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의 밤과 고흐의 별 - 39인의 예술가를 통해 본 클래식과 미술 이야기
김희경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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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람스의 밤과 고흐의 별

 : 김희경

 : 한국경제신문

 : 2022/12/19 - 2022/12/24


음악가와 미술가를 대비하며 풀어쓴 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나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시 잘난체 하기 좋은 책이다. ^^

에프소드별로 내용이 길지 않아 시간남을때 조금씩 읽기에도 좋다. 

관심이 있으면 더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연말에 읽으면서 음악관, 미술관에 가면 참 좋을 듯 하다. 


p21 눈에 보이지 않는 여신들의 이상적인 미를 좇기보다, 파리의 거리에서 살아 숨 쉬는 동시대 인물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게 된 것이죠. 그는 스스로 “나는 남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것을 그린다”라고 말했습니다.

p28 빈 분리파가 당시 내세운 슬로건은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됩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p36 피아졸라가 쓴 악보들을 본 블랑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썼어. 그런데 여긴 스트라빈스키, 여긴 라벨이군. 피아졸라는 어딨지?”

p48 피카소는 이를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성장하면서도 여전히 예술가로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p66 리스트는 이전까지만 해도 체르니의 지도를 받아 정확한 템포를 지키던 연주자였죠. 그러나 이때부터 파가니니처럼 고난도의 기교를 뽐내며 화려한 연주를 하는 비르투오소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p77 카라얀은 그 정도로 목표지향적이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모두 달성한 사람은 목표를 너무 낮게 정한 사람이다”

p83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없을 것 같은 작품만 일부러 골라 사들이는 최후의 구매자 역할도 자처했습니다. 그 수도 많았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인상푸 작품의 90%가 카유보트의 기증품일 정도입니다.

p108 신성한 예배당에 이런 나체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목욕탕에나 어울리는 그림이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보복을 하듯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수문장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p115 드보르자크는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음악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유연하게 다른 장르의 음악을 받아들이고 접목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감하고 새로운 도전으로 대작 신세계로부터가 탄생했습니다.

p141 1805년을 전후로 교향곡 3번,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피아노 소나타 14번, 피아노 소나타 23번 등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명곡들이 잇달아 탄생했습니다.

p145 피사로는 고흐를 처음 보고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 남자는 미치거나, 시대를 앞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두 가지 모두를 할 줄은 미처 몰랐다”

p185 나는 높은 수준의 미술에서 2등이 도기보단 평범한 것들의 1등 화가가 되겠다. 궁정 화가가 한 말이라고 쉽게 생각되지 않지만 벨라스케스의 삶과 그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p208 12개의 별자리와 여인을 함께 그려 넣은 황도 12궁은 실내용 달력에 그려진 그림인데요. 이 그림으로 인해 달력 주문이 폭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4명의 여성을 통해 계절을 의인화하고 그 변화를 담아낸 사계도 오늘날까지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p236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블라드미르 호로비츠가 60년 만에 고국인 러시아로 돌아와 은퇴 독주회를 열고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도 트로이메라이였습니다.

p245 불멸의 사랑과 이를 담은 작품들로 오늘날까지 자주 회자되는 모딜리아니. 그는 벨 에포크 시대, 몽마르트의 보헤미아인으로 불릴 만큼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즐겼던 화가입니다.

p247 벨에포크는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14년까지의 기간을 이릅니다. 이 시기 파리엔 인상파, 입체파 등 다양한 사조의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고, 그만큼 개성 강한 작품들이 많이 탄생했습니다.

