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도서관 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 찾기/열네 살이 어때서?>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왕실 도서관 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찾기 - 조선 시대의 놀라운 기록 문화 책과함께어린이 찾기 시리즈
신병주.이혜숙 지음 / 책과함께어린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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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록은 역사다. 

역사는 기록이다. 

 

조선의 보물 창고인 규장각은 지금의 창덕궁에 남아 있다. 정조가 왕이 되고 규장각에서는 1층은 역대 왕들이 직접 지은 글이나 왕이 쓴 글씨 들을 보관했고, 2층은 학자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곳이었다. 규장각 왼쪽에 있는 건물은 서향각이라고 했는데 종이로 만든 책들이 망가지지 않게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일을 하던곳이 있었다. 규장각 앞에는 부용지라는 연못이 있었으며 연못 옆에 있는 정자, 부용정 오른쪽에는 과거 시험을 치르던 영화당이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하는지 분명히 밝혀 두었는데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마라, 일할 때는 공적인 일이 아니면 마루로 내려가지 마라, 규장각에서 공부하는 학자가 아니면 아무리 높은 관리라 하더라도 규장각에 올라갈 수 없다. 일할 때는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해라." 

세종 대왕이 집현전을 만들어 나랏일을 한 것처럼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어 학문을 바탕으로 살기 좋은 조선을 만들고 싶어했던것을 알 수 있으며, 왕위에 있는 24년 동안 규장각 학자들과 함께 151종류, 3960권의 책을 펴냈다. 직접 책을 펴낸 것 말고도 중국이나 외국의 귀한 책들을 모아서 보관하기도 했다. 그래서 규장각을 조선의 보물 창고하고 했나보다. 

지금은 서울대학교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그 곳에는 왕이 쓴 글씨와 기록화가 자리잡고 있으며 왕실 기록의 꽃, 의궤가 있다.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의 의궤를 보자면 조선 시대에 나라나 왕실에서 치른 행사를 그림과 글로 꼼꼼하게 기록해서 엮은 책인데 규장각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보물인 의궤들을 둘러보자니 우리 나라도 서양의 기록화에 비해 작다고 할 수는 없을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어느 때였던가 읽었던 역사화를 다루는 책에서 우리나라의 역사화가 서양의 역사화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보존 되어 있는 숫자가 적다고 했던 걸 접했는데 사실 이 규장각에 숨겨져 있는 보물들을 보자니 우리나라의 역사화나 기록화는 결코 서양에 많이 뒤쳐져 있다고 해서는 안될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록의 문화를 가진 조선에서 왕실의 기록은 물론 선비들의 기록문화까지도 만나게 되면서 새삼 기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기도 하며, 조선에 기록문화가 정착되어 있었기에 고려나 삼국시대의 역사자료들보다 훨씬 더 방대한 자료가 현재까지도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록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100년 전, 500년 전, 1000년 전 우리 동네의 모습까지도 가늠할 수 있겠다. 과거가 역사가 지금 이순간도 우리 동네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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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_ 2011-10-28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일 학교에서 이 책으로 독서골든벨을 하는데 책을 다 못읽어서 고민하고있었는데 잘읽었습니당~

소지개 2011-10-31 17:12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초등학교 추천도서에 선정이 되어있더라구요.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왕실 도서관 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 찾기/열네 살이 어때서?>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열네 살이 어때서? - 노경실 작가의 최초의 성장소설
노경실 지음 / 홍익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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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연주는 초등학생딱지를 떼고 어엿한 중학교1학년 열네 살이다. 그렇다 열네 살은 세상에 태어나서 겨우 14년을 살았다는 말이다. 날수로 따지자면 고작 5,110일을 살았다는 것이 된다.  

어른들은 말한다. 

'겨우 열네 살짜리가?' 

때로는, 

'열네 살이면 어른이지!' 

열네 살은 어른도, 아이도 아닌 괴물 같은 때란 뜻인가? 

열네 살은 어른들의 마음과 기분에 따라 변신해야만 하는 로봇 같은 나이란 말인가? 

 

어떤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것도 아니고,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VIP카드도 아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보호받으며 살 수 있는 안전망도 아니다. 열네 살은 그저 열네 살일 뿐이다.  

 

365×14=5,110. 

'겨우 오천백십 일?' 

