지고
삐걱대는 맨 뼉다귀에 바람소리나 들이고 있는 저 적멸

생각나면 들러서 성심을 다하여 목청껏 진설하는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저 소리의 고요한 일가친척들

세상에 남루만큼 따뜻한 이웃 다시 없어라
몰골이 말이 아닌 두 탑신이
낮이나 밤이나 대종천 물소리에 귀를 씻는데

텅 빈 불상좌대 위,
저 가득가득 옮겨앉는
햇빛부처, 바람부처, 빗물부처
오체투지로 기어오르는 갈대잎 덤불

밤 내린 장항리,
폐사지 자욱한 달빛 진신사리여! - P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11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인도 아는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시가 누군가의 입맛을 잃게 해서.” 77

자기가 지독하게 어둡고 무거운 것을.

“생은 선택된 적이 없다. .. 엉겁결에 생에 들어서고, 생의 한가운데 놓인다. 생은 시달리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다. 깨달음이 있는 것 같지만 생판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지금 이 생이 무덤이다. 생은 우리들의 무덤이다. 생무덤이다.” 76

세상이 생무덤이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이렇게 되어버린 인생은 원래 이렇게 되게끔 정해져 있었다는 듯.” 25
그 절망은 숙명인 것이고. 시집 곳곳에 낭자하다.

하지만,
“인생에는 지리멸렬한 요소가 있다. 깔끔하게 털지 못하는 그 무엇. 질척거리는 헛소리 같은 게 있다. 가늘고 긴 인생들에게 불꽃 몇 개가 날아든다. 찬 하늘에선 눈이 내렸다. 헛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80
이 정도의 냉소면 충분하지 않나. 허망해도 계속되는 ‘헛소리’ 나불대는 것. 함께면 더 좋고.
터덜터덜 가는 것.
이렇게

시정잡배의 사랑


시정잡배에겐 분노가 많으니 용서도 많다.
서늘한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녹슨 철제계단 같은 놈들.

제대로 매달리지도,
끊어져 떨어지지도 못하는 그런 사랑이나 하는 놈들.
사연 많은 놈들은 또 왜들 그런지.

소주 몇 병에 비 오는 날 육교 밑에 주저앉는 놈들.
그렁그렁한 눈물 한 번 비추고 돌아서서 침 뱉는 놈들.
그러고도 실실 웃을 수 있는 놈들.
그들만의 깨달음이 있다.
시정잡배의 깨달음.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딱 한 번만 부르고 죽자. - P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