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사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오장환 지음 / 열린책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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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직도 나의 목숨은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뿐.

”주판알을 굴리는 작은 아씨야
너와 나는 빈 지갑과 사무를 바꾸며
오늘도 시들지 않느냐
화병에 한 떨기 붉은 장미와 히아신스 너의 청춘이, 너의 체온이……” <체온표>

생계가 있고
피로가 있겠으나
바닥에 깔린 건 지독한 비애.

“위태로운 행복은 아름다웠고
이 밤 영회(咏懷)의 정은 심히 애절타
모름지기 멸하여 가는 것에 눈물을 기울임은
분명, 멸하여 가는 나를 위로함이라. 분명 나 자신을 위로함이라.” <영회>

“부엉아! 너의 우는 곳은 어느 곳이냐
어지러운 회오리바람을 따라
불길한 뭇 새들아 너희들의 날개가 어둠을 뿌리고 가는 곳은 어느 곳이냐” <황무지>

그는 <병든 서울>을 떠나 1951년에 북한에서 죽었다.
그의 시집을 읽었다는 이유로 멀쩡한 교사 5명 등 9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간첩으로 조작돼 실형을 살았다. 1982년에 일어난 오송회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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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 박영근 유고시집 창비시선 276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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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의 발문에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겨울이었을 것이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 당시 나는 기계노동의 습관이 뼛속까지 절어 있었고, 제복과 규율이 어울리기까지 했고… 그를 보자마자 통쾌했던 것 같다. 그는 행색만으로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기계노동의 덫에 온몸이 결박된 나를 그야말로 단숨에 ‘조져’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는 주사께나 부리던 기인들이 있었는데, 기인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과 방종에 시대의 아픔으로 알리바이를 삼고 사는 속물적 기인들이었다. 그보다는 나이가 한참들 윗길이었으나 내가 자리할 무렵 그는 이미 ‘기인들’을 다 제압하고 있었다. 기인들은 달아날 궁리나 하고 있던 차에 내가 들어서니 슬금슬금 빠져버렸다.”

박영근의 오똑한 면모가 잘 보인다. 주워들은 이론과 글발에 약간의 반독재 정도를 버무려 잘난 척하며 기행이라 말하지만, 성추행을 넘어선 만행을 일삼던 몇몇의 소위 기인들과 그들의 추종자와 벗들은 아마 박영근과 백무산 같은 진짜 ‘밑바닥 인생’을 만나면 사족을 못 썼으리라.

박영근은 16살 고1 나이에 부조리한 사회를 고민하고 억압적인 학교생활을 뛰쳐나와 바로 사회에 나와 독재와 자본주의와 투쟁한 사람이다.

“1983년 용산구 남영동 소재 번지 미상의 어둠속에서
낯선 술래가 되어 나를 찾기 시작한 거예요

(욕조에 쏟아지는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비명을 지르며….
아, 내가 쓴 자술서를 믿어만 준다면)” <자술서> 32-33

이 시집에서는 이 시에만 엄혹한 시절의 고통이 잠깐 나온다.
2006년에 향년 48세로 돌아가셨고, 이 시집은 생애 마지막 4년 간의 작품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는 이미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제발 80년대니 90년대니, 그런
헛소리로 나를 불러내지 말아요
나는 지금 2000년대의 근사한 헛소리를 씹고 있고
달콤한 똥을 싸고 있다구요)” <낡은 집> 46

그의 서두른 죽음이 아쉬운 것은
아래와 같은,
싸우는 자의 관조가
얼마나 깊어지는지
어떻게 변해가는지
너무나 궁금하기 때문이다.

“옛날도
훗날도 없다

시간의 경계 위에서 늙어가는 길이 있을 뿐

늘 오늘이듯
풀들은 저렇게 자라고
내 마음에 그득해지는 눈무신 여름빛 등성이
밤을 새워 슬레이트 지붕을 두드리던

빗소리는 발자국 하나 없다

무덤이 꽃을 피우는
이 짧은 한나절이
문득 바람에 기우뚱 넘어지기도 하는 것을
나는 웃으며 바라본다”. <마야꼬프스키> 25

생의 어디쯤에서 나의 사랑도
썩을 대로 썩어
온갖 수사와 비유를 벗고
저렇게 낮은 목소리로
세상의 캄캄한 구멍을 울릴 수 있을까
간절하게 나를 부를 수 있을까 - P28

