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저와 읍루 - 숨겨진 우리 역사 속의 북방민족 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0
강인욱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 옥저와 읍루

 : 강인욱

 : 동북아 역사재단

 : 2021/06/20 - 2021/06/27


올해 읽은 책중 가장 흥미있게 읽었다.

한국의 고대사라고 하면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 메인이고 여기에 가야가 좀 더해지는게 일반적이다.

3한에 있던 목지국이나 동해안에 있던 옥저, 동예, 북쪽에 있는 우리민족이라고 얘기하기에도 애매한 읍루에 대한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옥저와 읍루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문헌과 유물을 통해 이야기한 책은 처음이다. 

대부분 모르고 있겠지만 우리의 온돌문화는 옥저에서 개발되었다.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고구려에 시달리다 고구려에 복속된 작은 나라라고만 생각했는데, 옥저는 북옥저와 동옥저로 구분될 만큼 상당한 규모에서 정착생활을 했고, 농사와 교역등 나름 괜찮은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왕이 없을 뿐 좋은 사회구조를 가진 곳이다.

기록이 없다고 해서 후진 문화는 아니란 걸 깨닫는다.

옥저는 한반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 읍루를?

읍루야 말로 나에겐 생소한 민족이다. 숙신, 물길, 말갈로 불리는 나라라고 알고는 있지만 한 번도 우리 민족의 역사와 연관지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고구려에도 읍루 민족이 있었고, 발해는 백성들 중 많은 비율이 말갈족이었고, 심지어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여진족이 우리나라에 기여한 모습을 보면 우리 민족의 역사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좋은 연구가이자 저자를 통해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

책을 읽다보니 어릴적 꿈이 생각이 나서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고고학자 되고 싶은 생각 없니?"

"아빠.. 저에게 왜 이러세요.."

음... 역시 아이와 아빠의 꿈은 다르구나.. 




4% 옥저와 읍루에 관한 자료는 거의 전적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근거한다. 그런데 원문에서도 옥저는 710자, 읍루는 270자에 불과하다

7% 우리 역사에서 북방민족의 역사라 함은 단순히 한반도의 북쪽과 만주라는 지리적 위치를 말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지리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화를 의미한다

8% 북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고고학적인 자료에 기반을 둔 생활방식(고고학 용어로는 생계경제)과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이들은 크게 예맥계, 흉노계, 말갈계 등으로 나뉜다

9% 수렵과 채집에 주로 종사하던 읍루계는 숙신, 물길, 말갈, 여진으로 이어졌고 청나라 때의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연해주와 송화강 일대에 사는 나나이, 3 니브흐, 울치 등은 바로 이 읍루계 주민들의 후예이다

11% 고고학 자료와 문헌 기록이 서로 다른 것은 어느 한쪽의 연구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다. 고고학과 역사학은 서로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14% 기원전 4세기경부터 잡곡농사를 짓고 집에 온돌을 놓았던 옥저계의 문화인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가 등장하면서 환동해 지역에도 본격적인 마을이 등장하게 되었다

16% 대체로 학자들은 이름만 바뀔 뿐 숙신에 대한 내용은 대체로 읍루와 유사하기 때문에 숙신과 읍루를 같은 사람들로 간주한다

18% 이후 아무르강 유역에서 읍루에 해당하는 플체 유적이 발견되었고, 1980년대가 되어서야 챠피고우 문화는 연해주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 북옥저인들의 문화로 인정되었다

22% 옥저는 이제 북방 지역의 잊힌 역사에서 한러 공동연구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25% 옥저인들은 장방형으로 구덩이를 깊게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얹은 초가집에 살았다

27% 이런 수목장(나무 위에 관을 두는 풍습)은 시간이 지나면 거의 남지 않는다. 한반도와 같은 세형동검을 썼던 족장이나 샤먼들을 제외한 일반 사람들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 것도 이런 무덤을 만드는 전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28% 기후의 한랭화라는 위기는 옥저인들에게는 큰 도전이었지만, 그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사회를 더욱 발달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적응 과정과 사회 발전은 중국 사서에 옥저 또는 북옥저라는 이름을 기록하게 했다