p271 카메라 옵스큐라는 카메라의 시초로 볼 수 있습니다. 사각형 상자 한 면에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을 통과시키면 반대편에 풍경이 거꾸로 나타나죠. 페르메이르는 이 장비에 맺힌 이미지를 연구하고, 거울도 함께 이용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빛의 양 등을 자세히 살펴보고 계산했죠

p281 1781년 레오폴트의 반대에도 빈으로 훌쩍 떠났는데, 이는 세계 최초로 전업 작곡가의 길을 걷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왕실과 교회의 의뢰를 받아 작곡하는 게 아니라, 영감과 의지에 따라 창작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p286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 그리고 행복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으려 했습니다. 느루아르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죠. “그림은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건 인생이나 다른 작품에도 충분히 많다”

p288 인상파 화가들은 주로 풍경을 그렸습니다. 이에 반해 르누아르는 사람에 주목했습니다. 소설가 에밀 졸라가 “르느아루는 무엇보다 사람을 그리는 화가”라고 정의하기도 했죠

p292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곡입니다.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의 작품들과 함께 세계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도 꼽히죠.

p303 슈베르트가 만든 가곡의 세계는 넓고도 깊습니다. 송어와 같은 가볍고 유쾌한 곡부터 우아하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을 가진 작품까지 다양합니다. 슈베르트는 특히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시를 좋아해, 괴테의 작품으로 마왕, 프로메테우스 등 60여 곡을 만들었습니다.

p313 이탈리아 오페라가 작품의 줄거리보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음악을 강조한다면, 바그너를 중심으로 한 독일 오페라는 짜임새 있는 서사와 극적인 전개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바그너의 작품들을 이탈리아 오페라와 구분해 악극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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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 네팔 - 섞이지 않지만 밀어내지도 않는 사람들 지구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수잔 샤키야.홍성광 지음 / 틈새책방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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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극히 사적인 네팔

 : 수잔 샤키야

 : 틈새책방

 : 2022/12/12 - 2022/12/16


한국사람들보다 한국말을 더 잘했던 비정상히담 출연진들의 책을 계속 읽고 있다.

이번에는 네팔이야기다.

책에도 나오지만 나에게 네팔은 히말라야와 동의어다.

책을 읽다보니 네팔이란 나라가 참 다채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126개의 민족이 어울려 산다고 한다. 

그 작은 지역에 이렇게 많은 민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수많은 전쟁과 이동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들이 큰 갈등없이 어울려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네팔민족성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 

카스트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차별적인 제도는 아니라고 한다. 카스트는 직업의 구분정도로 생각하고 사는것 같다. 

축제가 많아 휴일이 많다는 것도 재미있다. 저자가 소개해주는 축제들은 참 흥미롭다.

힌두교의 다양한 신들에게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색의 축제같은 경우는 꼭 가보고 싶다.

내게 가까운 지역도 아니고 가보고 싶어 동경하는 곳도 아니지만 새로운 지역, 새로운 역사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세상엔 참 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다. 


p20 나마스테는 이런 의미다. “내 안에 있는 신이 당신 안에 있는 신을 존중한다”

p29 공공장소에서 이성과 이야기를 나누면 눈길이 솓아진다. 몰래 만나거나 편지를 써서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 그렇다. 네팔에서 이성과 사귀려면 살 떨리는 비밀 연애를 각오해야 한다.

p37 네와르 민족은 막내가 부모님을 모신다. 형이나 누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고 ㅏ함께 고생을 했으니 제일 귀여움을 받고 자란 막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논리다.

p49 아무도 “나는 바이샤, 너는 수드라” 하면서 카스트를 따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민족과 가문이다.

p51 네팔의 카스트는 신분이 아닌 어떠 ㄴ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 줄 뿐이다.

p58 더릿은 보통 부정한 일에 종사한다. 부정한 일이란 청소나, 빨래 같은 것을 말한다. 가장 천대받는 일은 가죽을 만지는 일이다

p59 상당수의 네팔 사람들도 이제 부당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그러나 더릿은 천하고, 더릿과 접촉하면 지옥에 간다는 인식을 쉽게 바꾸기는 어렵다

p68 네팔 사람들은 크리슈나의 매력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거다 “우리는 크리슈나의 후손이니까 여기저기에 여자 친구를 만들어야 해”

