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도 떠날 곳 없는 시대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68
문충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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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하지 않는다.
1986, 87년에 씌어진 시를 1988년에 낸 시집이라는데
그 1987년을 겪고도 그는
직설하지 않는다.

“반세기를 살아도 삶은 하나로 아프게 칼날처럼 눈떠 있고”141

“세상은 어디론가 떠가는데
무심무심 대낮이 오고
눈부신 세상 개같이 더웁도다” 36

“떠나도 떠날 곳 없는 시대에 비는
비만 내리게 하는구나” 38
라고 할 뿐.

“폭풍우 속을 헤매던 젊은 날이여
반만년을 비록 길 잃어 가없이 떠돌았을지라도
우리는 참으로 구차하게 살아 남았으니
얼마나 구차하게 살아 남는 법에 익숙해 있느냐
그러나 다시 떠나야 하리
구차한 삶을 향하여
그 속에 우리가 가야 할 구차한 길이 있으므로” 67

그는 꿰뚫어 보고 있었을까. 87년 성난 파도 같은 봉기의 힘이 늘 우리에게 있어도, 기득권이 군림하는 세상이 지속될 것을.

“바다를 다스리려 마라
하늘을 다스리려 마라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사람이므로 얘야
사람을 다스리려 마라
그 권한도 없으면서
그 능력도 없으면서
까부는 것은 자유지만
다른 사람들 자유롭게 하라
…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착하게 살게 하라
다스릴 게 없거들랑 네 그림자나 다스려보아라
해가 되게
달이 되게
별이 되게
한줌 흙이 되게
참으로 얘야
부끄럽구나” 97

아래 ‘밑줄긋기’ 할, 두 시는 이즈음에 읽어도 지독하게 시리다.

다시 명령법 연습 3


거초옹
살기 위하여
명중시켜라
단방에 명중시키지 못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 된다
정조준하여
숨을 죽이고
방아쇠를 당겨라
그리움의 젖꼭지를 만지듯
일단
이단
탕, 탕, 탕탕 쏘아야 될
우리 시대의 타깃은 어디 있니?
찾아도 찾아도 안 보인다
푸른 하늘을 향하여
정처 없이
날아가는
나의 청춘이여 - P101

달 밤


매미 소리 달밤을 깬다
달밤이여 오늘도 불쌍한 것들 재우고
불쌍한 것들 잠속을 기웃대어도
불쌍한 것들은 불쌍한 것들끼리
다리 오그리고 잠을 잘 뿐
잠속에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웃으며 낄낄 넉넉하게 살게 해다오
매미는 대낮인 줄 알고 노래하지만
세상이 밝다고 그저 노래만 부르겠느냐
아무리 가로등이 밝아도
길거리에 어둠은 깔리고
아무리 밝은 세상이라 해도
도둑은 도둑질을 그만두지 않으니
우리가 언제까지 멍텅하게 노래하는
대낮도 달밤도 분별하지 못하는
매미로 살아야 되겠느냐
눈뜨고 달밤을 지새우며
도둑을 지켜도 겁만 나고
하나도 역사는 달라지지 않는구나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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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글씨 - 작가정신 소설향 1 작가정신 소설향 23
이윤기 지음 / 작가정신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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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책장에서 꺼내 읽어 본다.
98년 11월에 창원서적에서 샀다는 전표가 붙어 있다.
창원에 무슨 일로?

그렇게 궁금함을 자아내며 소설은 흐른다.
40대 후반의 여성 화자가 무슨 큰 일을 당하고 “내 세대 자매들과 다음 세대 딸들에게 써서 남긴다.”를 첫 문장으로.

이윤기답게 서양말의 어원을 고구하고, 단단한 문장, 그리스신화의 적절한 사용이 조화롭다.

“내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종이었다. 내 어머니는 그 아버지의 종이었다.” 21
아직도 도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선언일까?

여성주의 쪽에서 다룰 만한 작품인데, 얼마나 호명되었는지 궁금하다.
서술자는 여자로서 사랑보다 투쟁을 외쳤다.

사랑하라. 이것은 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싸워라. 이것은 딸들이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특권을 원칙에 앞세워서는 안 된다.
그러면 둘 다 잃는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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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 - 강화의 자연 속에서 삶을 그립니다
김금숙 지음 / 남해의봄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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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에 정착한 김금숙의 첫 에세이
쌀 알레르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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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의 침묵
최승호 지음 / 열림원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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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선문염송>, 선어록들의 번역서에서
짧거나 긴 글을 하나 골라 왼 쪽에 싣고
오른 쪽에다 그것과 관련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구조로 된 책이다.

그는 시인이니 언어를 버리라는 선불교와 근본적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는데,
때론 선사들의 깨달음을 부연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얘기를 하기도 하고, 상관없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애초에 선사들을 이길 생각도 안 했겠지만,
선사의 이야기에서 최승호 자신의 얘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 좋았다.

가래침


친절한 가르침은 가래침 같다. 가래침을 뱉듯이 가르친다. 아무것도 받아먹을 수 없도록. - P13

대대로 이으면서 전해진 것


보이지 않지만 내가 무슨 끈에 묶여 있는지 <시간>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개처럼 묶여 있지만 내가 왜 미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는지를 적어도 사육당한 개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대대로 이어지면서 나에게 전해진 것은 시간이며 개들이 물려 받은 것은 개끈이다. 개가 죽어도 개끈은 남고 내가 죽어도 시간은 남는다. 부질없는 것인 줄 알면서 나는 때로 시간을 물어 뜯고 개는 묶인 채 개끈을 씹는다. - P25

식은 재를 뒤적거리고 식은 재를 뒤적거리며 추운 한 생이 간다. 욕망의 불씨는 점점 재에 파묻히며 사위어간다. - P57

그 너머


장대 끝에 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 앉아 있다. 그 너머는 두루 맑은 가을 하늘, 구름 한 송이 없다. - P111

내가 죽고 봄이 오면
봄에 녹은 한 숨결이
제비꽃 그늘 밑을 한숨쉬며 지나갈까.
물 위를 발가락도 없이 지나갈까.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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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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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소린지 웃는 소린지 알 수 없다”
화자는 그늘져 있고
운다.

“방이 어두워지자
밤이 밤의 뜻으로 깊어지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 까닭도 없이” 23

“더 좋은 내일이 있다는 말은 못하겠다”면서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
나의 일기에는 잠시 꿔온 빛” 을 잠간 비칠 뿐이다.

문태준은 아마 말수도 적고
침울해 보일 정도로
조용한 아이였을 것 같다.

쉽게 따라 하기 어려울
이 미묘한 순간의 포착과 묘사가
깊다.

꽃잎 지는 시간


겨우 밥술 뜰 만한 힘으로
늙은 손목에서 뛰는 가녀린 맥박과도 같이

가가이 아주 가까이에서,

나의 생각과 생각이 나를 어루만지다 잠시 떠나듯이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오기도 전에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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