29% 온돌 시설은 옥저에서 처음 시작되어 철기 문화의 전파와 함께 기원전 3세기부터 한반도 전역에 퍼진 것으로 보인다

30% 온돌은 옥저계와 읍루계라는 이 지역의 커다란 두 줄기 주민집단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34% 옥저계 문화의 사람들은 추위라는 단점이 있었지만 대신에 농업 생산력이 높은 이 지역이 한랜화되는 시점에 농경지를 개척했고, 그들의 전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36% 봉림 문화와 말갈 문화인들은 서로 경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기후가 바뀌면서 이 지역의 문화도 서로 교대하듯이 바뀐 것이었다

37% 옥저가 고구려의 속민으로만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구려 이전에 위만조선, 현도군, 낙랑군 등이 시대를 달리하여 옥저를 복속하려 했다. 그리고 그전에는 극동 지역에서 중원과 단독으로 교역할 정도로 큰 세력이었음이 바로 이 유물로 증명되었다

40% 위만조선이 활동한 시기인 기원전 2세기 전반에 이미 옥저는 무역의 주도권을 위만조선에게 빼앗겼다는 뜻이다

42% 옥저인들이 세형동검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서 직접 만들어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즈웨스토프카에서 발견된 세형동검은 주석성문이 극히 적고 납 성분이 많아서 한반도의 청동기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43% 옥저인들은 역사 기록에 일관되게 다른 세력들에 복속된 것으로 나온다. 수백 년 동안 복속되었다면 옥저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옥저는 수백 년 이상 그 실체가 계속 유지되었다. 대외적인 정치판도와는 별도로 옥저인들의 교역네트워크가 생존 비결이었다

45%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관구검의 침략으로 8천여 인이 희생되었으며 옥저의 읍락이 모두 파괴되었다고 나온다

52% 벌판은 러시아 말로 플레인데 서쪽 러시아 사람들은 플체(작은 벌판 정도의 의미)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렇게 읍루 유적에 플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53% 플체인들은 옥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퍼져 살았다

58% 연해주의 철기는 제철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원시적인 제련시설에서 그들만의 노하우로 도끼의 날만을 강철화키셨다는 것이다

63% 숙신이라는 이름은 읍루가 이후 말갈과 여진으로 나아가는 국가의 발달 과정에서 잠깐 일어난 사건이었다

64% 이렇게 고고학적 유물과 명백히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현대 중국의 가장 동북쪽인 삼강평원의 역사를 중원과 연결시키기 위해서이다

68% 고고학 자료는 하루가 다르게 급증한다. 그러니 지금은 부합하는 것 같지만 새로운 자료가 더 많이 나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70% 구한말부터 연해주에 고려인이 정착한 마을의 근처에는 거의 빠짐없이 옥저 유적이 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입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옥저, 발해, 그리고 고려인에 이르기까지 같은 지역에 살게 되는 것이다

74% 옥저의 무덤으로 묘사된 것은 오늘날 시베리아 원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수목장을 말한다

80% 중국인들은 주변의 이방민족들을 기록할 때에는 이 받침 토기의 존재 유무를 반드시 기록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플체 문화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82% 퉁구스-고아시아족이라는 애매한 개념보다는 예맥계(옥저)와 읍루계로 나누어서 극동 환동해 지역의 역사를 보는 것이 오히려 이해하기 편하고, 우리 역사의 틀에서 바라보기도 좋다

84% 환동해 지역이라고 하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공존했다는 뜻이다

86% 정선 아우라지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에서는 한반도 최초의 청동기가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시베리아의 청동기 기술이 전래된 것이다

88% 환동해의 옥저와 읍루가 우리 역사에서 소외된 이유는 우리조차 부지불식간에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 젖어 있기 대문이다

88% 우리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옥저와 읍루뿐만이 아니다. 북방의 추운 지역에서 부여와 같은 거대한 성터와 집단을 이루었던 두막루, 함경남도의 동예, 700년 넘게 나라를 이루었지만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신비의 나라 부여, 그리고 강원도에 존재했던 예맥과 말갈(연해주와 송화강 유역의 예맥 및 말갈과의 관계는 정확하지 않은 도 다른 집단이다) 등 너무나 많은 북방민족의 역사가 소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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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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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이게 뭐라고

 : 장강명

 : arte

 : 2021/06/16 - 2021/06/25


소설인줄 알았는데 에세이였다.

더구나 제목은 팟캐스트에서 따온 것이었다.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쓴 책인줄 몰랐다.

그저 제목과 작가를 보고, 현실에 대한 소설책이 새로 나온 줄 알았다.

TV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팟캐스트도 했었구나.

