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역사 : 근대 -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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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역사, 근대

 : 황현필

 : 역바연

읽은기간 : 2024/06/15 -2024/06/19


흥선대원군 이후 근대 역사는 내가 힘들어하는 영역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망국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고, 이를 바로보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힘든 역사를 읽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왕과 왕비, 친족들, 그리고 수탈당하면서도 나라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민중들...

운도 없고, 실력도 없었던 조선 말기를 한장한장 힘들게 읽었다.. 

이런 지도자를 만나지 말아야 하는데...

만난것 같다.. 


p18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축출하고 세도정치를 종식시켰다. 앞서 우리 역사에서는 통일신라 신문왕이 진골 귀족을, 고려 광종이 호족을, 공민왕이 권문세족을, 조선 태종이 개국공신을 숙청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p73 미군 대위 틸톤은 부인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남겼다. 나는 많은 전쟁을 겪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한 섬에서 치른 전투만큼 끔찍한 기억은 찾아볼 수 없소

p81 대원군이 양반에게 군포를 부과함으로써 나라의 재정이 유례없이 탄탄해졌건만, 고종과 민비는 자신들의 권력장악을 위해 양반 기득권의 이익을 다시 챙겨 줄 것을 약속한 것이다.

p95 19세기 죠수번에서 일본 우익의 사상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요시다 쇼인이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요시다 쇼인은 제자들에게 이런 강의를 했다. “한반도를 점령하고 만주와 대만과 필리핀까지 일본이 영유해야 한다. “

p111 조선은 청과의 조약에 이어 일본과도 조약을 체결한다. 일본과 제물포조약이 체결되면서(1882) 조선 정부는 임오군란 당시 파괴된 일본공사관에 대한 50만 원의 배상금을 내야 했고, 일본공사관에는 일본 경비병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임오군란의 결과 조선의 수도 한복판에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의 군대가 주둔하게 된 것이다.

p124 125 자신들을 스스로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제 목에 칼을 들이댄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멋진 행동이었다. 게다가 급진개화파는 젊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정변을 성공시킨 만큼 이후 권력의 달콤함을 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했고, 자신들의 조국이 신분제가 없는 평등한 세상이 되기를 꿈꿨다. 신분제 페지가 거론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 계급이 생겨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p135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과 청을 멸시하며 탈아론을 제창했고, 일본군 성노예의 필요성을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생전에 만든 학교가 지금의 게이오대학이다. 게이오대학은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의 극우 정치인을 배출하는 양성소 역할을 했다.

p200 통역관이 고종에게 그의 말을 통역했다. 서재필은 고종뿐만 아니라 조선이 어느 사람과도 조선말로 대화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윤치호 일기에 이런 글이 실렸을까. “내가 알기로 서재필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데, 어찌 타국 생활 몇 년 만에 모국의 말을 까먹었단 말인가?”

p222 호남의병토벌작전을 일제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고 했다. 또한 일제는 이들을 토벌한 후 ‘남한폭도대토벌작전기념사진첩’까지 제작했다. 교과서에도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표기된다. 그러나 우리는 ‘호남의병토벌작전’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들은 폭도가 아니라 스스로 일어난 의병이었기 때문이다.

p252 민영환은 자결했다. 민영환은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에게 맞아죽은 민겸호의 아들이었다. 개 아버지 밑에 호랑이 아들이 나온 것이다.

p263 선조와 인조가 멍청했나? 아니다. 그들은 영악하고 나쁜 군주들이었다. 자신의 왕권을 지키고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ㅇ낳았고, 신하들을 다루고 이용할 줄도 알았으며 잔혹하기까지 했다. 권모술수만을 놓고 말하자면 그들은 가히 천재적인 군주였다.

p281 스승 이토는 죽었고, 자신은 병석에 누워 있다 보니, 매국을 놓고 경쟁 관계였던 송병준과 이용구가 주도하는 일진회에게 매국의 주도권을 빼앗길 지경이었다. 이완용은 그 꼴을 보다 못해 직접 나서서 한일 병합조약을 체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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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클래식 수업 8 - 차이콥스키, 겨울날의 찬란한 감성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8
민은기 지음, 강한 그림 / 사회평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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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처한 클래식 8

 : 민은기

 : 사회평론

읽은기간 : 2024/06/07 -2024/06/12


민은기 교수님의 8번째 클래식 강좌..

이번에는 러시아 작곡가다. 차이콥스키가 메인이긴 하지만 러시아 5인조도 나오고 뒷부분에는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러시아 연주자들 이야기도 나온다. 