p93 네팔에서 새로운 총리가 취임하면 가장 먼저 인도를 찾는다. 인도에 밉보이면 정권이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국민들의 생계와 목숨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p101 소를 가지고 농담하는건 피했으면 한다. 네팔에서 소를 잡으면 벌금 정도가 아니라 징역행이다. 혹여 “물소는 먹으면서 젖소는 왜 안 먹어?” 이런 얘기를 하면 네팔에서는 매우 공격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p110 소를 함부로 대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유는 물론이고 소똥과 오줌까지 신성시한다. 심지어 모든 부위에 다른 신이 산다고 믿는다

p136 신체 조건보다 더 중요한 건 산을 대하는 태도다. 세르파는 산과 신을 지키는 사람들, 산을 존경하고 자연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라면 민족이나 출신과는 상관없이 세르파로 불려야 하지 않을까

p147 오늘 실패해도 내일은 되겠지 하고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에요. 산에 오르면 이른바 멘털이 강해져요. 지금 40대인데요. 20년 넘게 여기서 일했으니 저한테 산에 오르는 건 그냥 일이고 일상인거죠

p171 전설을 보면 쿠마리는 샤키야 가문에서 뽑는다는 걸 알 수있다. 그래서 내 동생도 쿠마리 후보가 된 것이었다. 샤키야 가문은 석가모니의 후손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후손의 몸에 힌두교 여신이 현현한다.

p211 반군이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일종의 수금을 하러 다닌거다. 자금을 조달하라곤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그냥 돌아다니면서 “우리는 마오이스트인데 기부금 좀 주세요” 이렇게 한 거다. 심지어 자기들이 기부액을 정해 놓고 돌아다녔다.

p228 우리는 힌두교라는 종교가 아니라 자연과 우리 안의 신을 믿는다. 자연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다 신이고, 자연과 함께하는 우리의 생활이 종교다

p236 나름 한국말도 어느 정도 하게 됐으니 한국 사람들의 호기심에도 부응하고 싶은데 막상 이야기하려고 하면 자꾸 막힌다. 그래서 뜬금없이 외국에서 모국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된다. 한국이 좋기 때문에 네팔과 한국이 서로 더 잘 알고 친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p238 네팔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이 추위를 많이 타는 건 나약하거나 엄살을 부려서가 아니라 정말 추워서 그런거다

p240 다른 나라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네팔의 경우에는 게으르다기보다는 좀 더 여유롭고 느긋하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고 생각한다

p245 서로 섞이지 않지만 서로 밀어내지도 않는 사람들. 이게 네팔 사람이다. 서로가 다른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존중한다. 다만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에는 타협하지 않는다.

p261 길일을 잡고 진짜 생일을 정하는 등 대소사를 모두 이 달력에 의지한다. 비끄럼 섬벗은 단순한 달력이 아니라 생활의 중심이다.

p268 한국의 축제는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손님을 받는 개념으로 준비한다. 누구나 같이 즐기는 게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것을 구매한다. 엄밀히 말하면 축제가 아니라 장사다

p278 홀리는 네팔과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힌두교 축제다. 3월쯤 되면 한국의 네팔, 인도 커뮤니티에서도 이 축제를 연다. 이날은 봄맞이 축제 혹은 색채의 축제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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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한국사 1 - 전근대편 시민의 한국사 1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돌베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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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의 한국사1

 : 한국역사연구회

 : 돌배게

 : 2022/11/08 - 2022/12/18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국사 통사를 읽었다.

내용도 꼼꼼하고 최근 발견된 내용들도 많이 업데이트됐다.

새롭게 추가된 내용들을 생각하면서 읽으려니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시험용 서적이 아니다보니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배경도 같이 설명해준다.

한번 읽어서 이해될 수는 없을 것 같고 앞으로 4-5회정도 더 읽어서 머릿속에 정리해야할 것 같다.