독서 팟캐스트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진행자의 에세이를 통해 살짝 그 느낌을 맛본 것 같다.

그래도 난 장강명을 통해서는 소설을 읽고 싶다. 



p11 신작을 내면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언론이 관심 가져주고 띄워주기를 바란다

p21 가끔 "책을 언제 어디서 읽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나에게는 그게 "물을 언제 어디서 마시느냐"는 질문처럼 들린다. 그냥 아무 데서나 수시로 읽는다

p28 인류를 사랑하는 건 쉽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건 어렵다는 명언이 있다. 내 기억에는 버트런드 러셀이 한 말 아니면 피너츠에서 나온 스누피의 대사다

p34 이제는 한국의 출판업이 사실상 '셀럽 비즈니스'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셀리브리티가 쓴 책이 잘 팔린다. 아니, 셀리브리티가 쓴 책만 잘 팔린다.

p48 글은 기록으로 남는다. 그래서 쓰는 인간은 말하는 인간보다 일관성을 중시한다. 말은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 그래서 말하는 인간은 쓰는 인간보다 맥락과 교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p99 어떤 진화심리학자들은 우리에게 뒷담화를 하는 본능이 있으며, 언어가 바로 그 본능으로 인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p103 나로 말하자면 단행본을 그렇게 읽지 않는다. 따분한 대목을 건성으로 읽기는 한다. 그래도 책장이 정 넘어가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고 접는다. 세상에는 읽을 가치가 없는 책도 분명히 있고,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책도 분명히 있다. 읽을 가치가 있지만 너무 지루한 책도 있다.

p128 알코올은 이 뇌의 용량을 확 줄인다. 술을 마시면 어려운 사고 활동은 아예 할 수 없게 되고(예컨대 공부) 평소에는 무리 없이 하던 작업도 못하게 된다(예컨대 운전)

p129 스콧 피츠제럴드나 한때의 레이먼드 카버, 한때의 스티븐 킹처럼 알코올에 전 상태로도 멋진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카버와 킹은 술을 끊은 다음에 글을 더 잘 썼다.

p136 구글 스프레드시트에서는 다뤄야 할 책에 대한 비판을 적어놓고 막상 저자 앞에서는 쓴소리를 삼가는 내 모습을 보고 팀원들은 "이중인격자"라며 놀렸다.

p152 아이스란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책을 선물하는 전통이 있어서, 그 시즌마다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를 '욜라보카폴로드'라고 부른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책 홍수'라는 뜻이다.

p167 암흑의 핵심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도, 서 있던 자리보다 더 밝은 곳이 나온다. 그러기에 결말은 자연스럽게 어떤 희망과 구원을 제시하는 듯 보이게 된다

p180 영화정보와 감상은 인터넷 게시판, 블로그, 유투브에 차고 넘치는데 거기서 나는 역설적으로 비평의 죽음을 확인하곤 한다. 비평따위 없어도 우리는 이렇게 재미있게 잘 살 수 있다니까 하는 침묵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p191 외국에 나갈 때마다 공항 서점에서 소설 코너만큼이나 넓은 논픽션 코너를 보며 혼자 부러워한다. 한국에서는 그 자리를 에세이가 차지하고 있다. 한국처럼 논픽션 소재가 넘쳐 나는 나라도 흔치 않을 텐데

p191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시작한 일이었는데, 애정과 보람을 느낄수록 그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p212 웹소설 시장은 남성 독자와 여성 독자가 읽는 소설이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처럼 둘로 나뉘어져있다

p226 문예지라는 플랫폼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느끼는 일반 독자와 한국문학간의 체감 거리가 세련된 디자인과 오디오북 같은 신병기로 간신히 좁혀진다고 본다

p240 덴비는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다시 또 독자와 싸우는, 길들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라고 평했다

p252 1850년 러시아에서는 아예 글을 읽지 못하는 완전 문맹비율이 90퍼센트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가 푸시킨,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러니까 책은 끝났다. 문학은 죽었다고 엄살떨지 말라는 게 사사키 씨의 주장이다

p257 다소 섬뜩한 사실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가 지네브라 킹과 외모가 그렇게 닮았다고 한다

p262 누가를 따진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파시즘과 자본주의에 맞서 싸운 체제라고 믿었다. 어떻게를 살핀 오웰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공통점을 봤다

p270 보는(듣는) 사람을 읽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독서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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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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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김범석

 : 흐름출판

 : 2021/06/07 - 2021/06/17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애 실력은 생각도 하지 않고 나를 의사로 만들려고 했다. 

