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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 - 조선 선비들이 찾은 우리나라 산 이야기
나종면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9월
평점 :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찾은 우리나라의 산을 오르는 과거의 흔적들을 만나면서 산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조선시대의 선비들과 요즘의 현대인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산에 올라가는 것이라 표현하지 않고, 산에 들어간다고 하여 입산이라고 옛 사람들은 표현했다. 오늘날의 우리의 입산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거나 허약해진 몸을 단련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반면에, 조선시대는 산은 영험한 곳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곳과는 별개로 생각을 했었다. 땅에 기운이 이싿고 믿었는데, 땅의 기운이 모여 있는 산에는 영(靈)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심신이 허약한 사람은 도깨비나 귀신에 홀리므로 입산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특별히'선택된 사람, 곧 무당이든 도사든 승려든 간에 현실세계를 버린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입산이라는 행위는 영의 응결처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산은 현실세계(속세)의 연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옛사람들의 입산은 산의 입구에서부터 이루어졌다. 평지와 산이 만나는 접점, 즉산의 입구를 초도(超道)라 부르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옛사람들은 산이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산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남긴 것중에 이옥의 <중흥유기>를 보자면
산행 날짜, 함께 간 사람, 행장, 약속, 성곽, 주정, 관아 건물, 사찰, 불상, 승례, 천석, 꽃과 나무, 숙식, 술, 총론으로 기록으로 남기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옛사람들의 명산 유람을 보면서 각 산마다 산에 들어가서 명산을 유람하는 모양새나 내용들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산에 들어가서 옛사람들은 시짓기를 많이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인왕산편을 보자면 박지원(1737~1805)도 필운대 저녁의 꽃구경을 "저녁 해가 갑자기 넋을 거두자, 위는 환한데 아래는 그윽하구나, 꽃 아래에는 천 명 만 명 모를 사람들, 옷매무새 수염모양 제날대롤세"라고 포학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에서 봄꽃 구경하기가 가장 좋은 곳이 필운대였다고 한다.
관악산은 풍화작용으로 인한 험한 암벽과 기묘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많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연주대이며, 산정의 영주대는 세조가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원효 의상등의 고승들이 일막. 이막. 삼막 등의 암자를 짓고 이 산에서 수도하엿다고 하며, 이 세 암자 중 삼막민이 현재 삼막사로 남아있다.번암은 관악산이 경기 지방의 신령한 산이라고 지적했다 . 그리고 그 산은 일찍부터 선현들이 노닐던 곳으로, 한번 그곳에 올라가서 마음과 눈을 깨우고, 선현을 사모하여 우러르는 마음도 기르고자 했기 때문에 항상 관악산에 들어가고자 하였다.<유관악산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명산들마다 옛사람들이 산에 들어가서 유람하였던 것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을 대하면서 지금까지도 남이있는 그 산의 내력이나 형세들에서 비슷한 산의 모양새를 추측해보기도 한다. 전통시대에는 은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세상에 뜻이 없었던 그들은 산이나 숲, 물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그들의 뜻을 담고 살았다 수양의 방편으로 이러한 도인을 행하였다. 그들이 숨어 사는 것은 속세의 잡다한 욕망을 버리고 자연에 동화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건강한 삶을 누리고자 한 것으로 흔히 말하는 '불로장생'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산은 속세의 대척점으로 형성된 청정한 지역이나 극락정토가 아니며, 농촌생활의 연장이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은 사람이 산을 아끼고 지켜야만 우리가 산으로부터 얻고자 하는것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가 있게 되리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시간이 되기도 했으며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가운데 순간의 즐거움이 아닌 인생의 참뜻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