차이콥스키의 예민한 모습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여, 천재 작곡가들은 사실 살기는 쉽지 않았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소수자의 삶도 어려웠고, 주변의 혹평을 견디는 것도 힘들었고, 자기를 널리 알려준 루빈시타인의 잔소리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길래 만드는 음악마다 혹평을 받았을까? 의외로 프라하나 미국에서는 꽤 인기가 있었는데 유독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혹평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차이콥스키..

감정폭발적인 그 음악이 나도 참 좋다.. 작곡가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들으면 음악도 더 아는 것 같다. 

재미있다.. 


p24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아리랑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랫동안 불러온 민요가 아니라, 함경북도 출신 나운규 감독이 1926년에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작곡한 노래에요. 일제 식민지였던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때부터 민족의 노래가 된 거죠

p40 1848년 6월에 프라하혁명이 발발했을 때 스메타나는 혁명 세력에 적극 가담했어요. 국민의용군 행진곡 등을 작곡하면서 선봉에 섰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강압적인 반동정치로 인해 스메타나는 음악 활동을 제한받았고 결국 1856년 스웨덴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p62 글린카는 골수 민족주의자예요. “음악을 만드는 것은 민중이고, 예술가들은 그것을 편곡할 뿐”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민중의 창조력을 강조했던 인물이지요. 글린카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은 오페라였어요. 차르를 위한 삶 또는 이반 수사니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1836년에 초연됩니다.

p109 19세기가 되면서 음악가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기는 했지만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음악가는 집안의 하인 취급을 받았으니까요. 반면에 순수 애호가로서 음악을 즐기는 건 교양인의 덕목으로 높이 평가했어요.

p121 차이콥스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어요. 루빈시테인은 이때부터 삶을 다할때까지 차이콥스키 작품의 초연 지휘와 연주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습니다.

p128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작곡에 대해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뛰어나더라도 처음에는 소나타 혹은 교향곡처럼 기존의 형식과 구조를 잘 알고 이를 바탕으로 곡을 설계하지 않으면 그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기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거죠.

p140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쳤군요. 차이콥스키의 완벽주의가 느껴져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록 초연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이후 점점 인기를 얻었어요. 막강한 소수 5인도 이 곡을 좋아해서 모임 때 항상 로미오와 줄리엣 연주를 들었다고 해요.

p156 정식 극장이 아닌 음악원 무대에 올린 것이긴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차이콥스키와 생상스, 그리고 그 공연을 지휘한 니콜라이 루빈시테인 말고는 관객 중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았던 공연이었다고 해요. 무대를 기획한 세 사람만 즐겼던 거죠.

p163 이런 차이콥스키의 태도는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어요. 차이콥스키는 특히 작곡가 빌헬림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받았죠. 차이콥스키는 바그너가 오페라를 교향곡처럼 다루었듯이, 발레음악을 고향곡처럼 다루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 기법을 발레 음악에 도입하기도 했죠

p199 오네긴은 다른 오페라에 등장하는 영웅들과 다르죠? 자신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여길 뿐 아니라 주변을 불행에 빠뜨리는 비극적 인물이잖아요.

p205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차이콥스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인데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에요. 완성도도 높고 바이올린의 고난도 기교가 많이 필요한 곡이지요.

p227 차이콥스키는 현악 합주곡을 딱 한 작품 남겼는데 그게 바로 1880년 9월부터 두 달에 걸쳐 작곡한 현을 위한 세레나데 Op48이에요. 슬럼프 기간에 작곡된 음악 중에서는 이 곡이 가장 유명해요. 총 4악장 중에서 1악장은 모차르트 풍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죠.

p259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었어요. 교향곡 5번은 기악곡이지만 곡 자체가 무척이나 드라마틱해요. 극적인 템포 변화와 계속되는 반전으로 청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힘이 있죠. 교향곡 5번은 지금도 차이콥스키의 곡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품입니다.

p287 실력이 있어도 교향곡과 오페라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서 이 두 장르에서 모두 최고였던 작곡가는 아주 드물어요. 거의 모차르트가 유일할 거에요. 차이콥스키가 모차르트를 존경하고 좋아했다는 거 기억하시나요? 아마도 차이콥스키 역시 모차르트처럼 교향곡과 오페라 두 장르 모두에서 성공하고 싶었을 겁니다.

p295 푸시킨의 원작은 오페라보다 더 심하답니다. 원작에서 게르만은 리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도박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물욕을 채우기 위해 리자를 이용하는 인문이에요. 리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엘레츠키 공작도 나오지 ㅇ낳고요. 차이콥스키는 이 냉소적이고 진지한 푸시킨의 소설을 그래도 꽤 로맨틱하게 바꾼 거에요.

p313 아직까지도 메크 부인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에 대해서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차이콥스키와의 이상한 관계에 대한 소문으로 자식들까지 곤란을 겪자, 메크 부인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거라 보는 사람들이 많죠.