2권도 기대된다. 


p34 후기 구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쓰임새에 맞춰 찍개, 주먹도끼, 긁개, 자르개 등으로 다양한 석기를 만들어 썼다. 돌날의 아랫부분을 손질한 슴베도 만들었다. 이것을 나무자루에 꿰어 창이나 작살로 쓰거나, 더 작게 만들어서 화살촉으로 사용했다. 슴베찌르개는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일본 열도로 전해졌다

p39 한반도와 그 주변의 신석기문화는 대략 기원전 8,000년 전부터 시작됐다

p42 신석기인은 이전처럼 막집도 지었지만, 조금 발전된 움집을 짓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p53 청동기가 보급된 이후에도 농기구는 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었는데, 반달돌칼, 돌보습, 나무 쟁기 등이 대표적이다

p56 최근에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민무늬토기의 등장 시점을 근거 삼아 기원전 15세기로 보기도 한다. 다만 만주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비파형동검이나 청동거울은 기원전 12세기 무렵에 등장했고, 한반도 지역에 청동기 문화가 널리 보급된 것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이다.

p95 문헌과 금석문에 보이는 동부여라는 나라가 부여와 별개로 존재했는지, 위치가 어디였는지 등은 명확히 알 수 없다

p105 동해안의 옥저와 도예는 예족이라는 동일한 종족이다

p107 집단끼리 서로 침범할 경우 노비나 소,말로 배상하도록 했는데 이를 책화라고 했다. 특별히 음력 10월에는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p115 전연의 모용황은 용성을 도읍으로 삼고 중원 진출을 도모했는데, 342년 중원 공략에 앞서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는 모용황의 전략을 간파하지 못해 도성인 국내성이 함락됐다. 전연군은 고국원왕의 부왕인 미천왕릉을 파헤쳐 시신을 탈취하고, 왕모와 왕비 등 주민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철군했다

p117 고국원왕은 미천왕대에 점령한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을 본격적으로 경영하며 남진정책을 추진할 기반을 다졌는데, 이때 중국계 망명인을 활용했다. 이는 안악 3호분2의 무덤주인인 동수가 중국계 망명인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p123 백제국은 대외적으로 목지국을 압도하며 점차 마한의 중심 국가로 올라섰다

p133 마립간 시기부터 경주에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널에 시신을 넣고 그 위에 껴묻거리를 넣은 덧널을 덧세운 다음, 그 주위에 돌을 쌓고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것이다

p181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륜의 아들 진평왕이 즉위했다. 진평왕은 신라사에서 유례없이 긴 재위 기간을 누리면서 정치적 안정과 함께 제도정비를 이뤘다

p215 고구려는 372년에 태학을 두었다. 여기서 박사들이 학생들에게 유학 경전 등을 강의했는데,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이와 별도로 경당이 있었는데, 여기서 청년들이 활쏘기를 익히고 중국 고전을 공부했다

p221 이른 시기 금석문은 한자를 우리말 어순으로 작성한 것이 많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의 비문들에는 순한문투의 문장이 일반화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신라사회에서 한자와 한문에 대한 이해가 심호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p253 수의 고구려 원정이 임박함에 따라 각국의 외교적 대응이 더욱 활발해졌던 것이다

p257 당시 고구려는 왕권이 매우 약화된 귀족연립체체상태였다. 백제도 무왕대에 왕권이 많이 강화됐지만, 여전히 대성8족 등 귀족 세력의 권한이 막강했다. 신라도 선덕여왕의 측근세력과 반대파 진골 귀족의 대립이 깊어지고 있었다

p265 백제도 당과 관계를 소홀히 하면서 신라를 계속 공격하던 중에 나당 연합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삼국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넘어서 동북아시아 전체를 뒤흔드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p271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663년 6월 부여풍이 복신을 제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군사 지휘를 총괄하던 복신의 죽음으로 부흥군은 크게 동요했다

p275 이 무렵인 670년 4월 티벳 고원의 토번이 당을 공격해 도성 일대를 위협했다

p279 신라의 당군 축출은 당의 동방정책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돌권의 부흥과 발해 건국으로 이어지는 국제 정세 변동의 단초를 열었던 것이다.