연주는 휴대전화 뚜껑을 화닥 덮어버린다. 

<미래에 농업은 직업으로 존재할까?>라는 사회숙제를 하다 영 골치가 아파 자신이 살아 온 날수를 계산해보았다. 세상은 날마다 황당뉴스, 긴급뉴스, 경악뉴스, 연예뉴스등을 들려준다. 날마다 누가 누구랑 결혼하고 예쁜 여자 연예인이나, 노래 잘하고 춤 잘추는 가수는 없을 것 같이 나오는데 하루만 지나면 또 누군가 등장한다.  

학원버스의 소음도랑 얘들 실력은 반비례한다고 했던가. 운전기사아저씨 운전을 하다가 내밷는 말.  

-어른들도 살기 힘들거든! 

-연주야, 아빠도 살기 힘들거든! 

-나도 살기 힘들거든! 

2달전에 이혼한 엄마 아빠때문에 연주의 친구 민지는 할머니와 엄마와 같이 살고 있다. 

속옷 사이즈가 서로 달라지는 때이며, 학교 성적도 무척이나 고심이 많을 때이다. 무척이나 궁금한 세상의 모든것들이 모두 동경속의 세상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옆집 선배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쿵! 내려 앉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옆집선배인 지섭선배를 바라보다보면 심장소리가 쿵쾅~거리게도 되는 때다.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도대체 어떠한 모습인지 그 감정의 형태도 모르겠지만 아뭏든 그 선배가 멀리 다른곳으로 간다고 해서 이별 선물을 가지고 민지와 함께 집으로 방문해서 지섭선배를 바라보았을 때에 눈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뚝~ 떨어지기도 하는 그런. 그런 나이가 열네 살이다. 어느 순간 그 선배에게서 이별 선물로 선택해서 받은 알람시계소리가 째깍째깍째깍 너무나 크게 들리는 때이기도 하다.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잠자고 일어나고, 

땀 흘리고 목쵹하고, 

TV 보고 끄고, 

전화하고 전화받고, 

걸어가고 주저앉고, 

학교 가고 집에 가고, 

학원가고 몰래 빠지고, 

시험 보고 성적표 받고, 

이런 삶의 조각조각들, 뉴스에도 나오지 않는 너무도 사소한 하루하루의 자취들 이런 것들이 뒤섞여 어느 날, 순간 화려한 미래의 그림을 보는 착각에 빠져 희망이란 걸 갖고 사는 게 아닐까, 하고 연주는 생각하게 된다. 째깍째깍 시계소리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성장소설을 아이들에게 내놓으면서 노경실작가는 말한다. 

읽어라. 

느껴라. 

생각하라. 

울고 웃게 되리라! 

그리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게 되리라. 

인생은 한 편의 영화다. 자, 그대는 그대의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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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 - 조선 선비들이 찾은 우리나라 산 이야기
나종면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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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찾은 우리나라의 산을 오르는 과거의 흔적들을 만나면서 산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조선시대의 선비들과 요즘의 현대인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산에 올라가는 것이라 표현하지 않고, 산에 들어간다고 하여  입산이라고 옛 사람들은 표현했다. 오늘날의 우리의 입산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거나 허약해진 몸을 단련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반면에, 조선시대는 산은 영험한 곳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곳과는 별개로 생각을 했었다. 땅에 기운이 이싿고 믿었는데, 땅의 기운이 모여 있는 산에는 영(靈)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심신이 허약한 사람은 도깨비나 귀신에 홀리므로 입산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특별히'선택된 사람, 곧 무당이든 도사든 승려든 간에 현실세계를 버린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입산이라는 행위는 영의 응결처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산은 현실세계(속세)의 연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옛사람들의 입산은 산의 입구에서부터 이루어졌다. 평지와 산이 만나는 접점, 즉산의 입구를 초도(超道)라 부르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옛사람들은 산이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산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남긴 것중에 이옥의 <중흥유기>를 보자면

산행 날짜, 함께 간 사람, 행장, 약속, 성곽, 주정, 관아 건물, 사찰, 불상, 승례, 천석, 꽃과 나무, 숙식, 술, 총론으로 기록으로 남기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옛사람들의 명산 유람을 보면서 각 산마다 산에 들어가서 명산을 유람하는 모양새나 내용들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산에 들어가서 옛사람들은 시짓기를 많이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인왕산편을 보자면 박지원(1737~1805)도 필운대 저녁의 꽃구경을 "저녁 해가 갑자기 넋을 거두자, 위는 환한데 아래는 그윽하구나, 꽃 아래에는 천 명 만 명 모를 사람들, 옷매무새 수염모양 제날대롤세"라고 포학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에서 봄꽃 구경하기가 가장 좋은 곳이 필운대였다고 한다.