p343 4악장 시작 부분에 나오는 화음은 바그너 강의 때 배웠던 트리스탄 코드와 유사해요. 트리스탄 코드란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나오는 대표적인 불협화음을 말해요. 보통 불협화음이 사용되면 이후에는 협화음으로 균형을 맞추는데, 트리스탄 코드는 그런 해결을 해주질 않아요.

p352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어봐서 알겠지만 그의 음악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요. 클래식을 모르더라도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들어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요동치게 만드맂요. 그게 바로 차이콥스키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거에요.

p362 그렇게 노력한 덕분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서유럽 음악 양식에도 정통하게 돼요. 만약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그 실력 있는 솜씨로 막강한 소수의 작품들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해주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곡들이 서유럽에 알려지지도 못했을 거에요.

p388 다행히 새로운 도전의 결과는 성공적이었어요. 파리에서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으로 만든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이 연달아 흥행하면서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특히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통해 러시아뿐 아니라 20세기 클래식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떠오르게 돼요

p407 염려한 것처럼 스탈린의 문화 정책으로 인해 쇼스타코비치는 수모를 겪게 돼요. 일례로 1936년 공연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얽인 일화는 쇼스타코비치에겐 큰 상처를 남겼죠. 스탈린이 이 공연을 관람하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곧 정부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에 대한 혹평이 실렸어요. 불순한 서사도 모자라 음악이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이유에서였죠

p415 하차투리안은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소련군을 찬양하는 곡이나 행진곡 등을 주로 만들어요. 특히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발표한 교향곡 2번은 프로크피예프의 교향곡 5번 Op100,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과 더불어 전쟁 중 작곡된 소련의 대표적인 교향곡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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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조선여행 - 한양과 경성, 두 개의 조선을 걷는 시간 한국사 여행 1
트래블레이블 지음, 이도남 감수 / 노트앤노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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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4/05/31 -2024/06/06


재미있는 책이 출간되었다.. 

서울을 여행하는 책인데 서울을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로 나누어 중요한 역사적 유적지를 여행하게 한다.

조선시대는 아무래도 궁궐이 중심이 됐다. 서울에는 5대궁궐이 있는데 각 궁궐마다 역사적 내용과 관광 순서, 그리고 눈여겨볼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는 아무래도 서대문역사 박물관처럼 무거운 곳들이 많았다. 안타깝기도 하고 쉽게 넘기기도 어려운 부분들이 많지만 이런 역사가 있어서 우리나라를 독립으로 이끌었다는 걸 생각하면서 강하게 다녀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서울에 살아서인지 서울을 이렇게 깊이있게 다녀보지 못했던 것 같다.

가까운 곳일수록 더 소홀하기 쉬운데 이런 책을 읽은 기념으로 올해는 서울에 관심을 좀 가져봐야겠다..

재미있었다 


p38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왕조의 보물 같은 존재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국가를 세우고 건국의 정당성을 필요로 하던 시점, 한 노인이 고구려의 별자리가 새겨진 오래된 비석을 이성계에게 바친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새 왕조가 탄생하자마자 발견된 고대국가의 별 지도는 이씨 왕조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좋은 유물이었지요.

p46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명언이 조선의 왕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성군의 면모를 보여야 했던 조선의 왕에겐 책임질 일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p53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다. 김부식이 집필에 참여한 삼국사기 중에서 <백제본기 온조왕>편에 나와있는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인용한 것입니다.

p64 우리의 전통 건축에는 차경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빌릴 차, 경치 격, 즉 빌려온 경치라는 뜻입니다. 서양인들은 건물의 아름다움을 중시했지만 우리는 자연과의 조화를 함께 즐겼습니다. 조선의 건축물은 자연이란 배경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완벽해졌습니다.

p73 경복궁에서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실제로 업무를 보던 편전이 바로 사정전입니다. 근정전이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기 위한 공간이었다면, 사정전이야말로 왕이 신하들과 함께 업무를 보던 곳이었습니다.

p93 충성이란 사모요 거동은 곧 교동일세 일만 흥청 어디 두고 석양 하늘에 뉘를 쫓아가는고. 두어라 예 도한 가시의 집이니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연산군일기 연산 12년 9월 2일) 충신들은 어디 가고 유배지 교동으로 가고 있는가? 일만이 되던 연산군의 기생 흥청들은 어디 두고 해 지는 길에 누굴 쫓아가는가? 그냥 둬라. 교동 또한 가시울타리 집이니 밤새워 놀기 좋고 조용히 죽기 좋지 않나?

