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정희진의 글쓰기 4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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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궂다.
봄꽃의 차례 따위 엉클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자본주의가 멈춤 없이 진보하고 있는 도중과 결과로
우동을 함께 먹고 있는 부녀의 미래가 날씨만큼 어둡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날은 곧 개었다 말다 할 테지 인간보다는 더 오래.

정희진 선생은 영화 <소셜포비아>를 얘기하면서 한국 사회를 이렇게 진단한다.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는 대사를 보자. ˝대한민국에 간첩이 몇 명이게? 5만 명이야. 5만 명. 걔들이 어떻게 안 걸리는 줄 알아? 진짜 좋은 방법이 있거든. 지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빨갱이면서 빨갱이를 잡겠다고 설쳐대는 거지.˝ 이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개인들이 각자 누구인 줄 모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라운드 제로에서 서로를 외면한 채 똑같은 제복을 입고 뫼비우스 띠의 선상(線上)을 헤매는 장면에 대한 묘사다. 우리는 자신이 ‘간첩’인 줄 모르는 간첩들이다. 모두 개성 있는 다름(distinction)을 주장하는 개인들이되 실은 똑같다. 개별적으로 자본에 포섭되어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모두가 모두의 아바타다.” 182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너 자신을 알라. 생각을 하라. 죽도록 연습하고 표현하라.” 183

‘오프라인에서 글쓰기’를 ‘유일한 저항’으로 들었다.
‘기억과 연대’가 반드시 정의인 것은 아님도 요구하였다.(231-249)

원래 국가 내부의 차이가 국가 간의 차이보다 큰 법이고 격동기에는 더욱 그렇다. - P227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이제까지 근대의 주체가 아니었던 여자, 아이, 장애인, 자연을 기차 밖에 살게 하거나 생존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타자들은 진정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여성과 아이, 동물은 오염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들도 순수하지 않다. 이들이 순수하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내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감독 자신이,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주체이고,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대상조차 지정할 수 있는 조물주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새로운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스스로 ‘꺼지면’ 안 되는가. 자리에서 내려오라. 인류와 지구를 해방하려 하지 말고 그냥 하방하라. 팬데믹 시대의 구원은 우리 모두 ‘섬싱(something)’이 되고자 했던 의지를 버리고, 자연의 일부인 ‘낫싱(nothing)’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갈팡질팡하는 삶의 한가운데서, 글쓰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의지가 부끄러울 뿐이다. - P221

그의 모든 작품이 내게 위로가 된다. 고레에다의 영화는 치열하지만 고요하다. 나만의 감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영화에서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다. 그 그림자가 내 삶의 번잡스러움과 욕심, 고통을 잊게 한다. 삶이란 죽음이라는 영원하고도 편안한 잠(永眠)이 기다리는 행복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기대하지 않으면, 삶도 행복하지 않다. 죽음만이 희망이다. - P191

게임 중독이나 혐오 발화는 ‘인간성 타락’이 아니라 실업 문제다. - P174

글쓰기의 정의는 이견이 없다. 글은 ‘자기’ ‘생각’을 ‘표현(재현)’하는 ’노동‘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법이고, 생각하기는 가장 외로운 작업이다. 글쓰기는 중노동이다. 글스기는 두렵고, 어렵고,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수입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SNS에서 글쓰기는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도 손쉽고 이익이 막대한 돈줄이자 중우(衆愚) 정치다. 키보드 사용자의 노동과 시간은 고스란히 ’구글‘이나 ’삼성‘이 가져가지만,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바친다. 그 대가는 무엇인가?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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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를 위한 라틴어 수업 - 식물의 이름을 이해하는 법
리처드 버드 지음, 이선 옮김 / 궁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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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 141쪽밖에 안 되니 길이가 짧은 책이다.
그러나, 식물 학명에 쓰이는 라틴어를 다양한 주제로 나누어 꽤 여럿 소개하고 있어서 쉽지 않다.
표지부터 본문에 그려진 식물 그림이 예쁘다.
하지만, 식물 전공자가 아니고서야 습득해야 할 내용은 아닌 듯하다. alba는 흰색으로 쓰이는 것을 어디서 본 적이 있지만, adulterinus[간통의, 잡종 생성이 쉬운]까지야 몰라도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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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좋아한 적 없어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체스터 브라운 지음, 김영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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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서툰 애정 회고담이다.
“코니는 길 건너편에 살았다”라며 시작한다.
표지에 나오는 여자가 코니의 여동생 캐리
캐리의 친구 스카이.
캐리는 서술자 ‘체스터: 작가 이름 그대로‘를 어려서부터 좋아했으나, 체스터는 스카이에게 고백을 했다. 고백해 놓고는 데이트하지 못하거나 않는다.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어긋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정신병을 앓다 죽는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한다는 것. 돌아가시자 눈물 한 방울 쥐어짤 뿐, 장례식에도 가지 않는다.
책 앞에 헌정사를 바친 ’이숙인‘씨도 그렇고,
자전적 이야기인 만큼 작가 주변 인물들은 등장 인물이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릴 터인데
썩 유쾌하지 않을 듯하다.
감기 탓에 주루룩 흘러내린 콧물 맛일 듯.
찌질하고 찝찔하다.
대개의 10대가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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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정희진의 글쓰기 4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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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 내가 본 것과 안 본 것 사이에서 정해지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자신이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싸우기 쉽다.
전체도 부분도 없다. 앎의 범위를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상이 앎이요, 삶이어야 한다. - P150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아는 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다. - P141

사랑은 상대(대상)와의 관계가 아니다.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나의‘ 사건이다. 흔히 말하는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행위,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결혼, 이성애주의, 로맨스 문화, 헌신, 희생 따위를 포함하는 제도와 문화적 각본(cultural script, 이데올로기)이 있다. 인간은 사람이든 절대자든 물화된 대상이든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존재다. 인간의 조건은 사회적 삶과 생명체로서 유한성 두 가지인데, 생명체로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사는 의미를 찾아야 하고 사랑은 가장 절실한 방도다. 사랑이 없다면 삶도 없다. 사랑 자체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사는 의미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개인/파트너와의 애정을 추구하는 이들이나 사회적 권력, 돈, 명예를 성취하려는 노력 역시 모두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이다. - P125

기존의 사고방식을 의심해야 하는데, 이는 기득권과 연결된 문제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과 협상할 수는 있지만 양립할 수는 없다. 환경운동은 발전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모든 인식이 당파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상은 매 순간의 긴장을 요구하는 만만찮은 요구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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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정희진의 글쓰기 4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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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매거진을 쭉 듣고 있고,
10년 가까이 집에 선생의 책이 많은 걸 봐 와서
몰랐다.
선생의 책을 처음 읽는다.
말씀도 독특하고 재밌지만,
글이 이렇게 훌륭하구나.
폐부를 찌르고 생각 거리를 자꾸 던져서
굉장히 뚜벅뚜벅 읽게 된다.
영화 이야기이기도 하고 글쓰기 책이기도 하면서 공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게 한다.
양주가 느꼈을 망양지탄이 이런 것이겠구나.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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