의대를 가라는 거다. 

의사가 되면 평생 환자만 보며 살아야한다. 이 생각을 하니 너무 끔찍했다.

수학을 좋아했지만 문과를 가게 된 이유중의 하나였다.

이 책의 저자는 의사선생님이다. 더군다나 종양내과 의사 선생님이다. 

맡는 환자들은 주로 암환자, 특히 말기 암환자가 많다. 

말기 암환자들을 살려 기적의 의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만 상당수 환자들은 사망한다.

책의 내용도 대부분 환자들의 사망이야기다. 

2개월 시한부를 받고 결혼청첩장을 가져온 신부의 이야기도 있고(당연히 결혼후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죽어가는 가운데 자기를 찾아온 동생에게 내 돈 갚으라는 유언을 남긴 남자의 이야기도 나온다. 

미국에서는 항암치료를 마치고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 평균 6개월인데 우리나라는 평균 1개월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사망 2주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존엄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무엇일까?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모습을 나도 보일 수 있을까?

수많은 사망 데이터를 보고 고객들의 니즈를 파악하며 회사에서 나는 암보험 상품을 만든다. 

책을 읽으면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상품이나 담보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아마 팔리지는 않고 오히려 고객들 화만 일으킬 것 같다. 

죽음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 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2% 암으로 인해 기약된 순간이 환자에게 다가올 때 그것을 조금씩 뒤로 미루는 일, 그것이 나의 일이다

9% 남편분이 너무 열심히 사셔서 그런 거예요. 너무 열심히 산 죄로 죽을 때도 편하게 돌아가시지를 못하네요. 사람이 살아온 천성이라는 게 변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죽기 전에는 한번은 변하기도 하는데... 남편분은 어렵네요

11% 결국 내 돈 2억 갚아라가 환자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된 셈이다

39% 많은 환자를 봐야만 하는 의사에게는 0.1퍼센트의 예외적인 특별한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0.1퍼센트의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44% 핏줄들은 하나같이 나를 괴롭혔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47% 나는 그때 알았다. 죽은 아이의 신을 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사기도 한다는 것을

50% 극단적 장기 생존자. 말 그대로 암 환자임에도 극단적으로 오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컨디션이 좋기 때문에 입원하지 않는다

53% 인생의 마지막 반년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불태운 셈이 되었다. 오래오래는 아니었지만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침표를 찍었으니 그건 그것대로 아름다운 결말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57% 600명 중 한 명과 단 한 사람, 이것이 그가 느낀 의사와 환자 사이의 간극일 것이다

61% 세상에는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나는 눈앞의 환자와 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므로 완벽히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64% 교수가 함께 있는 수업인데도 문제가 될 거라는 인식 자체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눈앞의 동료들과 대화하지 않고 문자로 토론하던 이들이 환자를 앞에 두고 어떤 의사가 될지 생각하니 두려웠다

66% 종양의 크기를 떠나 최대한 증상을 완화하며 시간을 버는, 완화 의료라고 불리는 이 전략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신 표적항암제가 두달의 시간을 벌어들일 때는 열광하지만 완화 의료로 동일한 두 달의 시간을 버는 것에는 놀랍도록 냉담하다

68% 미국 사람들은 보통 사망 6개월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 즉, 그들은 삶을 정리하는 데 적어도 6개월 정도의 시간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에 반해 서울대병원 통계상에서 환자들은 사망 한 달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 삶을 정리하는 데 고작 한 달의 시간을 가지는 셈이다

79% 돌이켜 생각해보면 환자들에게 잘했던 때는 내가 푹 자고 푹 쉬고 스스로 편안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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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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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배한철

 : 매일 경제 신문사

 : 2021/06/07 - 2021/06/19


직업이 기자라는데 이정도로 조예가 깊고 다양한 국보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데 놀랐다.

부럽다. 

우리나라 수많은 유물중에서 나름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국보...

국보를 통해 역사를 바라본다니, 나름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경주의 황남대총에서 나온 금관을 통해 황남대총의 주인공을 유추하는 방법을 보니 유물과 역사가 어떻게 대화하는 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 연구가들에 의해 제멋대로 파헤쳐지고 왜곡되어온 우리 역사와 유물들.. 아직 제자리를 찾기엔 멀었지만 훌륭한 연구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 올바르게 유물과 역사가 해석되기를 기대해본다. 