p98 정당성을 깔끔하게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광해는 조선의 군주로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칩니다. 특히 세금을 쌀로 통일하는 대동법과 토지 조사를 위한 양전 사업은 양반과 지주층의 반발이 거셌지만, 민심이 왕의 편에 섰기에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p115 다른 궁의 정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자연히 조정 마당의 크기도 작습니다. 또한 왕의 궁궐은 남향으로 짓는 것이 원칙이지만 창경궁은 자연 지세에 맞춰 동향으로 지었습니다. 조선의 궁엔 삼문의 원칙이 있는데 정문에서부터 3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경궁은 그 과정을 축소해 흥화문과 명정문만 통과하면 정전이 나오는 구조입니다.

p140 1620년, 경희국은 공사를 마치고 야심 찬 역사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궁을 지은 사람은 조선 15대 왕 광해군이고, 당시 이름은 경덕궁이었지요.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었던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왕의 기운이 서렸다는 술사의 말이 없었다면 경덕궁은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p144 서울역사박물관 뒤 주차장에는 놀랍게도 방공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궁궐 안에 박물관도 있고 주차장도 있고 방공호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p169 보태평은 종묘에 계신 조상신들의 문덕을 찬양하는 노래로, 국왕이 조상에게 첫 술을 올리는 초헌례의 순간에 연주했습니다. 반면 정대업은 조상신들의 무공을 찬양하는 노래로, 왕세자가 조상에게 두 번째 술을 올리는 아헌과 영의정이 마지막 술을 올리는 종헌에 연주했습니다.

p194 오조룡이 남긴 여운을 뒤로하고 중화전을 바라보던 시선을 왼쪽으로 돌려보겠습니다. 궁 안에 이렇게 서구적인 건축물이 세워져 있어도 될까 싶은 건물이 하나 보입니다. 돌로 만든 집, 석조전입니다.

p206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1897년부터 자주 근대화를 위한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납니다. 바로 대한제국의 연호 광무를 붙인 광무개혁입니다. 광무개혁의 핵심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 그 힘으로 국방, 경제, 산업,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외세의 도움없이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p214 초기엔 비슷비슷한 한옥 건축물을 사용하던 각국 공사관들은 인접한 타국 공사관을 의식해 대대적인 공사를 진행합니다. 시간이 흐른 탓에 지금은 당시 공사관의 외관을 확인할 수 없지만, 남겨진 기록과 사진이 그 시절의 경쟁을 보여줍니다.

p221 정동제일교회의 역사는 1885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언더우드가 자신의 집에서 집 없는 조선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면, 아펜젤러는 그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p238 경성역은 붉은 벽돌을 사용한 외관 때문에 한때 도쿄역을 본떠 만들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성역 축조 당시 도쿄대학교 건축과 교수였던 츠카모토 야스시 유품에서 서울역사 입면도가 발견되면서 스위스의 루체른역 모습을 참고해 만들었다는 것이 밝혀졌죠.

p246 1927년, 당시로는 아주 드물게 유럽 유학길에 오른 예술가 나해석도 이곳에 섰습니다. 그녀는 부산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대구와 수원을 거쳐 경성역에서 잠심 머무른 후 장춘, 하얼빈, 러시아를 거쳐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나해것이 떠난 길은 머나먼 유학길이기도 했지만,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걸어가고자 했던 그녀의 인생길인 것만 같습니다.

p265 기상 나팔 소리가 울리면 벌떡 일어나 이불을 개고 젖은 수건을 짜서 몸을 훔치고 홀딱 벗은 뒤 문 앞에 선다.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달리다가 허들을 넘으면서 입을 아~하고 벌린다 뛰는 것은 항문에 감춘 것이 없다는 표시, 입을 벌리는 건 입에 문 것이 없다는 증거다.

p286 그는 해례본의 정보를 알려주며 거래 중개를 맡았던 김태준에게도 중개 수수료를 1000원을 줍니다. 김태준은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며 우리글을 지키려 노력했던 사람으로, 훗날 간송에게 받은 돈을 중국 연안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사용합니다.

p292 성북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있습니다. 성북동의 운치를 담당하는 전통찻집 수연산방입니다. 오미자차, 단호박 팥빙수 등 대표적인 메뉴와 함께 고택의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벼루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글을 쓰는 집이라는 뜻의 수연산방은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린 상허 이태준의 고택입니다.

p311 일제강점기 언론인이자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던 소설가였지만 변절한 친일파 이광수는 삼천리(1936)의 성조기라는 글에서 정세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늘 바짝 깎은 머리에 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녔다고 말입니다.

p334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반응에 다시 주목해봅니다. 고종과의 대화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주춤했던 이유는 고려인의 무덤에서 청자를 꺼낸 이가 본인이었기 대문은 아니었을까요. 실제로 그는 대표적인 고려청자 수집가였습니다.