p283 즉위한 지 한 달을 갓 넘긴 681년 8월에 왕의 장인 김흠돌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모반의 주동자는 물론 가담한 모든 사람들 처형했다

p319 국왕권을 한층 강화해가던 682년에 예부 산하에 국학을 설치했다

p329 황룡사 종과 725년에 만든 오대산 상원사의 동종은 귀족 가문의 공방에 소속된 장인이 만들었다. 큰 사찰도 자체 공방을 운영하고 승려가 장인을 겸했다.

p335 가부장제를 바탕에 둔 사회이지만 여성의 재혼이나 사회 활동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는 홀로 된 뒤에 원효와 재혼했다. 그리고 궁궐에서 나온 삼모부인은 거대한 황룡사 종을 주조하는 사업에 대시주자로 참여했다

p345 문무왕이 의상에게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며 크게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의상은 승려는 무소유를 지향하며 불교의 가르침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p351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부른 우리말 노래로 진성왕 때에 각간 위홍과 승려 대구화상이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했다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고 삼국유사에 수록된 14수만이 알려져 있다

p357 신라 범종은 걸개 옆에 종의 내부와 통하는 음관을 설치해 깊은 소리를 낼 수 있게 했는데, 다른 나라 종들에는 보이지 않는 한국 종의 특징이다

p365 무왕은 동생 대문예에게 원정을 명령했으나 그는 전쟁의 상대가 당까지 확대될 것을 우려하며 반대하다가 726년 당으로 망명했다. 이처럼 당시 발해 지배층은 외교노선을 둘러싸고 반당파와 친당파로 분열되어 있다

p379 내분기에 이탈한 말갈 부족을 9세기 초에 선왕이 다시 정복한 이후 지방통치제도는 5경 15부 62주로 완비됐다. 발행의 영역은 남쪽으로 신라와 접했고, 서쪽으로 거란과 이어지며 동쪽으로 연해주까지 미쳤고, 북쪽으로 동류 송화강 하류를 경계로 삼았다

p387 조각으로는 정혜공주 무덤에서 발견된 돌사자와 흥륭사 석등이 대표적이다. 돌사자는 눈을 무릎뜨고 머리를 치켜들고 있으며 혀를 만 채 입을 벌리고 있다.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강한 힘을 표현한 조각 수법이 돋보인다. 상경성 2호 절터에 위치한 석등은 상륜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기둥돌 아래와 위에 새겨진 연꽃 무늬도 부조가 강하고 힘찬 느낌을 준다.

p349 그에 따라 화폐 제조를 담당하는 주전도감을 설치해 해동통보,삼한통보 등의 동전과 활구라고도 불린 은병을 주조,발행했다

p357 정치가 경색된 가운데 측근 세력의 문,무신 사이에 권력 다툼이 생겼다. 결국 1170년, 견룡군 장교들이 중심이 된 무신들은 보현원에서 왕이 연회를 벌이고 있는 틈을 타 무신정변을 일으켰다

p367 고려는 최우가 집권하던 1231년 처음 몽골의 침공이 잇은 후부터 1259년 강화가 논의될 때가지 장기간 맞서 싸웠다

p403 1269년 고려 세자 왕심(충렬왕)은 원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원에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황실의 딸과 통혼할 것을 요청해 허락받았다

p407 쌍화점은 고려 충렬왕대에 지어진 고려가요 혹은 향악곡으로 알려져 있다. 남녀관계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이를 남녀상열지사라 하기도 했다

p447 노비는 호적에 등재됐지만, 재산으로 취급해 상속되거나 매매됐다. 국가에 역을 부담할 의무가 없는 대신 권리가 제한돼 과거에 응시하거나 관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집과 토지 등 재산뿐 아니라 노비를 소유하는 것이 가능했다. 부유한 노비는 주인에게 재물을 주고 양인이 될 수도 있었다