누군가는 우리나라 전 국토가 순례할만한 유적지라고 하고, 어떤이는 국보를 찾아 순례하는데, 난 이나이 먹도록 아직도 초보수준이니... 

나도 좀 열심히 살자.. 올해의 책 후보다. 



2% 필자에게 문화재를 찾아가 관람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행위이다

5% 여러 달이 걸려야 하는 세심한 작업을 10시간여 만에 후딱 해치우고 말았던 것이다

5%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108종 3,000여 점에 달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유물은 왕과 왕비 신분을 알려주는 지석 두 점이다

9% 이후 1,3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93년 12월, 부여시 능산리 고분군에서 주차장을 건설하던 중 놀라운 유물이 우연히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걸작 국보 중 하나인 백제 금동대향로다

14% 신라가 나뭇가지와 사슴뿔 형상으로 금관을 장식했다면, 가야에서는 풀잎이나 꽃잎 모양으로 금관을 꾸몄다

18% 고려는 한국사의 황금기이자 문화의 절정기였다. 삼국시대 불교가 탑과 불상 등 건출, 조형물 중심으로 발전했다면 고려의 불교는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유행으로 회화가 발달했다

21% 고려청자 특유의 비색은 11세기를 거쳐 12세기 전반에 정점을 맞는다. 광택이 매우 우아하며 가마에서 구을 때 생기는 자기 표면의 미세 균열도 거의 없는 고품질 순청자가 쏟아졌다

31% 인쇄물이 아닌 목판이 온전한 채로 남은 것은 전 세계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이 유일하다. 1251년(고려 고종 380 완성된 이후 800년이라는 오랜 세월 속에서도 손상 없이 보존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38% 국보 제24호 경주 석굴암 석굴은 우리 문화사에서 독보적 금자탑인 동시에 동양 전체의 건축, 조각 예술을 대표하는 불멸의 업적으로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43% 알타이, 시베리아 등에서 나무와 사슴은 성스러운 상징이다. 나무는 하늘로 통하는 길이며 사슴은 하늘로 인도하는 전령사였다

43% 왕은 금관을 부장하는 전통이 채 자리 잡기 전에 사망해 무덤에 금동관을 묻었지만, 왕이 세상을 뜬 뒤 본격적인 금관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의 왕비는 금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황남대총 남분에 묻힌 왕은 바로 첫 번째 마립간, 즉 내물왕이 되는 셈이다

44% 통일신라는 한발 더 나아가 국토 중앙의 수도라는 뜻의 중원경으로 그 명칭을 바꾼다

47% 첨성대 위에 정자 등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문헌은 설씨 세헌편 외에도 다수 발견된다

48% 한 번도 발굴 조사된 바 없는 첨성대 지하와 그 주변을 파보면 첨성대를 둘러싼 수많은 의문점도 풀릴까

49% 봉영기는 가람을 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사택왕후이고 그 해가 639년(무왕 40)이라고 전한다. 639년은 무왕 사망 2년 전이다. 사택씨는 성왕의 사비(부여) 천도를 도운 백제 말기 최고 귀족 가문이다

51% 일제강점기에 수리하면서 타설한 185톤의 시멘트를 제거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탑은 이제 안전해졌겠지만 탑이 갖고 있던 고색의 정취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쉽다

52% 고유섭은 석탑과 불교 조각 등 불교 미술을 연구해 시대별 양식의 변화와 특징을 처음으로 정리했다. 한국 회화사를 학술적으로 집대성했으며,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 이론도 체계화했다

54% 형상과 층수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 제 40호),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 등이 여기에 속한다

56% 의상의 사당인 조사당은 1377년 재건됐고,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는 무량수전의 해체수리 공사가 진행됐다. 따라서 현재 무량수전은 고려 말 우왕 때의 건물이다

58% 불국사는 전 국민의 수학여행지이자, 경주를 넘어 우리나라 제일의 명소이다. 토함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불국사는 "불국정토를 속세에 건설하겠다"는 통일신라인들의 야심찬 꿈이 드러난 절이다. 국내 사찰 중 치밀한 구성과 미적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절이기도 하다

60% 83호는 남산 어귀의 사찰 또는 무덤에서 수습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72% 종합적으로 현재 정족산본 1,181책(완질본),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흩어져 있는 것을 묶은 것) 21책 등 총 2,124책이 남아있다

82% 그는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니, 어찌 늙은 할멈이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인을 세워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논평했다