p339 당신은 세한도를 받을 자격이 되는 것 같습니다. 김정희 선생님을 존경하는 그대의 마음이라면 안심하고 전달할 수 있겠군요. 후지츠카는 세한도를 아무 대가 없이 내어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3월 후지스카의 서재에 불이 나느데, 세한도는 이미 손재형에게 건네진 후였지요.

p345 화재로 공사관을 잃은 일제는 이듬해인 1885년 조선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한성조약을 체결하는데, 이 조약에는 조선이 일본에 공사관을 지을 수 있는 부지와 비용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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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 : 북유럽 - 일상의 행복을 사랑한 화가들 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
손봉기 지음 / 더블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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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 : 북유럽

 : 손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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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4/05/25 -2024/06/02


이런 책 너무 좋다.

프랑스편을 사서 읽고, 이 책은 도서관에서 바로 빌려 읽었다. 

아직 여행해보지 못한 미지의 나라 북유럽.. 말로만 들어도 참 멋진 나라.. 

그곳의 미술에 대해서 듣지 못해서 더 호기심이 생겼다. 

사진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현실을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일상의 그림이 많아 더 좋았다.. 

상당히 많은 그림들이 개인소장이라는 것도 특이했다..

결국 북유럽에 간들 이 책에 나와 있는 그림의 상당수는 보지 못한다는 것.. 좀 아쉽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종교화, 왕에 대한 그림도 좋지만 이렇게 현실 풍경, 현실의 사람들을 그리는 그림도 참 맘에 든다. 

미술이라면 치를 떨던 내가 언제 이렇게 그림을 감상하는 걸 좋아했나 싶다..

내가 못해도 보는 건 참 좋다.. 


다만, 개정판이 나올 때 오타는 좀 고쳤을면 좋겠다..

조사가 틀린 부분이 너무 많다.. 


p22 세상의 마지막 전투를 의미하는 라그나로크 전쟁으로 오딘은 늑대에게 잡아먹혀 끝내 목숨을 잃는다. 오딘의 아들이자 가장 힘이 센 토르 역시 거대한 뱀에 물려 죽는다. 신들의 숙명이라는 의미를 지닌 라그나로크 전쟁으로 신과 거인 그리고 괴물들이 모두 죽고 인간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이 창조된다.

p26 물질적 부와 정신적 문화로 풍요로운 피렌체에서 단테가 돌체를 노래했다면 경제적 여유와 뛰어난 복지를 누리는 오늘날 북유럽 사람들은 휘게와 라곰을 노래한다.

p35 바르비종에서 유학한 스웨덴의 신진 화가들은 인상중의에서 배운 풍부한 빛과 사실주의에서 배운 자연주의 기법이 결합된 스웨덴 특유의 낭만적인 화풍을 창조했다.

p43 집안의 모든 인테리어가 곧 예술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카린의 작품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따뜻하면서 실용적인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의 기초가 되었다. 스웨덴의 세계적인 가구 브랜드 이케아의 창시자 캄프라드는 공공연하게 칼 라르손과 그의 아내 카린이 만든 가구와 인테리어가 이케아의 정신적 뿌리라고 이야기한다

p69 베르크의 또 다른 작품인 포즈를 취한 후에를 살펴보면 오랜 시간 같은 자세를 취한 모델이 막 일을 마치고 옷을 입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바싹 쳐 올린 머리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는 삶의 무게를 버티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여인의 연약함과 무력감을 보여준다.

p97 남자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뜨개질을 하고 있는 따위의 그림은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리는 것은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 숨 쉬는 인간이어야 한다. 이런 내 작품을 보는 사람은 이 주제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을 느끼며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어야 한다.

p99 뭉크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회화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작품에 담았다. 이런 그의 화풍이 잘 드러나는 것이 다리위의 소녀들이다.

p103 뭉크에게 여성은 마돈나이면서 메두사였다. 그에게 여성은 저항할 수 없는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이지만 또한 반대로 남성들을 파괴할 정도의 치명적인 마력을 지닌 존재였다. 이러한 뭉크의 여성관은 젊은 시절 자신을 배신한 여인의 증오에 기인한다.

p111 전쟁이 끝나고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중립국 회원이 아닌 나토창단 회원이 되어 미국의 마샬정책 원조를 받는 등 스웨덴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르웨이는 자기 민족의 정체성과 우월성을 찾으려는 국가적 낭만주의 예술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 시작하는데 그 결과 나온 작품 중의 하나가 구데의 하르당에르 피오르의 신부 행렬이다.