 

관악산은 풍화작용으로 인한 험한 암벽과 기묘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많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연주대이며, 산정의 영주대는 세조가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원효 의상등의 고승들이 일막. 이막. 삼막 등의 암자를 짓고 이 산에서 수도하엿다고 하며, 이 세 암자 중 삼막민이 현재 삼막사로 남아있다.번암은 관악산이 경기 지방의 신령한 산이라고 지적했다 . 그리고 그 산은 일찍부터 선현들이 노닐던 곳으로, 한번 그곳에 올라가서 마음과 눈을 깨우고, 선현을 사모하여 우러르는 마음도 기르고자 했기 때문에 항상 관악산에 들어가고자 하였다.<유관악산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명산들마다 옛사람들이 산에 들어가서 유람하였던 것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을 대하면서 지금까지도 남이있는 그 산의 내력이나 형세들에서 비슷한 산의 모양새를 추측해보기도 한다. 전통시대에는 은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세상에 뜻이 없었던 그들은 산이나 숲, 물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그들의 뜻을 담고 살았다 수양의 방편으로 이러한 도인을 행하였다. 그들이 숨어 사는 것은 속세의 잡다한 욕망을 버리고 자연에 동화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건강한 삶을 누리고자 한 것으로 흔히 말하는 '불로장생'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산은 속세의 대척점으로 형성된 청정한 지역이나 극락정토가 아니며, 농촌생활의 연장이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은 사람이 산을 아끼고 지켜야만 우리가 산으로부터 얻고자 하는것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가 있게 되리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시간이 되기도 했으며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가운데 순간의 즐거움이 아닌 인생의 참뜻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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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높이 솟은 간절한 바람 탑 전통문화 즐기기 4
이기범 지음, 김도연 그림, 박경식 감수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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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전까지는 도대체가 탑이 이렇게까지나 많았는지 몰랐다.
하물며, 탑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 더더욱 그럴수밖에...
등산을 하다가도 작은 돌무더기들을 올려놓고 나도 그 위에 살포시 돌멩이를 정성스레 놓았던 것을 생각하며 나는 그러한 행동들을 하면서 도대체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얼마전 봉은사에서 울 꼬맹이가 그 돌무더기 위에 정성스레 돌멩이를 올려놓으며 한참을 기도하듯이 하였던 터라 그 과정이 끝난것을 보고 아이에게 물어봤다.
아이는 "우리나라가 더 강하게 해달라고,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잘살게 하고, 대통령 할아버지에게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어요"라고 대답을 한다.
순간 헉...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어린 꼬맹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지도 못한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도 고결한 기도를 돌탑을 올리면서 했는지 놀랍기만 했다.
그렇게 아이의 탑에 대한 질문은 시작되었었다. 
그리고 하늘 높이 솟은 간절한 바람 탑을 그렇게 접하게 되었고...
아이의 날카롭고 어려운 질문들에 다소나마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도 했다.








일주문을 지나 절에 들어서면 오래된 탑이 우리를 어김없이 반겨준다.
하늘높이 솟은 그 탑에는 부처의 마음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서 불교가 전파되면서 그와 더불어 탑의 문화도 자연스럽게 들어왔다고 한다. 삼국중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고구려이며, 그다음이 백제였으며, 그 다음 마지막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신라였다고 이미 국사시간에 배웠었지만 이 책에서는 그보다 더 자세한 탑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다비와 사리를 모셔두고 나라의 태평성대를 담아두기 위해 탑을 세우고 그 탑에 다비와 사리를 모셔두었던 일이 우리네 조상들의 탑돌이를 하면서 그 과정에 소원을 빌던 모습들과 겹쳐진다. 영험한 다비와 사리를 통하여서 그들이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시대의 왕을 위하여 작게는 가정의 건강과 평안을 위하여 탑을 돌고 또 돌고 그러면서 소원을 빌었으니 지금의 초파일에 행해지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하긴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나라였으니 우리네 깊은 곳에는 불교와 친밀한 그 무언가가 민간사상으로까지 박혀있기도 하지 않았던가.