83% 돌 다루는 기술이 앞섰던 백제는 전탑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목탑에서 바로 석탑으로 옮겨갔다. 목탑 형식으로 쌓은 돌탑인 익사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 11호)이 그 증거로 언급된다

91% 풍속도 화첩은 단오풍정, 월하정인, 주유청강, 청금상련, 상춘야홍 등 신윤복의 명작이 총집결된 화첩이다

93% 안견이 북종화(기술적 연습과 수련을 중시)를 수용해 높은 경지의 이상적 산수화를 구현했다면, 정선은 남종화(작가의 교양과 정신을 강조)를 받아들여 독보적인 진경산수화를 창조했다

95% 정선은 18세기 후반 이후에 행세하는 거의 모든 집안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그의 그림은 한양의 좋은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조선 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화가였던 것이다

96% 에밀레종 전설은 근대 이후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서야 등장하며 일제강점기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 유림의 세력이 강했던 경주에서 불교를 폄훼하고자 의도적으로 가공됐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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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부터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정기문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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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 정기문

 : 책과함께

 : 2021/06/07 - 2021/06/16


청소년 이상이라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서양고대사 입문서.

문체도 어렵지 않고 내용도 관심가질 수 있는 내용이라 쉽게 읽어나갈 수 있다. 

대신 최근 고고학에서 연구되고 발굴된 성과들은 아직 실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헝가리쪽에서 나왔다는 다하우 문명이라든가 스키타이 지역의 유물들에 대한 최근 성과는 없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읽었던 세계사의 내용과 잘 align되어 있어서 편안하게 읽었다.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문명의 원류라고 하는데 사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미케네 문명이 원류 아닌가?

서양 문명이 동방에서 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서양인들의 잘못된 우월의식이 그리스 로마 문명을 과도하게 띄운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은 확실히 본받을 게 많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모습이 많이 오염되긴 했지만 이런 책을 통해서 잘 보정될 수 있다. 

입문서로 더할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p8 282개 조항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사람들의 신분과 경제 형편을 고려하여 규정을 만들고, 고아나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개념이 뚜렷하게 관찰된다

p19 농사짓지 않는 사람들이 도시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농사짓는 사람들이 그들을 먹여 살렸음을 의미한다. 그러려면 농업 생산성이 높아야 했다. 따라서 도시가 건설된 곳은 농업 생산성이 높아서 잉여가 풍부한 곳이었다

p21 메소포타미아인의 삶은 항상 불안했다. 자연재해와 전쟁에 시달리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현세의 삶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결과 메소포타미아인은 내세를 중요시하지 않는 현세 중심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p27 나중에 세밀한 조사를 해보니 우르 지역의 해안가 전체에서 이런 점토층이 발견되었다. 우르의 해안가 넓은 땅에서 소금기를 포함한 점토층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대홍수가 해일이었음을 의미한다

p35 바벨탑은 바빌로니아인이 세운 거대한 건축물로, 바빌로니아 종교 생활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성경은 거대한 탑을 쌓은 것을 왜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을까? 바벨탑이 다신교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p41 사르곤의 정복 사업으로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통일제국이 건설되었다. 사르곤의 사후에 아카드 제국은 더욱 넓어졌다

p48 상위 지도자들만 철제 무기를 사용했던 히타이트인과 달리, 철제 무기 제작법을 개량하여 모든 군인을 철제 무기로 무장시켰다. 따라서 철제 무기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것은 아시리아였다. 그리고 앗수르나시르팔2세는 말의 품종을 개량하고,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도록 병사를 훈련시켰다. 그는 훈련된 기병을 기병대로 조직해 역사상 최초로 전투에 투입했다.

p51 기원전 612년 메디아 왕국과 신바빌로니아 동맹군이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했다. 아시리아의 전 국토가 철저히 약탈당했고, 아시리아인은 모두 노예가 되거나 처형당했다. 약탈과 보복이 어찌나 철저했던지, 아시리아가 그 후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찾아내기 불가능할 정도였다.