p130 아비규환의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절박한 사람들 뒤로 오슬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는 매서운 추위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두꺼운 코트와 모피 모자를 쓴 경찰관이 무심한 듯 얼음길 한복판을 따라 걸으며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p158 토르가 쇠망치로 얼음산을 부수면 얼음이 녹으면서 봄이 찾아오고 천둥과 번개를 부려 비를 내리게 하면 풍년이 온다. 그래서 북유럽의 사람들은 토르를 가장 좋아한다

p164 제인 그레이의 처형 속에 나오는 제인 그레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왕이 되었다가 9일 만에 쫓겨난 후 18세에 처형당한 비극의 인물이다. 제인에게 연민을 느낀 당시 영국의 여왕, 메리 1세는 신교도였던 그녀에게 카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숨 막힐 정도로 긴장되면서 비장한 이 작품 앞에 서면 누구든 운명의 비애에 가슴이 저리는 경험을 한다

p181 검정 옷은 그녀의 무거운 묵상을 상징한다. 작품 중앙에 창과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바닥에 뿌연 그림자를 남긴다. 빛이 지나가는 자리에 밀도 있는 대기와 먼지가 어우러져 빈공간을 꽉 채우며 고요한 일상으로 우리는 안내한다.

p184 생전에 유명한 화가였던 함메르쇠이는 사후에 다른 많은 상징주의 미술가들과 함께 잊혀졌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상징주의 회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함메르쇠의의 작품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품으로 런던, 파린, 뉴욕, 도쿄에서 연 전시회가 성공하며 덴마크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p196 르누아르는 뱃놀이에서의 점심에서 여인들의 엷은 미소와 발그스레하게 상기된 두 뺨을 통해 행복을 보여준다. 행복한 빛들로 가득한 일상을 그린 느루아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삶은 끊임없는 파티다. 그리고 나는 세상이 웃는 모습을 알았다.

p201 크뢰위에르의 정신병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국가 훈장까지 받은 남편을 버리고 외도를 저지른 부도덕한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녀는 오랜 소송 끝에 이혼은 했지만 딸의 양육권을 빼앗긴다. 후고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하지만 후고는 자신은 자유가 필요한 예술가라며 그녀를 떠난다. 이후 그녀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담담하게 견디며 살았다.

p205 덴마크 최북단에 위치한 작은 어촌마을 스카겐. 인근에 거대한 사막까지 있는 외떨어진 이곳에 19세기가 되자 덴마크를 비롯하여 젊은 북유럽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파리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혁신적인 화풍을 선보이려는 화가들에게 스카켄의 전원적인 분위기와 바다 마을 특유의 풍부한 빛은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p246 따스한 궁중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에서 화가는 국왕 부부를 그리고 있는 것인지 공주와 시녀들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p267 핀란드의 빛이라는 불리는 알베르트 에델펠트는 물가에서 노는 아이들과 일몰의 태양 아래 빛나는 ㄴ풍경들을 그리며 빛으로 생명을 가진 인물들과 사물들을 진실하게 표현하였다. 고객의 영향을 받은 핀란드 상징주의 화가인 페카할로넨은 원시적인 색감과 상징적인 묘사로 평화로운 느낌의 작품을 발표하며 핀란드 예술계 리더로 떠올랐다.

p271 알베르트 에델펠트의 해변에서 노는 아이들은 네바문의 벽화와 같이 살아 있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우리를 영원한 아름다움의 세상으로 데려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p279 그녀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서 자신이 하고 싶거나, 가고 싶은 일을 떠올리고 있는지 모른다. 이 작품에서 감보기는 웅장한 신화나 역사화 속의 매력적인 여성의 몸을 보여주는 기존의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 일상을 살아가는 당당한 여성을 보여준다.

p294 헬레나는 작품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여성동맹연합기금으로 작품을 사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둘은 테이블에 앉아 청어를 안주 삼아 술을 먹으며 밤새도록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한다는 통지를 받은 헬렌이 울면서 편지를 보여주자 헬레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껏 슬퍼해. 그리고 다시 일어설 때는 담금질한 쇠처럼 더 단단해지길 바라”

p301 헬렌이 활동할 당시에는 아픈 아이가 미술의 대중적인 주제였다. 당시 뭉크는 아픈 아이를 통해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었지만 헬렌은 인상주의를 연상시키는 활기찬 붓눌림과 빛의 처리로 병든 아이의 회복과 활력을 밝게 그려내고 있다.

p306 모든 농부들이 장작을 태우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중앙에 보이는 소녀가 일손을 멈추고 우리를 강렬하게 응시하고 있다. 극도로 지친 모습을 보이는 소녀의 퀭한 눈은 밭이 개간되지 않아서 농작물이 자라지 않으면 가족이 겨울을 견뎌낼 식량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와 세상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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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 황혼이 깃든 예술가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분투기
윌리엄 E. 월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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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 윌리엄 윌리스

 : 책과함께

읽은기간 : 2024/05/09 -2024/06/04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이름. 미켈란젤로..