p452 이혼과 재혼을 대하는 당시 분위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려시대에는 남녀 모두 의무적으로 정조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호 신의의 원칙에 입각한 개념에 가까웠다. 이규보가 한 남성의 묘지명을 지어주면서 “혼인한 이후에 다른 여성과 관계한 일이 없다”는 망자의 말을 기록한 것을 보면, 정조를 지키는 경우가 얼마나 흔치 않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p460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쪽을 따른다거나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어기는 실수를 하라는 역대 국왕의 말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p464 화엄종은 교학불교를 대표하며 불교 교단에서 그 위상을 회복했다. 왕실에서는 화엄종에 관심을 표하며 원찰이나 진전사원을 화엄종 사찰로 지정했고, 왕자들을 화엄종에 출가시키자 문벌 자제가 화엄종으로 출가하기도 했다

p476 연등회와 팔관회에서의 연회는 왕과 신하 간의 위계질서를 확인하고, 서로의 우호를 다지는 행사인 동시에 관민이 어우러져 함께 즐기는 축제의 성격도 있었다. 이는 훈요10조에서 당부한 것처럼 군주와 신민이 함께 즐기는 행사였던 것이다

p477 첫 번째는 1011년 거란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시작됐다

p495 천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사천대와 태사국은 고려 초기에 설치되어 일식이나 월식 등을 관측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역할을 했다

p500 초기에는 주로 대형 천불이 많이 제작됐으며, 대형석불은 지역적 특색이 반영된 경우가 많다. 불상 의외의 조각으로는 태조 왕건의 동상이 유명하다

p517 정도전은 국가 운영에서 국왕보다는 신료를 중심에 두는 방안을 모색했다. 주자성리학이 제시한 정치사상을 좇아서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추구했던 것이다

p531 명은 다른 나라가 조공을 바칠 때는 입국 확인서인 감합을 요구했지만 조선의 경우 국왕의 표문만으로 허락할 정도로 조선을 인정했다

p577 유학에서는 정치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역사 기록을 중시했는데, 조선은 이러한 이념에 따라 사관제도를 정비하고 사관의 위상을 강화했다.

p596 사림은 피해를 입었지만 지방의 서원이나 향약을 기반으로 지지 기반을 확산하는 등 계속 성장했던 것이다. 명종 말 선조 초에 이르면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정치를 주도했다

p606 이는 스스로 작용할 수 없으며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하고 이가 올라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존재와 도덕을 일괄해 이기의 관계를 서술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때문에 이황은 이기이원론자, 이이는 이기일원론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p607 기대승과 벌였던 사단칠정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이황은 이를 중시했을 뿐 아니라 도덕 원칙과 명분을 강조하는 도덕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p611 대학이 성인의 수신부터 치국평천하까지 이르는 추상적 지침을 담고 있다면, 소학은 일상에서 실천해야 하는 도덕적 행실에 대한 지침을 담고 있다.

p615 조선에서 왜인에게 주던 혜택과 무역량을 줄이자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은 왜인이 폭동을 일으키거나(삼포왜란), 일본 국내의 혼란으로 통제가 느슨한 틈을 타 왜구가 조선의 해안을 약탈하는 사건(사량진왜변,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p630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에 비하면 극히 짧은 기간에 마무리됐음에도 오랑캐로 간주하던 여진에게 패배하고 조공국이 됐다는 사실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파장이 더욱 컸다. 아울러 항복의 책임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이 잠재됐다

p644 향약은 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인한 사회적 동요를 완화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양반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향촌사회에서 양반층과 상천민 사이의 신분차별도 한층 공고화됐다.

p651 조선 후기 5군영은 일관된 계획을 갖고 설치됐다기보다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른 것이었기에 각 편제나 조직, 그리고 운영 방법 등이 제각각이었다

p655 정조가 추진한 탕평은 충과 역을 명확하게 구분하되, 붕당을 구별하지 않고 오로지 충성스러운 자만을 등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충은 와에게 중성하는 자만을 등용한다는 의미다

p670 대동법의 수취율은 시행 초에는 도마다 차이를 보였지만, 대동법이 확대 시행되면서 점차 12두로 고정됐다

p675 19세기 초 1,000만 석에 이르는 환곡은 더 이상 농민들에게 재분배의 혜택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과세 부담으로 작용해 농민항쟁의 불씨를 지폈다.