p56 기원전 1세기에는 대롱처럼 불어서 유리잔을 만드는 기술도 개발했다. 흔히 로마가 만든 유리가 비단길을 통해 중국은 물론 한반도까지 전해졌다고 하는데, 로마 시대 유리 생산은 페니키아인이 주도했다

p61 구약성경에서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관찰되는데, 이시기 성경을 저술한 유대 지식인들이 바빌론에서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p69 페르시아가 이렇게 여러 나라의 문화를 기꺼이 수용하는 것을 보고 헤로도토스는 "어떤 나라도 페르시아만큼 외국 관습을 기꺼이 채택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p76 그는 타원형의 틀인 카르투슈 안에 파라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믿고, 이름들을 수없이 비교하면서 이집트 문자가 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표음문자임을 깨달았다.

p78 나일강의 홍수가 시작되는 7월 중순부터 홍수가 끝나는 11월 중순까지는 충적평야 전체가 물에 잠겼다. 이집트인은 이 시기를 아케트, 즉 '범람의 계절'이라고 불렀다.

p86 그 스핑크스는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고 난 후 남은 바위산을 다듬어 만든 것이다

p86 고대 이집트인은 약 120기의 오벨리스크를 만들었지만, 현재 27기만이 남아있다. 이집트를 침략했던 외국인들이 이 건축물에 매료되어 많이 약탈해 갔다. 로마에 13기가 있으며, 파리, 런던, 뉴욕, 이스탄불에 각각 1기가 있다.

p88 그들은 투탕카문의 무덤을 거의 원형 그대로 발견했다. 무덤이 얼마나 잘 보존되었던지, 죽은 왕의 관(세 번째 관)) 위에는 3200년의 세월을 이겨낸 수레국화 한다발, 나뭇잎, 과일이 얹혀 있었다

p99 기원전 2649년경 제3왕조 이후 500여 년을 고왕국 시대라고 한다. 제3왕조의 대표적인 왕인 조세르가 거대한 피라미드를 최초로 건설했다

p101 중왕국 시기에 거대한 피라미드는 건축되지 않았다. 대신 농경에 필수적인 수로와 관개 시설 등을 개량하는 공공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p103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이집트의 이미지는 대부분 신왕국 시대에 만들어졌다. 고왕국과 중왕국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이 거의 파괴된 반면, 신왕국의 유물은 많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p109 람세스 2세는 전투에 패배했지만, 이집트로 후퇴한 후 자신이 승리했다는 내용을 담은 비문을 만들어 전국 곳곳에 게시했다. 당시에는 언론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나라 밖에서 왕이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아무도 람세스 2세의 사기 행각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p115 그녀가 냉철하고 훌륭한 군주였는데도, 이렇듯 나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녀가 패배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야먕이 큰 여자였다. 그녀의 이미지에서 간과되는 부분은 그녀가 이집트의 통치자였으며, 이집트는 그녀가 죽기 전까지 군사적으로 약했지만 지중해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다.

p122 그리스인이 크레타인에게 공물을 바쳤고, 테세우스가 그것을 중단시켰다는 신화는 미노스인이 기원전 1400년까지 그리스 지역을 지배했음을 의미한다

p124 고대 근동의 예술품과는 달리 미노스의 예술가들은 살육과 약탈의 장면이 아니라 꽃이 활짝 핀 풍경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운동 선수의 아슬아슬한 묘기나 축제의 모습 등 자유롭고 평화로운 정경을 그렸다.

p131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면 해외로 진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인은 기원전 8세기 후엽부터 멀리 남프랑스와 북에스파냐까지 진출했다.

p132 그리스 일대가 혼란에 빠지면서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100년경 멸망했다.

p151 이오니아학파가 최초로 인간의 이성을 이용해서 자연의 구성과 작동 원리를 설명해보려고 시도했다. 이 점에서 이오니아학파는 최초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이었다

p160 플라톤이 엘레이학파나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전통을 계승했다

p174 연극 공연이 형식을 갖춰가던 기원전 5세기에 디오니소스 축제는 아테네의 중요한 축제로 해마다 3월 말에 열렸다

p180 연극은 실로 그리스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신, 사회와 개인에 대한 그들의 고민이 그리스 연극에 농축되어 있다

p182 그리스인의 이런 사유는 자기중심으로 다른 문명을 재단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선구라고 볼 수 있다

p190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기원전 594년 귀족과 평민은 솔론을 조정자로서 아르콘에 임명하는 데 동의했다. 솔론은 귀족 출신이지만 상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귀족은 그가 귀족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고, 평민은 그가 고생하며 장사를 해봐서 평민의 상황을 잘 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p196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전통을 무시한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미워했고, 그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과장해서 서술했다. 따라서 참주는 결코 포악한 지배자가 아니라, 귀족의 이익에 반해 평민을 위해 통치한 지배자였다

p202 그들의 병력은 약 30만 명이었다. 이렇게 하여 페르시아군은 전투 병력이 약 260만명, 전투보조원이 약 260만 명에 달했으므로 총 병력은 520만 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페르시아군의 병력 숫자는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제시한 것인데, 상당한 과장이 있었다고 해도 페르시아군이 역사적인 대병이었음은 틀림없다.