사실 미켈란젤로에 대해 알고 있는 에피소드와 작품은 모두 젊은 시절 이야기다.

피에타나 다비드상의 멋진 작품.. 천지창조를 그리며 교황과 싸웠던 이야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티격태격했던 이야기나 라파엘로의 베끼기 능력을 무척 미워했던 이야기...

이 책은 미켈란젤로의 노년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노년기의 미켈란젤로는 내가 알던 괄괄하고 화많이 내던 모습이 아니다. 

수도자의 모습에 가깝고, 신에게 다가가는 경건한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인간적인 나약한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도 역시 연약한 한 인간이었음을 보면서 연민을 느낀다.

그는 코시모 메디치의 간곡한 부탁을 받으면서도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위해 피렌체에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다시 피렌체에 가지 못하고 로마에서 죽는다.

죽기전까지 피에타를 만들던 미켈란젤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마지막 작품을 만들었을까? 결국 자신은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하며 열심히 설계하고 지었던 베드로 대성당을 보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켈란젤로의 또다른 모습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p15 더 중요한 사실은 고향 사람들이 그를 피렌체에 데려오려고 거듭 노력했는데도, 그가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립하겠다는 약속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느님이 나 자신을 여기에 있게 하셨다”라는 확고한 믿음을 간직했으며 대성당 건설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p21 역사가 존 엘리엇은 이런 말을 했다. 좋은 역사서를 집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상력을 발취하면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회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행동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다.

p32 그들이 석상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기독교인 구경꾼들이 거칠게 제지했다. 유대인의 오염된 손길이 석상을 더럽힐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교도는 볼 수만 있을 뿐 직접 만져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p35 율리우스는 고집불통이었고 성질이 사나웠으며 그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 동시대인들은 강인한 의지와 까다로운 성품을 지닌 이 두 사람을 가리켜 테리빌리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p37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는 실제로 영묘를 마침내 완공한 60대 후반의 아주 명상적인 인물과는 크게 다른 사람이었다. 예술가 자신과 영묘를 지어 기념한 교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미켈란젤로와 그의 예술이 그전 40년 동안 어떻게 성숙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p48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석상들은 대리석 덩어리의 한계를 뚫고 나오려는 폭발적인 힘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라헬과 레아의 수수한 크기와 온유한 모습이 그 주위의 벽감에 의해 더욱 제약을 받고 있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p72 에르콜레 곤차가는 예술을 애호하는 교양 높은 사람이었고, 미켈란젤로 작품을 열렬히 숭배하면서 모아들이는 수집가였으며, 비토리아 콜론나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p85 루이지 델리초가 죽은 지 석 달 뒤인 1547년 2월, 미토리아 콜론나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그녀는 57세였고 미켈란젤로는 15세 연상이었다. 자신보다 젊은 가까운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났는데 왜 그는 아직도 살아 있는가?

p91 비록 간접적으로 아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들의 함구, 추방, 죽음을 목격하고서, 미켈란젤로는 어쩔 수 없이 이단심문소를 의식하면서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p102 또다시 여인의 아름다움이 나를 뒤흔들고 나를 격려하며 내게 채찍질을 가한다. 이제 오전 아홉 시의 기도는 지나갔고, 오후 세 시의 기도 그리고 저녁기도도 지나가서, 밤이 오고 있다.

p130 그 모형 지지자가 상갈로 설계를 풀이 모자라지 않는 풀밭이라고 말하자, 미켈란젤로는 까칠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예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황소와 어리석은 양 떼를 위해서라면.

p143 미켈란젤로는 공사의 세부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공사의 윤곽을 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공부를 많이 한 인문주의자의 책상물림 지식이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장인의 실무적 지식이었다.

p161 선배 건축가의 설계에 신경 쓰면서도 미켈란젤로는 그 자신의 독창적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p163 파울루스가 오래 살수록-실제로 그는 아주 장수한 교황이었다- 미켈란젤로가 맡아야 할 공사 수는 늘어났다. 처음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대성당 공사, 파루네세 궁전, 그리고 아직도 덜 끝난 캄피돌리오와 파올리나 예배당이 있었다.

p178 만약 그가 반란자들과 어울린다고 고소를 당한다면 부오나토리 가문은 얼마든지 국외 추방과 재산 몰수를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언제나 혼자라든지, 누구한테도 말을 걸지 않는다는 노골적이지만 잘 계산된 과장법을 이용해 평소에 권력자들을 조심하고 정치와는 단호하게 무관한 태도를 유지해 온 그의 습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p223 자신의 다양한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 그는 협력자들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에게 점점 더 많은 권한을 위임했다. 미켈란젤로의 후반기 예술과 건축은 이런 개인적 관계에 크게 의존했다.