p687 조선시대 한양 주민 중에서 핵심 집단은 관료와 그 가족이었다. 대다수의 관료는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관료가 되면 상경했다가 은퇴하면 낙향했지만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며 한양에 세거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대대로 한양과 그 인근에 살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족층을 경화사족, 경화세족이라 부른다

p694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노비면 그 자녀는 모두 노비가 되는 일천측천의 가혹한 노비세전법은 1669년(현종 10) 양인의 증대 방침에 따라 종모법으로 전환됐다. 혼란을 거듭하던 종모법은 1731년(영조 7)에 확정돼 노비와 양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자녀에게 신분 해방을 가져다줬다.

p701 홍경래는 정주성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신화처럼 퍼져나갔다.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홍경래의 난에 고무되어 반란이 일어났고, 홍경래와 같은 영웅이 나타나 민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전국 각지로 퍼져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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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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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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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06 - 2022/12/18


시인이라고 하는데 작가에 대해서 잘 모른다.

매달 한 권씩 교보문고에서 전자책을 빌려주는데 이번에 이 책을 대여해줘서 읽게되었다

산문집이라고 하는데 아마 수필을 말하는 것 같다.

시인의 산문집이라서 그런지 읽는 호흡이 편했다.

분명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마치 70년대의 삶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다. 

뭔가 부족하고 고달프지만 따뜻한 기억이 나게 하는 시절...

나이가 들어야 느낄 수 있는 감성.. 

그런 느낌의 책이다. 뭐라 말하기 좀 어렵다.. 


12% 늦은 반성이라도 하듯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일출과 일몰을 보러다녔다. 다행이 맑은 날이 이어졌다

13%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28% 증상과 통증은 이제 미병이 끝나고 우리 몸에 병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대부분의 장기와 기관들은 통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39% 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미신 같은 말을 잘도 믿고 지키며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정작 믿어야 할 사람에게는 의심을 품은 채 그 사람과 그의 말을 믿지 않을 때도 있었다

44% 자신이 말을 하는 시간과 상대방의 말을 듣는 시간이 사이좋게 얽힐 때 좋은 대화가 탄생하는 것이라 나는 그때 김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45% 오래전 사당동 막횟집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이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했던 노래.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 네가 울어주렴. 아무도 모르게 잠든 밤에 혼자서”로 시작되는 노래. “안녕 내 작은 사랑아 멀리 별들이 빛나면 네가 얘기하렴 아무도 모르게 울면서 멀리멀리 갔다고”로 끝나는 노래

61% 내가 그곳에서 가장 자주 한 일은 걷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걸을 때도 있었고 끼니를 거르고 걸을 때도 있었다. 별을 맞으며 걸었고 비가 오는 날에도 걸었다. 걷고 있는 시간만큼은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내가 스스로 세운 목표에 대한 중압감 같은 감정들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어 좋았다

67% 배가 고플 때 먹고, 고단할 때 몸을 뉘이고, 졸음이 오면 애써 쫓아내지 않고 잠이 드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간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해탈과 가장 가까이 자리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그렇게 참지 않는다면 조금 덜 욕망할 수 있을 테니까

76% 누가 해도 비슷한 수준의 결과를 내는 노동의 직종들은 한없이 천대받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노동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83% 분명 서울에서 종종 먹어왔던 음식인데도 재료의 맛과 질이 크게 달라 같은 음식이라 부르기 무색한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게다가 산지에서는 서울보다 훨씬 싼값에 먹을수 있으니… 그럴 때마다 나는 맛에 감탄을 하면서도 그동안 크게 속으며 살았다는 모종의 배신감에 휩싸이곤 했다

p91% 맹목에 가까울 정도로 썼던 습작시들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지만 이십대 초중반,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애를 쓴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곧 그곳의 일을 그만두고 문학과 관련된 직장을 얻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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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유나이티드 - 음악도 인생도 뿌리에 물을 주어야 꽃이 핍니다 클래식 유나이티드 1
정경 지음 / 똑똑한형제들(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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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래식 유나이티드

 : 정경

 : 똑똑한 형제들

 : 2022/12/10 - 2022/12/13


한국의 유명한 연주자들을 인터뷰한 책.