p209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텐데요

p217 화려하게 꽃핀 아테네 민주정은 아테네의 제국주의 덕분이었다. 군사력을 앞세워 이웃 국가들을 위협해서 얻은 부를 자신들 내부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기원전 5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걸쳐 아테네는 그리스의 경제,문화 중심 국가가 되었다

p219 심지어 소크라테스는 자기는 아스파시아에게 매를 맞아가면서 수사학을 배웠으며, 페리클레스의 명연설문을 실제로 작성한 사람도 아스파시아였다고 명확하게 진술했다.

p250 테베레강 남쪽에 라티움 평야가 있었고, 로마느 ㄴ이 평야의 곡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는 해안 지역에서 생산한 소금을 테베레강을 따라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판매했다. 이렇게 로마는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p258 로마에서는 가부장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강했기 대문이다. 에트루리아 여성의 높은 지위에 격분한 로마인은 이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p268 로마는 귀족과 평민을 각각 대변하는 원로원과 민회를 양대 권력 기구로 만들고, 귀족과 평민이 서로 견제할 수 있게 했다.

p281 삼니움과의 싸움에서 로마인이 범한 최대의 실수는 조급했다는 것이다. 로마인은 전투를 너무나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니움인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p304 가장 인기 있는 옷은 중국산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비단옷을 입은 여인네들은 몸매가 원히 들여다보였다.

p307 로마 시민들이 농지에서 쫓겨나 도시로 몰려들고, 그 자리를 노예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을 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p315 가이우스 그라크수의 곡물법은 세계 최초의 복지 입법이다.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시민에게 곡물을 싸게 살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p323 급료와 토지 외에 병사들이 기대했던 것은 전리품이었다. 반항하는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둘 경우 장군들이 약탈을 허락한다면 단단히 한몫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병사들은 국가가 아니라 장군들에게 충성하게 되었고, 군대가 점차 사병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p331 갈리아 전쟁의 영웅인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로 끌려가 죽었지만, 켈트족의 영웅으로 역사에 남았다. 근대 프랑스 사람들은 베르킨게토릭스가 전투를 벌였던 지역을 발굴해 유적지로 조성하고, 프랑스 곳곳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p344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원로원과 인민에게 넘겨주는 시늉을 했을 뿐이며, 실제로는 왕처럼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다. 하여튼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가 시늉이라도 권력을 양보한 데 감사하여 그에게 '존엄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p348 아우구스투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제정을 수립할 때까지 수많은 프린켑스가 존재했다. 네로, 트라야투스,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 등등. 흔히 이 사람들을 로마의 황제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결코 황제의 반열에 오른 적이 없다. 제1시민이었을 뿐이다.

p356 키케로는 라틴어로 글을 썼을 뿐 아니라 라틴어의 품격을 희랍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58권의 연설문, 웅변술에 관한 일곱 권의 저서, 20여 권에 달하는 철학서와 수많은 편지를 썼다. 그는 라틴어를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뛰어난 언어로 만들었다

p361 로마는 다른 종족을 정복할 때면,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다른 종족의 수호신을 초대했다. 로마인은 다른 종족의 수호신에게 로마에 그들을 위한 신전을 세우고, 로마인이 적절한 의례를 행하겠다고 맹세했다.

p380 기독교는 야훼가 종족의 구별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해준다고 가르쳤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고대 종교를 무너뜨리고 인류 종교사에 새 장을 열었다

p389 로마인들이 기독교 신자들을 고발한 이유는 그들이 로마의 다신교 의례를 방해했다, 황제 숭배를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로마의 전통적인 도덕을 무시했다 등이었다

p401 율리아누스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임종 때 두 아들에게 "화목하게 지내라. 병사들을 부유하게 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라"라고 말했다. 이 말은 3세기가 군인들의 시대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p406 동서로 갈릴 후 로마제국의 정통성은 동로마제국에 있었다. 그리고 흔히 비잔티움제국이라고 불리는 동로마제국은 어디까지나 로마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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