p220 미켈란젤로와 그의 친구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발굴 현장에 호출되어 그 조각 난 고대 작품의 파편을 맞추어보니 하나의 돌덩이리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대리석 덩어리 여섯 개를 가지고 만든 다음에 잘 이어붙인 것이었다. 플리니우스의 기록은 오류로 판명되었다.

p245 미켈란젤로가 신임하는 그 젊은이는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여 그 작품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는 이 작업으로 별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피렌체의 두오모 오페라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사실은 그의 보수 작업이 성공적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p249 단테는 현명한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라는 두 안내인에게 동정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단테보다 두 배나 더 나이가 많은 미켈란젤로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안내자로 모시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미켈란젤로의 주님은 단테의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만큼 도움을 주지도 않았고 동정을 베풀지도 않았다.

p262 나는 그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피렌체의 인구를 늘려주는 것은 우리 가문의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지금 곁에 두고 있는 자식(당시 두 살 반이던 부오나로토)만이라도 살려달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거라

p263 1556년에서 1560년까지 다섯 해 동안, 미켈란젤로는 조카손자 중에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셋을 잃었다. 이런 여러 슬픈 사건들은 미켈란젤로를 전보다 더 부드럽고 관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미켈란젤로의 이런 여린 마음을 동시대인들은 때때로 목격했으나 미켈란젤로의 전기 작가들은 대체로 무시해 버렸다.

p274 1556년 7월, 미켈란젤로는 와인이 지금껏 받아본 것 중에 최상품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슬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을 나눠줄 사람이 이제는 없구나. 내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p300 파울루스 4세 치하 교황청의 억압적 분위기는 미켈란젤로에게 광적인 수도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연상시켰다. 미켈란젤로는 그 수도자가 처형된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찢어지는 목소리를 기억했다.

p312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이런 시련의 시기일수록 코시모 데 메디치, 조르조 바사리, 조카 리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를 고향 피렌체로 데려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와 같은 의무는 전혀 지는 일 없이 평화와 안정을 보장받을 것이라는 약속도 받았다. 미켈란젤로가 이런 권유를 모두 물리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로써 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공사에 기울인 헌신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p333 미켈란젤로는 창조적인 천재였을 뿐만 아니라 눈 밝은 사업가, 노련한 엔지니어, 융통성 있는 건설업자, 성공적인 기업가였다. 그는 성과 속을 무시로 오가는 사람이었다.

p336 미켈란젤로의 후기 경력 중 가장 큰 특징은 작업 요청이 점점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가 나이 들어가면서 모든 사람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을 점점 더 많이 요구하는 듯 했다.

p344 건축가인 자코도 델라 포르타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아름다운 돔을 미켈란젤로의 설게대로 건설했다. 그러므로 그는 미켈란젤로의 대성당을 완공한 사람인 셈이다.

p351 우리는 산 로렌초의 파사드를 위한 도면, 그리고 같은 교회의 목재 모형 등에서 미켈란젤로가 초창기부터 2열 기둥을 실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p360 피렌체의 경우 그 대답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에게서 나왔고,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가 해결안을 내놓았다.

p371 미켈란젤로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 코시모는 거듭하여 귀향을 요청했고, 심지어 의무 없는 한직을 마련해 주겠다는 얘기까지 했다. 예술가는 솔깃했지만, 그런 요청이 올 때마다 “여기 일을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며 완곡하게 물리쳤다.

381 미켈란젤로는 분노하고 좌절했다. 그 공사의 수석 건축가로 무려 15년이나 일해 왔는데도 현장 감독 한 명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한 달 동안 공사 현장에 나가 보지 않았고 마침내 1563년 9월에 교황이 개입하여 그에게 현장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했다. 그리하여 무명의 피에르 루이지 가에타는 마침내 고용되었고 미켈란젤로의 현장 대리인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p404 필생의 가장 중요한 과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그 얼마인가?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최종 프로젝트가 도다시 미완의 작품으로 끝난 것을 고통스럽게 의식했다. 그의 인생 여정이 끝나는 판에, 그의 최고 걸작은 막 생겨나기 시작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의 최고 업적일 뿐만 아니라, 교황청과 보편 교회의 가장 우뚝한 상징이었다.

p406 미켈란젤로 생애 후반의 특징은 그가 많은 프로젝트에 창의적인 책임을 맡았고 또 그를 주요 건축가로 인정하는 그보다 더 많은 프로제그에 활발히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가 생애 만년에 정성을 기울여 이룩한 높은 업적 덕분에 로마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가푸트 문디(세상의 머리)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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