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 박영근 유고시집 창비시선 276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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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의 발문에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겨울이었을 것이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 당시 나는 기계노동의 습관이 뼛속까지 절어 있었고, 제복과 규율이 어울리기까지 했고… 그를 보자마자 통쾌했던 것 같다. 그는 행색만으로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기계노동의 덫에 온몸이 결박된 나를 그야말로 단숨에 ‘조져’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는 주사께나 부리던 기인들이 있었는데, 기인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과 방종에 시대의 아픔으로 알리바이를 삼고 사는 속물적 기인들이었다. 그보다는 나이가 한참들 윗길이었으나 내가 자리할 무렵 그는 이미 ‘기인들’을 다 제압하고 있었다. 기인들은 달아날 궁리나 하고 있던 차에 내가 들어서니 슬금슬금 빠져버렸다.”

박영근의 오똑한 면모가 잘 보인다. 주워들은 이론과 글발에 약간의 반독재 정도를 버무려 잘난 척하며 기행이라 말하지만, 성추행을 넘어선 만행을 일삼던 몇몇의 소위 기인들과 그들의 추종자와 벗들은 아마 박영근과 백무산 같은 진짜 ‘밑바닥 인생’을 만나면 사족을 못 썼으리라.

박영근은 16살 고1 나이에 부조리한 사회를 고민하고 억압적인 학교생활을 뛰쳐나와 바로 사회에 나와 독재와 자본주의와 투쟁한 사람이다.

“1983년 용산구 남영동 소재 번지 미상의 어둠속에서
낯선 술래가 되어 나를 찾기 시작한 거예요

(욕조에 쏟아지는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비명을 지르며….
아, 내가 쓴 자술서를 믿어만 준다면)” <자술서> 32-33

이 시집에서는 이 시에만 엄혹한 시절의 고통이 잠깐 나온다.
2006년에 향년 48세로 돌아가셨고, 이 시집은 생애 마지막 4년 간의 작품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는 이미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제발 80년대니 90년대니, 그런
헛소리로 나를 불러내지 말아요
나는 지금 2000년대의 근사한 헛소리를 씹고 있고
달콤한 똥을 싸고 있다구요)” <낡은 집> 46

그의 서두른 죽음이 아쉬운 것은
아래와 같은,
싸우는 자의 관조가
얼마나 깊어지는지
어떻게 변해가는지
너무나 궁금하기 때문이다.

“옛날도
훗날도 없다

시간의 경계 위에서 늙어가는 길이 있을 뿐

늘 오늘이듯
풀들은 저렇게 자라고
내 마음에 그득해지는 눈무신 여름빛 등성이
밤을 새워 슬레이트 지붕을 두드리던

빗소리는 발자국 하나 없다

무덤이 꽃을 피우는
이 짧은 한나절이
문득 바람에 기우뚱 넘어지기도 하는 것을
나는 웃으며 바라본다”. <마야꼬프스키> 25

생의 어디쯤에서 나의 사랑도
썩을 대로 썩어
온갖 수사와 비유를 벗고
저렇게 낮은 목소리로
세상의 캄캄한 구멍을 울릴 수 있을까
간절하게 나를 부를 수 있을까 - P28

겨울 선두리에서 1



강화 앞바다 선두리
갯바람에 기울어가는 폐가 몇채
돌담가에
옛일처럼
사철나무들 마냥 푸르러가고

찬 노을이 내린다
뻘길을 더듬는 사내의 캄캄한 뒷등에,
온통 소주에 취해가는
유행가 속에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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