겨울 선두리에서 1



강화 앞바다 선두리
갯바람에 기울어가는 폐가 몇채
돌담가에
옛일처럼
사철나무들 마냥 푸르러가고

찬 노을이 내린다
뻘길을 더듬는 사내의 캄캄한 뒷등에,
온통 소주에 취해가는
유행가 속에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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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문학의전당 시인선 81
김명기 지음 / 문학의전당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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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갖고 싶다!
어쩌다 이 책은 품절이 되어 이토록 비싸게 거래되고 있는가.
시인의 첫 시집이라 그런가
특히 4부의 말랑말랑한 습작시들은 좀 느끼하지만,
그야말로 ‘찰기 없는 사람’으로서
문학이 언제나 대상으로 삼던, 주체인 적 별로 없는
육체 노동자 혹은 임노동자로서의
뚜렷한 족적이 시집에 가득하다.
빈대 터진 자국 가득한, 꼬린내 지독해도
정겹고 따스했던, 무엇보다 굳세었던
삼촌들의 방을 보는 듯하다.
‘어린 시절 내내 나를 끌고 다니던 알 수 없는 허기와 가물한 궁핍’이 소재에 머물지 않고 깊어질까 궁금하고,
그저 해지는 오후를
‘탄력 잃은 햇살이 잿빛 바람에 밀려 세상 밖으로 소진되어간다’고 하는 묘사가 얼마나 더 빛날까 기대가 된다.
발표 순서대로 찾아 읽어야겠다.

정동진에 관한 몇 가지 기억


몇몇 시인들이 작은 그 동네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누구도 그곳이 알려지지 않은 탄광촌이었거나 포구조차 변변찮은 어촌이었다고 쓴 시는 없다. 불그죽죽한 진달래 철철대는 봄날, 괘방산 아래 탄 먼지 풀풀풀 날리며 헐벗은 7번국도 위를 세월 없이 지나던 제무시 트럭에 대해 빈 궤짝 같은 역사 숨 짧은 플랫폼 끝자락, 엎어놓은 고무다라이 같던 탄 무더기들에 대해 간혹 바다로 내려선 볕들이 비늘이 되어 반짝이면 바랜 나무 울타리 위로 기어오르는 나팔꽃 뒤로 처마 낮은 집들이 일제히 바다를 향해 경배하며 늙어가고 있었음에 대해 단 한 줄도 쓰 이지 못한 정동진. 바다를 껴입은 겨울바람이 어린 소나무 모가질 비틀면 옷핀 같은 이파리들이 소름처럼 돋아 파르르 떨던 곳. 한바탕 물큰한 욕망이 휩쓸고 갔어도 가끔 모래톱에 걸려 넘어지는 파도 같은 어설픈 사람도 있어 이런 곤고한 글 하 나쯤 왜 쓰고 싶지 않았을까. 날마다 발밑으로 지랄탄이 빠바바방대던 갓 스물 온 나라가 올림픽에 열광하던 그해 지상에 그런 동네 하나 있었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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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루의 버디 1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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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서 주인공들은
그림의 선이 가늘고 멋있다.
장발도 흐드러진 꽃 같은 느낌
설정과 줄거리 전개는 좀 유치하고 느닷없지만,
그게 만화지 뭐.
<불가사의한 소년>의 냉소와 약간의 위악,
<천재 유교수>의 아닌 듯 챙겨주는 인간미
가 함께 있다.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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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문학의전당 시인선 81
김명기 지음 / 문학의전당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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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같은 사람이 없으니 같은 삶도 없고, 그러니 시도 다 다르다.
그러나 분류 가능한 범주 안에 다들 있다.
시대나 지향이나 학벌, 고향, 성 등.
김명기는 일반적인 특정이 어렵다. 이런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러시아 선적 대게잡이 배에 조업감독관이’ 되어 ‘수평선 보이지 않는 바다에 간 적이 있’고,
‘목숨 없는 붉은 고깃덩어리에 가해지는 칼질’을 하느라 ‘오른손 검지 끝마디에 콩알만 한 굳은살이 박인’ 사람이다.
그렇다. 잉여로 사는 예술가인 양하는 시인이 아니고, 노동의 의미를 번뇌하는 노동자도 아닌,
‘시작과 끝이 모호한, 아슬한 한 생’을 살고 있다.
대개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시의 대상이 되었던, 소외받는 삶이 자기를 읊는다.
매우 놀랍고 새롭다.
2부까지만 읽었다.
몇 편 밑줄긋기에 남긴다.

문짝 떨어진 통시 속 움츠린 햇살마저도
푸석하게 낡아버린 오후
그래도 때가 되면 저 혼자 피었다 지는
백일홍 나무가 서러워 다가서는 발걸음을
한사코 잡아채는 환삼덩굴이여
긴장한 고양이들 낮은 울음소리여
살아 움직이는 낯선 부재의 모든 슬픔들이여 - P23

숱하게 지나간 시간 속
무수한 각오들은
저 붉은 꽃의 한 호흡 같은 것이라
다만 그 순간만 지독했을 뿐이네
그까짓 혁명성을 버리고
이까짓 시를 택하고서야
비로소 터져 나오던 눈물처럼
채 여물지 않은 봄날
창부타령 같은 옅은 비 한 자락 사이



꽃 떨어지는 소리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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