삼국통일의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지나 지금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아있는 탑을 살피면서 탑과 함께 역사의 사건들이 전설처럼 신화처럼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처럼 귓가를 맴돈다. 





이 책에서 얻은 결실중에 가장 큰 것은 탑을 어느부분에서부터 세고 그 탑이 몇층탑이라고 하는지 확실히 알고 아이들에게도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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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평화주의자 20인 미네르바의 올빼미 35
켄벨러 헤더체이스 지음 / 푸른나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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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평화주의자 20인은 어떤 인물들을 소개할 것이가에서부터 많은 고심을 했다고 한다. 수백 명의 평화주의자들을 검토하고, 1250명이 넘는 후보자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며 따졌던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1. 비폭력을 위해 철저히 몸을 바쳤는가?

2. 1800년 이후에 태어났는가?(독자들이 보다 친밀감을 느낄 수 있도록 비교적 최근의 인물들을 골랐다.)

3. 그 인물에 관한 자료가 한 꼭지 분량을 채울 수 있을 만큼 충분한가?

4. 인물의 일생에 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참고할 수 잇는 자서전이나 영화, 혹은 단체가 있는가?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면서 평화를 향한 길이 다섯 갈래로 정리되었고 '비폭력의 선택, 평화의 삶, 다양성 존중, 모든 생명 존중, 지구 보호'라고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비폭력 선택으로 자리매김했던 이들중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름부터 생소하다. 그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후 고향 콩코드로 돌아와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담 불과 2주 만에 그 일을 때려치웟다. 학교로부터 학생들에게 매질을 해야한다는 지시에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노예페지론자들의 회의장소로 선뜻 집을 회의 장소로 내놓기도 했는데 그의 사고는 그의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했다. 그는 "나는 내 운명을 속속들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의 노예제도에 대한 비폭력의 방법으로 주민세를 납부하지 않아서 읍내로 볼일을 보러가는 도중에 체포되어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엇으며, 그러한 비폭력의 생활들 속에서 마흔넷의 나이로어머니와 누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히아신스 꽃향기르를 맡으며 세상을 떠나게 된다.

 

  비폭력의 상징이 되는 마하트마 간디는 동갑내기로 열세살에 결혼한 카스투르마간지라는 소녀가 병중에 있었을 때는 영국의 약을 쓸 수가 없다하여 고통속에 부인을 저 세상으로 보냈던 오류도 범하기도 하였지만, 일생을 비폭력 평화주의를 외치며 살아온 덕분에 250년에 걸친 영국의 지배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100만 명이 넘게 장례 행렬에 참석했다.

 

  평화주의자들의 삶과 업적에 대해 나열하면서 그 뒤로는 그들이 살아온 세월 동안의 어록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어록들을 보면서 위대한 평화주의자들의 성품과 그들이 어떠한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었는지에 대해 작게나마 알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소스카르 아리아스의 '우리'라는 말은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 것에 대하여 그의 생각의 폭이 어느만큼 넓고 깊었는지에 대해 가늠해보게 하기도 하며, 종파를 초월한 화합을 주장했던 브루노 후사르님도 많은 평화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육신은 보잘것 없는 판자집에서 기거를 하면서 그의 큰 이상에 더 큰 힘과 에너지를 쏟아냈다는 공통점을 찾게 된다.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인종 차별에 대해 데스몬드 투투는 '모두가 하나다'라는 믿음에서 화합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남아프리카에서 그의 아버지는 학교 교사였던 비교적 평안한 가정에서 자란 그가 왜 굳이 험난한 비폭력의 길에서 외쳤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자면 많은 비폭력주의자들의 부모님의 개방적인 자유와 환경에 의한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큰 범위에서 위대한 평화주의자들 20인의 후속편도 기대되지만, 그들의 삶을 통하여서 우리가 지금 순간에 강해지기 위해서 눈에 보이고 효과가 탁월한 폭력적인 그런한 사상에 더 가치를 두는 것에 경계를 해야 함이나 그러한 비폭력가치관이 우리의 인생에서 지구상의 평화를 위해서도 크나 큰 힘과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때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될것이라는 기대를 함께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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