유명하신 분들을 모신 건데 사실 난 한명도 모르겠다.

나에게 유명한 사람들은 금난새, 임윤찬, 손열음 이런 사람들인데 이 책에 나오신 분들은 연세가 좀 있으시고 주로 교수 겸 연주자분들이었다.

어떤 분인지 모르다보니 궁금한 것이 별로 없었고, 결국 책을 읽었는데 내 맘에 남는 게 많지는 않았다. 

클래식 초보가 읽기엔 인터뷰의 내용이 어려웠다.

문장이 어려운 건 아니다. 단지, 그분들의 삶의 궤적을 모르다보니 던져지는 질문에 감동이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조예가 깊은 분들이 읽으면 더 깊이 깨닫고 좋았을 것 같다. 


p30 연주장에서 들으면 합창단이 세 그룹으로 나누어집니다. 스테레오처럼 들리는 공간음악 효과를 가진 곡이죠. 거기에 그레고리안 성가에서 나오는 리베라메,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를 섞어서 교묘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무대에서 연주를 한다는 것은 작곡자의 창조적인 곡을 가지고 재창조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p41 몸을 사리다 보면 연주 기회는 줄고, 연주를 안 하게 되면 제 실력이 향상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도 큰것 같아요. 20대는 조금만 연습해도 될지 몰라도, 50대는 하루 이틀만 쉬어도 금방 티가 납니다.

p54 저는 이른 시간에 연습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오픈 스트링이라는 개방선을 그으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p61 음악도 중요하지만, 그 음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 풍부한 삶을 살아야 해요. 박물관을 가서 무엇이 아름다운 작품인지 알아야 하고, 또 왜 그런지, 왜 아름다운지를 알아야 해요. 또한, 아름다운 마음을 갖는 것과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p77 이 우주의 모든 것에는 오르내림이 있기 마련이에요. 이러한 순환은 우리 삶의 일부죠. 내리막길을 겪고 있다고 해서, 그 상황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인생으 ㅣ일부라고 생각해요.

p85 타고난 재능 혹은 음악성을 갈고닦아야 훌륭한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겠지요 서양 클래식 음악이 우리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하려면 문화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86 오르가니스트는 매번 연주할 때마다 새로운 악기를 접하는데, 연주 전 리허설 동안 연주할 악기의 특성을 신속히 파악하고, 그 악기와 친숙해지고 정응하는 시간을 거쳐야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p99 연습으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닌, 일상생활에서의 노력으로도 부족한 부분들을 훨씬 쉽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p100 연주 내내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가장 큰 역할을 하기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p104 악기 앞에서 한 음 한 음 리듬을 정확히 연주하고 타격을 할 때에 본인 스스로 귀를 열고 들어야 하며, 연습과 연주를 할 때 근육 움직임도 느끼면서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p129 스승을 찾아가 제 발성을 일주일에 한 번씩 체크하고 싶다고 했더니, 스승은 저에게 “나는 더 이상 너의 마에스트로가 아니야. 너의 마에스트로는 저 무대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p130 긴장이라면 긴자이지만 전 집중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만큼 집중을 하는가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렇게 준비한 무대를 나가서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p165 무엇보다 너무 악기에 빠져있지 말고 음악을 더 연주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수단이 목적을 가리면 안 되는 것이지요.

p185 누구나 처음에는 실력에 상관없이 주목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기회들이 찾아옵니다. 저 또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으려 노력했어요

p186 본인의 예술이 어느 정도 오나성되려면 무엇보다 음악을 사랑해야 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 테크닉을 연마해야 합니다. 특히, 얼마나 꾸준하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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